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4 바이트 추가됨 ,  2024년 5월 12일 (일)
잔글
23번째 줄: 23번째 줄:  
===만장산 명칭===
 
===만장산 명칭===
 
[[File:gg두만리위치.jpg|400px|섬네일|두만리 위치도, 구글어스 갈무리]]
 
[[File:gg두만리위치.jpg|400px|섬네일|두만리 위치도, 구글어스 갈무리]]
만장산의 지명유래를  알 수 없지만 '만장산滿丈山'이라는 단어는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1618년 간행된 양대박의 '청계집'과 1890년 기정진의 '노사집'의 시가와 산문에 포함되어 있다.  
+
만장산의 지명유래를  알 수 없지만 '만장산滿丈山'이라는 명칭은 여러 문헌에 나타난다. 1618년 간행된 양대박의 '청계집'과 1890년 기정진의 '노사집'의 시가와 산문에도 포함되어 있다.  
    
청계집에 양대박은 "千丈層喦萬丈山。碧潭深處毒龍閑。何人更捻風前 笛。天際浮雲自往還。"라고 썼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 "천둥소리와 바람소리가 겹쳐 울리는 높은 산, 푸른 물이 고인 깊은 연못에는 독이 있는 용이 편안하게 누워 있다. 누가 다시 바람 앞에서 부는 소리를 낼까? 하늘의 끝을 떠다니는 구름은 스스로 오가며 변함없다."이다.
 
청계집에 양대박은 "千丈層喦萬丈山。碧潭深處毒龍閑。何人更捻風前 笛。天際浮雲自往還。"라고 썼다. 이 문장을 번역하면 "천둥소리와 바람소리가 겹쳐 울리는 높은 산, 푸른 물이 고인 깊은 연못에는 독이 있는 용이 편안하게 누워 있다. 누가 다시 바람 앞에서 부는 소리를 낼까? 하늘의 끝을 떠다니는 구름은 스스로 오가며 변함없다."이다.
33번째 줄: 33번째 줄:  
만장산이 웅장하게 보이는 것은 현재의 신산1리부터, 신산3리,  창만1리, 방축1리를 통과하는 조선시대 국도1호 구간이다 . 이 도로에서 만장산을 보면 도로변은 가파르지 않다가 4~ 5부 능선부터 정상까지는 산세가 높아지는 형세이어서 웅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만장산이 웅장하게 보이는 것은 현재의 신산1리부터, 신산3리,  창만1리, 방축1리를 통과하는 조선시대 국도1호 구간이다 . 이 도로에서 만장산을 보면 도로변은 가파르지 않다가 4~ 5부 능선부터 정상까지는 산세가 높아지는 형세이어서 웅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
이와함께 만장산 북쪽 끝자락에는 만장산의  "滿"자가 포함 두만리斗滿里 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좌의정과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황보인이 만장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
이와함께 만장산 북쪽 끝자락에는 만장산의  "만滿"자가 포함된 두만리斗滿里 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좌의정과 영의정부사 등을 역임한 황보인이 만장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
전설에서는 황보인이 태어난 마을이 후덕하고 풍요로운 동네라는 의미로 북두칠성의 '두斗'와 찰 '만滿'로 두만리로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
전설에서 황보인이 태어난 마을이 후덕하고 풍요로운 동네라는 의미로 북두칠성의 '두斗'와 찰 '만滿'로 두만리로 이름을 만들었다고 한다.
   −
만장산 명칭이 처음 지도에 나타난 것은 1842년이고 황보인이 1387년에 태어나 1453년 66세에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었다가  1746년 충신으로 복권된 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paki 2024년 5월 11일 (토) 15:38 (KST)
+
만장산 명칭이 처음 지도에 나타난 것은 1842년이다. 황보인은 1387년에 태어나 1453년 66세에 계유정난으로 피살되었다가  1746년 충신으로 복권된 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paki 2024년 5월 11일 (토) 15:38 (KST)
    
==관련 정보==
 
==관련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