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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4월 13일 (수) 11:54
한국 전쟁이 발발된지 3년여만에 미국 주도로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서부전선 일대에 참전했던 미군을 파주지역 곳곳에 배치했다. 용주골지역은 작전부대 2개와 RC#1이라는 미군 휴양소가 배치되면서 농촌지역인 용주골은 '한국의 텍사스촌'이라는 환락가로 변했다. <pi 2021/12/16>
[[File:용주골5인.jpg|400px|섬네일]]
== 위치와 여건 ==
용주골은 문산보다 6km 정도 후방에 위치한 성가, 조가,박가, 윤가의 집성촌 마을이다.
1953.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미군은 용주골 지역에 캠프 보먼트(camp beaumont)와 캠프 버드(Camp Beard) 기간부대를 배치하고 서부전선의 휴가 병사를 위해 제1휴양소(Recreation Center #1)를 설치했다.
통상 RC#1이라고 불리던 제1휴양소는 용주골 삼거리에서 법원지역으로 가는 우측 방향에 자리 잡았고 이외에도 문산 선유리에 제4휴양소(RC#4), 민통선 지역 군내면과 진동면에도 제2,3 휴양소를 설치해 전체 4개소를 운영했다.
[{{:파주역사:용주골힝공.png?direct&600|연풍리 중심 항공사진 2021.12월 / 우측 중간 2021년 신설 로터리, 사진 구글}}]
== 발생과 배경 ==
1953년 한국과 미국이 맺은 한미상호방위 조약에 따라 미국은 육·해·공군을 한국의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할 권리를 갖게 됐다.
주한미군은 전쟁 중에 30만이 넘는 병력 규모이었다가 휴전후 대부분 철수하고 1960년대 말까지 6만여명이 주둔했다. 1971년에 지상군 1개 사단과 1980년대 초 1개여단이 철수 하면서 지상군 여단과 공군 등 37천여명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
용주골에는 RC#1 휴양소가 1956년에 설치되고 미군기지는 캠프 보먼트, 캠프 버드와 더불어 파주리에 캠프커스터(Camp Custer)와 대추벌 부근에 2개 부대등 전체 5개 부대가 있었다.
용주골은 훈련을 마치고 휴가를 나오거나 주말에 외출로 나온 미군으로 가득했고 클럽과 다방, 목욕탕, 식당 등이 신장개업하면서 좁은 마을에는 미군 물자와 달러가 넘쳐 났다. 전쟁으로 생산기반이 무너져 돈벌이가 부족한 시기여서 피난민과 무직자들이 전국에서 용주골로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외출·외박 나온 미군들은 땐스홀인 클럽에서 술과 당구를 즐기면서 함께할 여자를 찾게 되었고 숙식할 방도 필요했다. 이런 수요에 따라 위안부가 생겨나고 미군물자로 지어진 건축물이 많아져 이와 연관된 건축업자, 건자재상, 식재료점, 가구점 등과 포주가 늘어나게 됐다.
[http://photo.paju.wiki/photo/galleries/%ED%8C%8C%EC%A3%BC%EC%97%AD%EC%82%AC/%EC%9A%A9%EC%A3%BC%EA%B3%A8/rc141121317.PNG 용주골 RC#1 사진, 연풍2리 평화원 뒷산에서 봉서산 방향 촬영, 미제2사단 재향군인회]
용주골이 서비스업 중심으로 시가지가 넓어지면서 '한국의 텍사스' 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이 당시 문산 선유리도 '한국의 뉴욕'이라고 불렸다. 용주골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환락가가 되자 내국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으면서 더 번성한 지역이 됐다.
점차 용주골이 환락가로 전락하게 되자 미군 당국은 한국정부에 클럽에 대한 내국인 출입금지와 클럽 종사자, 위안부에게 성병검사를 요구했다. 미군 당국은 파주군 지역 전체 위안부를 1만명으로 추산했고 한국 주둔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는 미군보다 성병 발병률이 5배 이상 높다고 봤다.<ref>Tim Shorrock,2019.2월, Welcome to the Monkey House, The New Republic</ref>
한국 정부는 미군의 성병 예방을 위해 기지촌 지역의 클럽과 식당 종사자, 사창가 거주 위안부에게 건강검진이라는 형식으로 주1회 성병검사를 받도록 했다. 성병검사는 관내 5개 병원((파주리,신산리, 장파리, 늘노리,봉일천))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미군 휴양소가 있는 선유리와 용주골은 공무원이 직접 관리하는 성병관리소에서 검사 받도록 했다.
용주골의 성병관리소는 현재 파주읍 소방서 건물에 위치해 있었고 공무원 1명, 의사1명, 간호사1명이 근무했다. 검사에서 일명 '낙검'이 되면 현재 금촌 로터리 부근에 언덕 위의 하얀집이라는 '성병관리소'에서 감금 치료를 받았다.
== 기지촌의 생활 ==
1978년 당시 파주에는 43개의 미군기지 중 8개가 남아 있었다. 1970년 기준 파주 지역 전체 220개리 중 35개리가 미군부대가 주둔하는 기지촌이었다. 파주군 인구 16.4만명 중 약 4.8만명이 기지촌에 거주하여 전체 인구 중 29.2%를 차지했다. 기지촌 35개리 중 용주골(연풍1리)의 인구는 약 4,700명으로 가장 많이 거주했다.
