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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진===
 
===임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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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410708모던타임즈2권임진진1.png|400px|섬네일|한국전쟁 당시 임진진의 진서문,사진 파주시]]
 
임진나루의 방어를 위해 입구와 주변에 축성된 성곽으로  조선 영조는 1755년에 군진인 임진진(臨津鎭)을 설치하고 관문에 진서문을 설치했다.
 
임진나루의 방어를 위해 입구와 주변에 축성된 성곽으로  조선 영조는 1755년에 군진인 임진진(臨津鎭)을 설치하고 관문에 진서문을 설치했다.
 
    
 
    
 
===장산진===
 
===장산진===
영조는 도성의 외곽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임진강 일대의 방어체계를 개편했다. 이에 임진나루는 임진진(臨津鎭)으로 바꾸고, 강의 하류에 있는 장산진(長山鎭)을 추가로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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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도성의 외곽 방어체계를 강화하고, 도성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임진강 일대의 방어체계를 개편했다. 이에 임진나루는 임진진(臨津鎭)으로 바꾸고, 강의 하류에 있는 장산진(長山鎭)을 추가로 설치했다.[[장산진돈대|장산진 돈대]]
    
===낙하진===
 
===낙하진===
탄현면 낙하리에 있는 나루터로 신증동국여지승람』(파주)에 임진도(臨津渡, 임진나루)의 하류에 있다고 소개됐다.낙하진은 서울과 개성간의 큰 길목으로 도승을 두어 관리하고 장단면 석곳리와 연결되어 있다. [[낙하진|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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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현면 낙하리에 있는 나루터로 신증동국여지승람』(파주)에 임진도(臨津渡, 임진나루)의 하류에 있다고 소개됐다.[[낙하진|낙하진]]은 서울과 개성간의 큰 길목으로 도승을 두어 관리하고 장단면 석곳리와 연결되어 있다.
    
===덕진산성===
 
===덕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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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계토성===
 
===육계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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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육계토성전경.jpg|400px|섬네일|육계토성 전경, 사진 파주시]]
 
백제초기에 축조된 성으로 임진강 남안의 적성면 주월리의 평지토성으로  2007년 10월 2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됐다.
 
백제초기에 축조된 성으로 임진강 남안의 적성면 주월리의 평지토성으로  2007년 10월 2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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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신의 증손인 이이(李珥)가 공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됐다.
 
이명신의 증손인 이이(李珥)가 공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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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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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강 주위의 강변 경치와 명소를 17세기 南龍翼(남용익)의 임진강팔영시(臨津江八詠詩)로 소개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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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익 노래한 8 곳의 명소는 화석정의 봄, 장암의 낚시와  송암의 구름, 장포의 가랑비, 동파역의 달,적벽의뱃놀이, 동원의 저녁눈, 진사의 새벽종으로 화석정을 중심으로 2km 정도의 범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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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당 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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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탄현면 오두산의 양요당(兩樂堂)에서 본 여덟 경치를 성호 이익이 시로 남긴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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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당은 18세기 초반 교하 오두산과 검단산 사이(지금의 탄현면 성동리)에 오씨 성을 가진 인물이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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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당이 위치했던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강과 임진강의 물이 합쳐져 바다로 내려가는 곳이 보이는 오두산 자락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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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경시는 오두제월, 봉상품범, 송리석봉, 검단효종, 청교완가, 해포관어, 임악청람, 해문낙조를 노래하고 있다.<ref>파주에서 https://www.atpaju.com/news/cate/파주가%20좋다/post/460</ref>
      
===문산포===
 
===문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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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水運)의 중심지로서 풍덕, 김포, 강화, 고림 포, 연천, 송도와 한양 등지를 황포 돛대로 왕래하면서 상선배와 농산물의 물물교환의 집결지로 다 시장이 형성되어 호황을 이루었다.  
 
