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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외박 나온 미군들은 땐스홀인 클럽에서 술과 당구를 즐기면서 함께할 여자를 찾게 되었고 숙식할 방도 필요했다. 이런 수요에 따라 위안부가 생겨나고 미군물자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아져 이와 연관된 건축업자, 건자재상, 식재료점, 가구점 등과 포주가 늘어나게 됐다.
 
외출·외박 나온 미군들은 땐스홀인 클럽에서 술과 당구를 즐기면서 함께할 여자를 찾게 되었고 숙식할 방도 필요했다. 이런 수요에 따라 위안부가 생겨나고 미군물자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아져 이와 연관된 건축업자, 건자재상, 식재료점, 가구점 등과 포주가 늘어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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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hoto.paju.wiki/photo/galleries/%ED%8C%8C%EC%A3%BC%EC%97%AD%EC%82%AC/%EC%9A%A9%EC%A3%BC%EA%B3%A8/rc141121317.PNG 용주골 RC#1 사진, 연풍2리 평화원 뒷산에서 봉서산 방향 촬영,  미제2사단 재향군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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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rc1.png|400px|섬네일|용주골 RC#1 사진, 연풍2리 평화원 뒷산에서 봉서산 방향 촬영,  미제2사단 재향군인회]]
 
   
용주골이 서비스업 중심으로 시가지가 넓어지면서  '한국의 텍사스' 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이 당시 문산 선유리도  '한국의 뉴욕'이라고 불렸다. 용주골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환락가가 되자 내국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으면서 더 번성한 지역이 됐다.
 
용주골이 서비스업 중심으로 시가지가 넓어지면서  '한국의 텍사스' 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이 당시 문산 선유리도  '한국의 뉴욕'이라고 불렸다. 용주골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환락가가 되자 내국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으면서 더 번성한 지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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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골의 성병관리소는 현재 파주읍 소방서 건물에 위치해 있었고 공무원 1명, 의사1명, 간호사1명이 근무했다. 검사에서 일명 '낙검'이 되면 현재 금촌 로터리 부근에 언덕 위의 하얀집이라는 '성병관리소'에서 감금 치료를 받았다.
 
용주골의 성병관리소는 현재 파주읍 소방서 건물에 위치해 있었고 공무원 1명, 의사1명, 간호사1명이 근무했다. 검사에서 일명 '낙검'이 되면 현재 금촌 로터리 부근에 언덕 위의 하얀집이라는 '성병관리소'에서 감금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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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촌의 생활 ==
 
== 기지촌의 생활 ==
 
1978년 당시 파주에는 43개의 미군기지 중 8개가 남아 있었다. 1970년 기준 파주 지역 전체 220개리 중 35개리가 미군부대가 주둔하는 기지촌이었다. 파주군 인구 16.4만명 중 약 4.8만명이 기지촌에 거주하여  전체 인구 중 29.2%를 차지했다. 기지촌 35개리 중 용주골(연풍1리)의 인구는 약 4,700명으로 가장 많이 거주했다.
 
1978년 당시 파주에는 43개의 미군기지 중 8개가 남아 있었다. 1970년 기준 파주 지역 전체 220개리 중 35개리가 미군부대가 주둔하는 기지촌이었다. 파주군 인구 16.4만명 중 약 4.8만명이 기지촌에 거주하여  전체 인구 중 29.2%를 차지했다. 기지촌 35개리 중 용주골(연풍1리)의 인구는 약 4,700명으로 가장 많이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