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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 | ==생애== |
| − | 옥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이봉(李逢·1526~?)의 서녀로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은 옥봉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아낌 없이 사주었다. | + | 옥봉은 양녕대군의 고손자 이봉(李逢·1526~?)의 서녀로 충청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은 옥봉의 글재주를 기특히 여겨 시를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아낌 없이 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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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봉의 호도 아버지 이봉이 옥돌이 솟아 오른듯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직접 만들어 주었다. | | 옥봉의 호도 아버지 이봉이 옥돌이 솟아 오른듯 아름다운 봉우리라는 뜻으로 직접 만들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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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녀로 태어나 양반가에 첩으로 시집을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옥봉은 '왕실의 후예'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옥봉은 양반 집안에 출가 하였으나 남편과 사별하여 친정으로 돌아 왔다. | + | 서녀로 태어나 양반가에 첩으로 시집을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옥봉은 '왕실의 후예'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옥봉은 17세에 양반 집안에 출가 하였으나 1년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친정으로 돌아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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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봉은 한양에서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조원(1544~1595)을 만나게 되고 그를 흠모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알게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만나 소실로 맞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 당했다. | | 옥봉은 한양에서 시인묵객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조원(1544~1595)을 만나게 되고 그를 흠모하게 됐다. 이런 사정을 알게된 아버지 이봉은 조원을 만나 소실로 맞아 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 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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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원의 조상묘가 파주에 있었고 묘지기가 소도둑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할 처지가 되자 묘지기 아내가 다급하게 조원을 찾아 갔다. 조원은 출타 중이어서 옥봉은 위인송원(爲人訟寃)이라는 시 한 수를 적어 묘지기 아내에게 전해 주었다. | | 조원의 조상묘가 파주에 있었고 묘지기가 소도둑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할 처지가 되자 묘지기 아내가 다급하게 조원을 찾아 갔다. 조원은 출타 중이어서 옥봉은 위인송원(爲人訟寃)이라는 시 한 수를 적어 묘지기 아내에게 전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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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파주목사는 옥봉의 시를 보고 묘지기를 석방했다. 그러나 남편 조원은 사헌부 고위직의 아내가 파주목사에게 사찰을 보내 청탁한 것으로 보아 옥봉을 처가로 보냈다. | + | 파주목사는 옥봉의 시를 보고 묘지기를 석방했다. 그러나 남편 조원은 사헌부 고위직의 아내가 파주목사에게 서찰을 보내 청탁한 것으로 보아 옥봉을 처가로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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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ile:옥봉묘비.jpg|400px|섬네일|용미리의 묘비, 사진 파주알리미 강병석]] | | [[File:옥봉묘비.jpg|400px|섬네일|용미리의 묘비, 사진 파주알리미 강병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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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옥봉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뚝섬 근처의 허름한 초가에서 병들 어 죽었다는 설과 당나라 시인들을 동경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갔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 이옥봉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뚝섬 근처의 허름한 초가에서 병들 어 죽었다는 설과 당나라 시인들을 동경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갔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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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 다른 하나의 사망설은 옥봉의 시신이 중국해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설화 내용에 의하면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면서 조원이 아버지인것을 알게 됐다. 40년 전 중국 동해안에서 종이로 감긴 시신이 발견 됐는데 노끈을 풀고 종이를 보니 그 뒷면에 빽빽하게 시들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 + | 또 다른 하나의 사망설은 옥봉의 시신이 중국해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설화 내용에 의하면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의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면서 조원이 아버지인것을 알게 됐다. 40년 전 중국 동해안에서 종이로 감긴 시신이 발견 됐는데 노끈을 풀고 종이를 보니 그 뒷면에 빽빽하게 시들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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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종이에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같이 빼어난 시여서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명나라 대신은 서가에서 시집 한 권 「이옥봉시집」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 | 그 종이에는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나같이 빼어난 시여서 한 권의 시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명나라 대신은 서가에서 시집 한 권 「이옥봉시집」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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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설화는 옥봉의 명성 때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원의 셋째 아들인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없다. 다만 1606년 허균과 함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 일행을 맞이한 적은 있다. 종사관은 중국 사신이 조선 땅에 발 디딜 때부터 이들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직책이다. | | 이 설화는 옥봉의 명성 때문에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조원의 셋째 아들인 조희일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이 없다. 다만 1606년 허균과 함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 일행을 맞이한 적은 있다. 종사관은 중국 사신이 조선 땅에 발 디딜 때부터 이들을 수행하며 접대하는 직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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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천조씨 후손들은 2017년 4월 사망 위치나 시기를 알 수 없는 옥봉을 기리고자 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혜음원지]] 주변 임천조씨 묘역에 운강공 조원의 묘 옆에 묘비를 세웠다. | + | 임천조씨 후손들은 2017년 4월 사망 위치나 시기를 알 수 없는 옥봉을 기리고자 광탄면 용미리 [[혜음원지|혜음원지]] 주변 임천조씨 묘역 운강공 조원의 묘 옆에 묘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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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품집== | | ==작품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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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련 정보== | | ==관련 정보== |
| | ===링크 모음=== | | ===링크 모음=== |
| | + | *[https://www.okh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257 옥천향수신문] |
| | + | *[http://photo.paju.wiki/pkstorage/repository/지역사/이옥봉시인.pdf 여류시인 옥봉을 찾아서, 성지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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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변 명소''' | | '''주변 명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