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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장소==
 
==휴전협정 장소==
 
[[File:pk판문점위치.jpg|400px|섬네일|판문점 위치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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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휴전 회담은 1951.7.10일 개성 래봉장이라는 요정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 곳은 공산군 통제지역으로 중립지대 위반 사건이 다수 발생하면서 유엔군측이 이전을 제의하자  북한측이 널문리 주막마을로 이전 하는 것을 제안했다. 유엔군이 이전을 수락하여 1951.10.25일부터 널문리에서 협상을 재개 했다.<ref>한국민족백과사전 판문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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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문리 최초 회담장소는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에 걸쳐 있는 도로변이다. 주변에는 초가집 4채가 있었고 천막에서 휴전회담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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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정전 <ref> 정전이라는 용어는 1951년 당시부터 사용됐다. </ref>  회담은 1951.7.10일 개성 송악산 기슭의  래봉장 <ref>개성시 고려동 396번지에 위치하며 조선시대부터 요정으로 이용됐다  </ref> 이라는 요정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 지역은 공산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공산군 측은 승전이라는 장소로 이용했다.
휴전협상이 마무리되자 휴전협정 조인을 위해 200여평의 목조건물 신축하고 1953.7.27일 정식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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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후 군사정전위원회는 1953년 10월 제25차 본희의에서 군사정전위원회의 원만한 운영을 위해서 군사정전위원회 본부 구역에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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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 측은 래봉장이 남향의 건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북쪽에는 공산군 측이 자리하고 남쪽 입구에는 유엔군 측을 배치했다. 회담장 내부의 의자도 유엔군 측이 공산측보다 낮은 것으로 하고  회담장으로 이동할때 차량에  백기를 게양하도록 하는 등 대외적으로 유엔군 대표단을 항복사절단으로 보이게 하려는 전술을 폈다. <ref> 정전회담장 개성의 來鳳莊 1651.7.21 동아일보/  SPACE,판문점 시공의 정치학 김재한 한림대교수,https://vmspace.com/report/report_view.html?base_seq=MTg3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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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널문리의 옛 판문점을 "정전협정조인장'이라는 이름으로  견학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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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 대표단은 정전회담 장소가 공산측 지역에 위치하고 개성 주민과 마주치는 등 중립지대 규정을 위반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하자 회담장소 이전을 제안했다. 공산군 측은 개성 시가지를 경유하지 않는  당시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의 널문리를 제안하면서 1차 이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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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문리는 개성과 서울을 잇는 도로 주변으로 초가집 4채가 남아 있었고 정전회담은 마을 맞은편에 군용 천막을 설치해 1951.10.월부터 속개 됐다. 정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총·포격은 금지되고 구역 내에서 이동이 자유로운 '공동경비구역'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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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정전협정 시작된지 2년여이 지난 1953.6.9일부터 정전 협상이 마무리되자 협정 조인을 위해 200여평의 목조건물을 신축하고 1953.7.27일 정식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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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7. 22일 군사정전위원회 준비회의에서는 공산군 측이 협정조인하는 판문점 건물을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로 사용하자고 주장했지만 유엔군 측은 군정위 회의실을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 위에 새로 설치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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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정후 군사정전위원회는 1953년 10월 제25차 본희의에서 북한군 공병 중좌가 제시하고  미국 공병 중령이 동의한 선적리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하면서 현재 위치로 2차 이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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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널문리의 옛 판문점을 "평화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정전협정 조인시 유엔군 항의로 가려졌던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을 지붕으로 옮겨 놓았다.--paki 2024년 5월 5일 (일) 20:34 (KST)
    
==공동경비구역==
 
==공동경비구역==
 
[[File:410827판문점배치도.png|400px|섬네일|공동경비구역 배치도]]
 