수운(水運)의 중심지로서 풍덕, 김포, 강화, 고림 포, 연천, 송도와 한양 등지를 황포 돛대로 왕래하면서 상선배와 농산물의 물물교환의 집결지로 다 시장이 형성되어 호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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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동리에 여러 무당이 집결하게 되었으며 해마다 호대감 놀이를 베풀어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온다. 이에 따라 조선조 개국 이후 원평도호 부 청사는 파주목으로 승격됨에 따라 파주읍 주내동으로 이전되었으나 경의선 복선으로 인하여 더 욱 번창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파주에 전해오는 임진강 관련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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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당동리에 여러 무당이 집결하게 되었으며 해마다 호대감 놀이를 베풀어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온다. 이에 따라 조선조 개국 이후 원평도호 부 청사는 파주목으로 승격됨에 따라 파주읍 주내동으로 이전되었으나 경의선 복선으로 인하여 더 욱 번창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ref>파주에 전해오는 임진강 관련 전설</ref>
    
==자연 지형==
 
==자연 지형==
 
===초평도===
 
===초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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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초평도북에서a.JPG|400px|섬네일|북에서 본 초평도, 사진 파주위키]]
 
임진강의 유일한 섬으로 문산읍 장산리 북부에 위치하고 섬의 면적은 1.765km²이다. 대부분 논이었던 이섬은 한국 전쟁후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면서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구역이 됐다
 
임진강의 유일한 섬으로 문산읍 장산리 북부에 위치하고 섬의 면적은 1.765km²이다. 대부분 논이었던 이섬은 한국 전쟁후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면서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구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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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고종9년)에 제작된 지방지도에 처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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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고종9년)에 제작된 지방지도에 처음 나타난다.[[초평도|자세히 보기]]
    
===일미도===
 
===일미도===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탄현면 성동리와 북한의 관산반도 사이에 있었던 섬으로 여의도보다 2.2배나 크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탄현면 성동리와 북한의 관산반도 사이에 있었던 섬으로 여의도보다 2.2배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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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조선시대 공문서에 의하면 일미도 (一眉島)를 왕실 소유로 하여 채소를 공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가 1900년대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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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조선시대 공문서에 의하면 [[일미도|일미도(一眉島)]]를 왕실 소유로 하여 채소를 공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가 1900년대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지 않는다.
    
===지류하천===
 
===지류하천===
 
임진강을 본류로 하여 흘러 드는 하천으로 문산천을 비롯하여 법원천, 독개, 설마천 등 전체 14개가 있다.
 
임진강을 본류로 하여 흘러 드는 하천으로 문산천을 비롯하여 법원천, 독개, 설마천 등 전체 14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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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지류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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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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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진강 주위의 강변 경치와 명소를 17세기 南龍翼(남용익)의 임진강팔영시(臨津江八詠詩)로 소개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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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용익 노래한 8 곳의 명소는 화석정의 봄, 장암의 낚시와  송암의 구름, 장포의 가랑비, 동파역의 달,적벽의뱃놀이, 동원의 저녁눈, 진사의 새벽종으로 화석정을 중심으로 2km 정도의 범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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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당 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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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탄현면 오두산의 양요당(兩樂堂)에서 본 여덟 경치를 성호 이익이 시로 남긴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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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당은 18세기 초반 교하 오두산과 검단산 사이(지금의 탄현면 성동리)에 오씨 성을 가진 인물이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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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요당이 위치했던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강과 임진강의 물이 합쳐져 바다로 내려가는 곳이 보이는 오두산 자락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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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경시는 오두제월, 봉상품범, 송리석봉, 검단효종, 청교완가, 해포관어, 임악청람, 해문낙조를 노래하고 있다.<ref>파주에서 https://www.atpaju.com/news/cate/파주가%20좋다/post/460</ref>
    
==주요시설==
 
==주요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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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자유로에서 판문점까지 도로신설 및 확장공사가 추진되면서 임진강을 건너는 교량으로 신설됐다.
 
1993년 자유로에서 판문점까지 도로신설 및 확장공사가 추진되면서 임진강을 건너는 교량으로 신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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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교는 1993.12~1998.6.15일까지 공사가 진행됐고 길이 900m, 폭 24m, 왕복 4차로 778억원 사업비 소요됐다. 이 교량은 서울지방국토관리청과 육군 제1사단이 시행했고 건설 당시에는 ‘자유대교’, ‘임진대교’로 불리다가 ‘통일대교’라는 이름으로 개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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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대교|통일대교}}는 1993.12~1998.6.15일까지 공사가 진행됐고 길이 900m, 폭 24m, 왕복 4차로 778억원 사업비 소요됐다. 이 교량은 서울지방국토관리청과 육군 제1사단이 시행했고 건설 당시에는 ‘자유대교’, ‘임진대교’로 불리다가 ‘통일대교’라는 이름으로 개통됐다.
    
