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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말 탄현과 교하지역인 공릉천 하류에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 조성한 제방(보)이다.
| + | 조선시대 말 탄현과 교하지역인 공릉천 하류에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 조성한 제방(보)이다. |
| [[File:갈현벌판.jpg|400px|섬네일|탄현면 갈현리 농지, 사진 카카오맵]] | | [[File:갈현벌판.jpg|400px|섬네일|탄현면 갈현리 농지, 사진 카카오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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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방전은 조선시대 왕실의 종친에게 지급하는 토지와 매매 또는 개간으로 취득한 농지로 면세와 더불어 노비에게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 | 궁방전은 조선시대 왕실의 종친에게 지급하는 토지와 매매 또는 개간으로 취득한 농지로 면세와 더불어 노비에게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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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방전의 관리는 궁방 직속 관원인 궁차를 파견해 관리하거나 궁방전의 관리 청부인인 도장(導掌)을 파견해 관리하였다. 궁방 직속으로 감관(監官), 마름(舍音) 등을 두었다.<ref>강윤원, 교하 영천보와 박필훈, 최봉현에 대한 고찰, 2023년 파주문화</ref> | + | 궁방전의 관리는 궁방 직속 관원인 궁차를 파견해 관리하거나 궁방전의 관리 청부인인 도장(導掌)을 파견해 관리하였다. 궁방 직속으로 감관(監官), 마름(舍音) 등을 두었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6781</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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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의 위치 변화== | | ==보의 위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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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이후 저지대 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관개시설의 중심 이동 및 입지 변화가 일어났다. 저지대 개간에는 관개시설 뿐만 아니라, 하천 또는 조수(潮水)의 범람에 대비한 방수시설 등 복합적인 수리시설의 설치가 필요했다. 17~18세기 신전(新田) 개간의 확대와 경영 형태는 축보(築洑), 축언(築堰)과 결합되어 논 면적을 확대하는 데 이용되었다. | | 16세기 이후 저지대 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관개시설의 중심 이동 및 입지 변화가 일어났다. 저지대 개간에는 관개시설 뿐만 아니라, 하천 또는 조수(潮水)의 범람에 대비한 방수시설 등 복합적인 수리시설의 설치가 필요했다. 17~18세기 신전(新田) 개간의 확대와 경영 형태는 축보(築洑), 축언(築堰)과 결합되어 논 면적을 확대하는 데 이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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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궁방전의 광범위한 분포는 조수와 내수(內水)를 차단하기 위한 축언(築堰)과 함께 관개수를 공급하기 위한 축보(築洑) 및 수로(水路)의 개설을 농경지 면적을 확대해 나갔다. 구한말에는 공릉천과 임진강 지류인 탄포천 하류에는 궁방 소유의 보가 여러 개 축조됐다. | + | 궁방전의 광범위한 분포는 조수와 내수(內水)를 차단하기 위한 축언(築堰)과 함께 관개수를 공급하기 위한 축보(築洑) 및 수로(水路)의 개설하여 농경지 면적을 확대해 나갔다. 구한말에는 공릉천과 임진강 지류인 탄포천<ref>현재는 탄포천을 만우천으로 부른다</ref> 하류에는 궁방 소유의 보가 여러 개 축조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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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의 설치== | | ==보의 설치== |
− | 보는 매년 봄과 가을, 조수 간만의 차가 작은 시기에 몽리구역 사람들이 8m 높이의 흙제방을 쌓았다. | + | 보는 매년 봄과 가을, 조수 간만의 차가 작은 시기에 몽리구역 사람들이 8m 높이의 흙제방을 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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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천보는 높이 약 8m, 길이는 하천폭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150m 이상, 아래 폭은 약 30m, 위 폭은 6~7m 정도였다. 주변 개흙으로 보를 쌓았으며, 매년 조수 간만의 차가 작은 약 10일간 진행했다. 사리 전에 완공되지 않으면 밀물에 의해 허물어지는 위험이 있었다. | + | 방천보는 높이 약 8m, 하천폭 150m 이상으로 하천폭은 지형에 따라 달라지고 보의 아래 폭은 약 30m, 위 폭은 6~7m 정도였다. 주변 개흙으로 보를 쌓았으며, 매년 조수 간만의 차가 작은 약 10일간 진행했다. 사리 전에 완공되지 않으면 밀물에 의해 허물어지는 위험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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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을 이용하여 제방 형태로 쌓는 것으로 일부 구간은 물이 드나들도록 터놓은 후에 보를 쌓았고 제방이 완성된 후에 막는 방법을 이용했다. | + | 보는 흙을 이용하여 제방 형태로 쌓는 것으로 일부 구간은 물이 드나들도록 터놓은 후에 보를 쌓았고 제방이 완성된 후에 막는 방법을 이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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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에 참여하는 인력에 대하여는 보주(洑主)가 품값을 주고 인력을 고용했는데, 하루 약 200~300명, 전체 작업 기간 약 3,000명이 동원되다. 노임은 수세(水稅)로 충당되었으며, 두락당 벼 2두를 납부했다. | | 공사에 참여하는 인력에 대하여는 보주(洑主)가 품값을 주고 인력을 고용했는데, 하루 약 200~300명, 전체 작업 기간 약 3,000명이 동원되다. 노임은 수세(水稅)로 충당되었으며, 두락당 벼 2두를 납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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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의 이용== | | ==보의 이용== |
− | 가을철에 하천을 막아 보를 축조해 겨우내 논에 물을 가두어 저수지로 이용했고 여름철에는 교량 역할을 했다 . 저수지의 물은 높은 지대부터 순차적으로 공급하여 모내기에 이용했다. | + | 가을철에 하천을 막아 보를 축조해 겨우내 논에 물을 가두어 저수지로 이용했고 여름철에는 교량 역할을 했다. 저수지의 물은 높은 지대부터 순차적으로 공급하여 모내기에 이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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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의 위치== | | ==보의 위치== |
− | ===교하 지역===
