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41 바이트 추가됨 ,  2025년 5월 26일 (월)
잔글
편집 요약 없음
5번째 줄: 5번째 줄:  
1361년 겨울,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분수원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1361년 겨울,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분수원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
이것이 분수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분수원은 관리들이 경유하는 원으로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했다.
+
이것이 분수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분수원은 일반 백성이나 관리들이 경유하는 원으로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했다.
   −
조선이 건국되자 분수원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교통 시설로 바뀌면서 의주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원의 역할을 했다.  
+
조선이 건국되자 분수원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교통 시설로 바뀌면서 의주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원의 역할을하면 숙박을 제공 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능행차를 할 때 잠시 머물던 특별한 장소가 되었고 영조와 고종이 인조의 장릉을 참배하러 갈 때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능행차를 할 때 잠시 머물던 특별한 장소가 되었고 영조와 고종이 인조의 장릉을 참배하러 갈 때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번째 줄: 20번째 줄:  
==위치==
 
==위치==
 
[[File:hrtege1625808.jpg|400px|섬네일|1980년대 이전의 분수재, 국가유산청]]
 
[[File:hrtege1625808.jpg|400px|섬네일|1980년대 이전의 분수재, 국가유산청]]
1763년 청송심씨 심정최가 경기감사에게 올린 글에 "분수원 옛터에서 뒤쪽으로 백보 가면 심지원의 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심지원의 묘는 2007년 이장하기 전까지 윤관장군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분수원(焚修院)이 현재 윤관장군 묘역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
1763년 청송심씨 심정최가 경기감사에게 올린 글에 "분수원 옛터에서 뒤쪽으로 백보 가면 심지원의 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심지원의 묘는 2007년 이장하기 전까지 윤관장군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
1895년 일본이 측량하여 1899년에 제판한 지도에는 분수원이라는 명칭과 함께 건물이 표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의 분수원(分水院,汾水院)은 현재 여충사와 충효관 뒤편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이를 통해 고려시대 분수원(焚修院)이 현재 윤관장군 묘역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2014년 여충사 뒤편 숲속에서 조선시대 건물의 초석과 장대석이 발견되고  2021년에는 윤관장군 묘역에서 조선후기에 제작된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
 
 +
1895년 일본이 측량하여 1899년에 제판한 지도에는 분수원이라는 명칭과 함께 건물이 표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의 분수원(分水院,汾水院)은 현재 여충사와 충효관 뒤편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
 
 +
2014년 여충사 뒤편 숲속에서 조선시대 건물의 초석과 장대석이 발견되고  2021년에는 윤관장군 묘역에서 조선후기에 제작된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기능과 역할 ==
 
==기능과 역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