1998년 6월 16과 10월 27일 2차례에 걸쳐 정주영 전현대그룹회장은 총 1,0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통일대교를 건너북한을 방문했다.
 
1998년 6월 16과 10월 27일 2차례에 걸쳐 정주영 전현대그룹회장은 총 1,001마리의 소 떼를 몰고 통일대교를 건너북한을 방문했다.
    
===전진교===
 
===전진교===
파평면 두포리와 진동면 하포리를 잇는 임진강 교량으로 1984년에 한국전쟁 당시 작전교량이었던 스푼빌교 위치에 설치됐다. 교량 명칭은 교량출입을 관할하는 육군 보병 제1사단의 '전진'의 구호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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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면 두포리와 진동면 하포리를 잇는 임진강 교량으로 1984년에 한국전쟁 당시 작전교량이었던 스푼빌교 위치에 설치됐다. 교량 명칭은 교량출입을 관할하는 육군 보병 제1사단의 '전진'의 구호를 이용한 것으로 알려진다.[[임진강_작전교량#스푼빌교|임진강 작전교량 스푼빌교 참조]]
 
    
 
    
 
===리비교===
 
===리비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건설한 파평면 장파리와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임진강 교량으로 1953년에 설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건설한 파평면 장파리와 진동면 용산리를 잇는 임진강 교량으로 1953년에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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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후 파평과 적성지역의 주민과 군부대의 민통선 관문으로 이용되던 리비교는2016년 위험교량으로 판정 받아 교량을 해체하고 재가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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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후 파평과 적성지역의 주민과 군부대의 민통선 관문으로 이용되던 [[리비교|리비교]]는2016년 위험교량으로 판정 받아 교량을 해체하고 재가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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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교 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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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남교===
 
===신장남교===
 
적성면 두지리와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를 잇는 임진강 교량이다.
 
적성면 두지리와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를 잇는 임진강 교량이다.
      
===비룡대교===
 
===비룡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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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작전교량===
 
===임진강 작전교량===
한국전쟁 당시 미군측이 보급로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설치된 교량으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파주와 연천에 이르는 임진강에 11개 교량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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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미군측이 보급로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설치된 교량으로 파주와 연천 구간 임진강에 전체 11개 교량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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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량의 이름은 주로 휴전선을 통과하는 철새의 이름따서 만들었다. 당시 설치된 교량은  자유의다리(Freedom Gate), 홍커(Honker,기러기 ), 스푼빌(Spoonbill,저어새), 리비교(Libby, X-Ray),위전(Widgeon. 홍머리오리), 틸교(Teal, 쇠오리)등 6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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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량의 이름은 주로 휴전선을 통과하는 철새의 이름따서 만들었고 파주 구역에는 자유의다리(Freedom Gate), 홍커(Honker,기러기 ), 스푼빌(Spoonbill,저어새), 리비교(Libby, X-Ray),위전(Widgeon. 홍머리오리), 틸교(Teal, 쇠오리)등 6개가 설치됐다.[[임진강_작전교량|자세히 보기]]
    
==전설==
 
==전설==
 
===임진나루 뱃사공===
 
===임진나루 뱃사공===
임진나루는 옛날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국도로서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뱃사공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옷차림과 거동만 보아도 어떠한 사람인지 잘 알아 맞추기로 유명했다.<자세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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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나루는 옛날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국도로서 교통이 빈번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뱃사공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옷차림과 거동만 보아도 어떠한 사람인지 잘 알아 맞추기로 유명했다.
    
===고려 왕건 궁터===
 
===고려 왕건 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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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단부사 아내의 죽음===
 
=== 장단부사 아내의 죽음===
1623년 광해군 당시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이었던 장단부사 이서의 부인이 거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나룻배에 깃발을 잘못 보아 임진강으로 투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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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년 광해군 당시 인조반정의 주도 세력이었던 장단부사 이서의 부인이 거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나룻배에 깃발을 잘못 보아 임진강으로 투신했다고 한다.<ref>파주에 전해오는 임진강 관련 전설</ref>
    
==관련 정보==
 
==관련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