| + | 영친왕궁이 방천 일대의 수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보를 축조하고 매매한 것으로 교하군소재장토도서문적에 나타난다. |
− | 교하 지역에서는 영친왕궁이 방천 일대의 수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보를 축조하고 매매한 것으로 교하군소재장토도서문적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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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 축조를 기록한 문서들은 영친왕궁에서 보를 축조하기 이전 방천 일대의 수리 상황과 보 위치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 + | 보 축조를 기록한 문서들은 영친왕궁에서 보를 축조하기 이전 방천 일대의 수리 상황과 보 위치에 대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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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1906년과 1907년의 수세기는 해당 지역의 수세징수책과 국유지조사서초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영친왕궁에서 활발한 수리 시설 관리 및 조정이 이루어 것으로 볼 수 있다. | | 특히, 1906년과 1907년의 수세기는 해당 지역의 수세징수책과 국유지조사서초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영친왕궁에서 활발한 수리 시설 관리 및 조정이 이루어 것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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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현평 지역=== | + | ===갈현평 지구=== |
| 갈현평 지역에서는 영친왕궁이 1901년에 갈현평에 위치한 갈방축평보와 갈현리하평보를 포함하여 두 개의 보를 축조하고, 이듬해에 이 보들을 매매한 것이다. | | 갈현평 지역에서는 영친왕궁이 1901년에 갈현평에 위치한 갈방축평보와 갈현리하평보를 포함하여 두 개의 보를 축조하고, 이듬해에 이 보들을 매매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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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역의 보는 현재 위치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문서 기록과 현존하는 지명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들이 방천 북쪽의 두 다른 지류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 이 지역의 보는 현재 위치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문서 기록과 현존하는 지명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들이 방천 북쪽의 두 다른 지류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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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천 지역=== | + | ===방천 지구=== |
| 방천 지역에서는 영친왕궁보가 방천 본류에 축조되었으며, 궁방전 폐지 후 방천보로 이어진 것이다. | | 방천 지역에서는 영친왕궁보가 방천 본류에 축조되었으며, 궁방전 폐지 후 방천보로 이어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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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보가 방천 일대와 그 하류 지역의 농지에 관개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영친왕궁에서 기존의 보를 매입한 것은 새로운 방천보에 의해 기존 보의 몽리구역이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영친왕궁은 기존 보 소유주들에게 수세권 소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 | 이 보가 방천 일대와 그 하류 지역의 농지에 관개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영친왕궁에서 기존의 보를 매입한 것은 새로운 방천보에 의해 기존 보의 몽리구역이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영친왕궁은 기존 보 소유주들에게 수세권 소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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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룡두천 지역=== | + | ===청룡두천 지구=== |
| 청룡두천 지역에서는 방천보와 병행하여 중요한 수리 시설이 있었으며, 방천보보다 하류에서 방천과 합류하는 청룡두천에 연다메보라고 불리는 중보가 있었던 것이다. 연다메보는 방천보 하류 지역에 관개수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보조 시설로 축조된 것이다. | | 청룡두천 지역에서는 방천보와 병행하여 중요한 수리 시설이 있었으며, 방천보보다 하류에서 방천과 합류하는 청룡두천에 연다메보라고 불리는 중보가 있었던 것이다. 연다메보는 방천보 하류 지역에 관개수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보조 시설로 축조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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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치 추정'''
| + | '''방천 주변 추청 보 위치도''' |
− | 방천지역의 설치된 보의 추정 위치는 관련 기록을 참조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파주위키가 추정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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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e:방천궁방전.JPG|700px]] | | [[File:방천궁방전.JPG|700px]] |
| + | * 방천지역의 설치된 보의 추정 위치는 관련 기록을 참조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추정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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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정보== | | ==관련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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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교하]] | | [[분류:교하]] |
| {{노출틀|공릉천 영친왕궁보 | 보,영친왕, 방천, 공릉천, 갈현, 벌판, 궁방전 |영친왕궁보}} | | {{노출틀|공릉천 영친왕궁보 | 보,영친왕, 방천, 공릉천, 갈현, 벌판, 궁방전 |영친왕궁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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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윤원, 교하 영천보와 박필훈, 최봉현에 대한 고찰, 2023년 발행 파주문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