[[File:410827판문점배치도.png|400px|섬네일|공동경비구역 배치도]]
군사정전위원회  합의에 따라 동서 800m, 남북 400m에 달하는 장방형의 공동경비구역이 만들어졌다. 이 지역은 널문리보다 1.5km정도 이남으로 포로교환 업무를 맡았던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교환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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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은 동서 800m, 남북 400m에 달하는 장방형으로 널문리보다 1.5km정도 남쪽에 위치하며 당시 포로교환 업무를 맡았던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교환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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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의 정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軍事停戰委員會板門店共同警備區域)', 영어로는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Joint Security Area - Pan Mun Jŏm'라고 한다. 이를 통상적으로는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또는 '판문점'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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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된 공동경비구역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언덕이, 남쪽으로는 평지가 자리한 지세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승전국이 산을 뒤로 등진 배산(背山)의 남쪽으로 향하고 패전국이 산을 앞으로 자리하는 임산(臨山)의 북향을 취한 결과가 됐다. 결국 새 판문점 위치는 북측에게 시계(視界) 및 사계(射界) 확보뿐 아니라 유리한 상징 효과를 갖는 위치가 됐다.  <ref>  SPACE,판문점 시공의 정치학 김재한 한림대교수,https://vmspace.com/report/report_view.html?base_seq=MTg3 </ref>
판문점이라 불리는 공동경비구역은 전체 부지가 15만평으로 그 중간은 군사분계선으로 나누어지며 24동의 건물이 분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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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의 정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軍事停戰委員會板門店共同警備區域)', 영어로는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Joint Security Area - Pan Mun Jŏm'라고 한다. 이를 통상적으로는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또는 '판문점'이라고 부른다. 판문점이라 불리는 공동경비구역은 전체 부지가 15만평으로 그 중간은 군사분계선으로 나누어지며 24동의 건물이 분산되어 있다.
    
이 구역 중심에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중립국감독위원회회의실 등 7개의 단층 건물이 동서로 늘어서 있다.
 
이 구역 중심에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중립국감독위원회회의실 등 7개의 단층 건물이 동서로 늘어서 있다.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자리잡은 '자유의 집'은 1965.9월에 준공된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1989.12월 준공한 3층의 석조 건물 '평화의 집'은 남북관계가 활성화 될 것을 기대하고 신축했다.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자리잡은 '자유의 집'은 1965.9월에 준공된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1989.12월 준공한 3층의 석조 건물 '평화의 집'은 남북관계가 활성화 될 것을 기대하고 신축했다.
    
휴전 초기에는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경비와 관리를 공동으로 운영했으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분리했다.
 
휴전 초기에는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경비와 관리를 공동으로 운영했으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분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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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및 자유왕래에 합의하고 JSA 감시초소 및 각종 화기가 상호 검증 아래 철수되면서 비무장화 조치가 완료됐다. 현재는 자유왕래를 위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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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및 자유왕래에 합의하고 JSA 감시초소 및 각종 화기가 상호 검증 아래 철수되면서 비무장화 조치가 완료됐다. 현재는 자유왕래를 위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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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시설==
 
==주변 시설==
 
공동경비구역 평화의 집 서쪽 사천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옛 '판문교'로 군사분계선이 중간 부분을 통과한다. 정전협정 조인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들이 교환되었고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하여 '돌아 오지 않는 다리'로 불렀다.
 
공동경비구역 평화의 집 서쪽 사천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옛 '판문교'로 군사분계선이 중간 부분을 통과한다. 정전협정 조인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들이 교환되었고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하여 '돌아 오지 않는 다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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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은 도끼만행 이후 이다리의 통행을 금지했고 북한은 통일각 부근 사천에 콘크리트 다리를 신설했다. 유엔군은 북한이 이 다리를 72시간 만에 완성하여 '72시간 다리'로 명명했다.
 
유엔군은 도끼만행 이후 이다리의 통행을 금지했고 북한은 통일각 부근 사천에 콘크리트 다리를 신설했다. 유엔군은 북한이 이 다리를 72시간 만에 완성하여 '72시간 다리'로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