1962년부터 1970년 기간 중에는 용주골의 인구가 연평균 5~10% 증가했고, 1977년 기준으로 20~24세 여성 인구가 급증했다. 용주골에 등록된 위안부 수는 1963년 295명, 1969년 800여명으로 미등록자를 포함하면 1천여명이 될 것으로 추정한다.
내국인 출입이 금지되는 클럽이라는 관광업소도 1960년 파주 전체에 74개소이었으나 용주골에만 20개소가 영업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용주골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서비스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식료·잡화점(17%), 양품점(8%), 양복점(8%), 클럽(7%), 선술집(6%) 순이다. 미군이 복무를 마치고 귀국하거나 휴가때 이용하는 보석상, 화방, 기념품점, 사진관이 성행했고 미군과 결혼을 위한 국제결혼과 비자발급 대행사도 영업을 했다.
[http://photo.paju.wiki/photo/galleries/%ED%8C%8C%EC%A3%BC%EC%97%AD%EC%82%AC/%EC%9A%A9%EC%A3%BC%EA%B3%A8/4745978402_550895f175_o.jpg?600 용주골 시장골목 사진, Ken Leighty]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미군물자의 매매는 불법이지만 수익이 많은 장사였다. 일명 '양키 물건 장사꾼'은 보통 위안부가 미군을 통해 PX에서 구입한 양주나 담배를 인수 받아 전문 업소나 서울 남대문 시장으로 유통했다.
당시 미군부대 식당에 근무하는 하우스보이를 통해 미군이 먹다 남은 햄이나 치킨 등이 부대 주변 식당으로 유출되어 [[파주맛동네:특산물정보#부대찌개|부대찌개]]가 만들어 진 것이다. 문산에 일부 업소는 1990년대 초까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육류를 이용했다.
용주골의 경제는 1천여명이나 되는 위안부로 시작된다. 이 중 목욕탕은 주요 수익원 중 하나이다. 전후에 급배수 시설이 불량하지만 위안부들은 매일 목욕탕을 이용해야만 했다. 목욕탕은 포주의 감시를 피할 수 있고 위안부들 간의 안부와 정보를 알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파주읍 지역에 전체 4개 목욕탕 중 3개는 용주골에 밀집되어 있었다. 일반인은 주로 오전에 목욕탕을 이용했지만 위안부들은 밤늦게가지 영업활동을 하느라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이용했다. 목욕탕이 위안부들의 주요 소비자임에도 남탕의 면적과 비슷하면서 사물함은 여탕이 두배 이상 많았다. 이는 공간을 좁게 만들어 여성의 동시 입장을 제한하고 순환을 빠르게 할려는 업주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용주골의 캠프타운 경제는 지역의 근대화에도 일조했다. 다른 지역보다 먼저 가로등이 설치되고 직통전화가 개통됐다. 이와함께 '닭튀김', '플레이 보이' 잡지와 같은 미국문화를 일찍 맛 볼수 있는 곳이었다.
캠프타운은 미군의 정책에 종속된 경제 체계이었다. 미군당국이 외출 금지(off-limit) 명령을 발동하면 상인들이나 지역유지가 미군 고위직에게 해제를 건의하거나 위안부를 앞세워 캠프 앞에서 데모를 했다.<ref>김조영, 1978, "기지촌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 경기도 파주지방을 중심으로"</ref>
== 경제적 쇠퇴 ==
1971년 미군기지가 이전되거나 축소되면서 용주골은 쇠퇴기를 맞았다. 미군을 상대로 영업하던 상인과 포주는 대구, 왜관, 칠곡 등으로 따라 이동했다. 또한 미군이 떠나면서 경기가 안좋아 교육환경이 나빠졌다고 초교생 절반이 서울 연신내 부근으로 전학을 갔다고 한다.
미군부대 이전으로 경기가 위축되었지만 문산, 판문점 등에 잔류한 부대에서 미군들이 용주골을 찾아오거나 위안부들이 미군 훈련장으로 '출장'을 가는 영업을 해 경기는 어느정도 유지되었다. 미군이 점점 줄어 들자 1990년대부터는 완전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한편으로 용주골의 외곽이기도 한 대추벌(연풍2리)은 1990년대 후반 서울 천호동, 신길동, 미아리 일대의 윤락가가 폐쇄되면서 한국인을 상대로한 집창촌으로 탈바꿈됐다. 이러한 상황은 2004년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되기까지 계속됐다.
1996년과 1998년 대규모 수해로 인해 상당수 건물이 리모델링 또는 신축되었지만 2016년 당시 용주골 대로변과 연풍시장 점포 217개소 중 약 40%인 80개소가 공실로 나타났다. 용주골의 인구도 54% 이상이 65세 이상이고 기초생활 수급자도 약15%로 전국 단위 3%비율보다 높았다. 이는 당시 위안부였던 여성들이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이유로 볼 수 있다.<ref>백일순, 2021.4월, 왜 미군 위안부는 잊혀져야 했는가?, 로컬리티 인문학</ref>
2019년 현재 용주골에서는 행정안전부의 ‘특수상황지역 개선 사업 지원(2017-2021)’을 받는 ‘창조문화밸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거리 복원을 통해 관광 자원을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있다.
용주골은 용이 승천한 연못이 있는 곳이다. 캠프타운으로 만들어진 경제적 호황기는 사라졌지만 이제 지역 주민과 상공인들이 새로운 경제기반을 다지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는 사연 많은 곳이다.
==관련 정보==
===이슈 유튜브===
<youtube>DpyvrLzV22U</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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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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