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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시대 9대 간선로 중 가장 중요한 의주로는 총 연장 약 1,080리(432km)의 교통 통신로였다. 고구려 시대부터 역원제(驛院制)가 국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실시된 고려 시대에 그 기반이 갖추어졌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중종대에 역원제가 정비되면서 그 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 | 조선 시대 9대 간선로 중 가장 중요한 의주로는 총 연장 약 1,080리(432km)의 교통 통신로였다. 고구려 시대부터 역원제(驛院制)가 국지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실시된 고려 시대에 그 기반이 갖추어졌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중종대에 역원제가 정비되면서 그 모습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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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의주로(義州路)는 현재 서울역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조선 제1대로로 다른 이름으로 관서로 혹은 서북로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요동으로 이어진다는 점, 중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점 때문에 조선에서는 의주로를 사행로, 연행로라고 부르기도 했다. | + | 의주로(義州路)는 현재 서울역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조선 제1대로로 다른 이름으로 관서로 혹은 서북로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요동으로 이어진다는 점, 중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점 때문에 조선에서는 의주로를 사행로, 연행로라고 부르기도 했다.--paki 2025년 8월 21일 (목) 22:45 (K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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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할== | |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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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4년(고종 1)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파주구간이 혜음령을 시작으로 파주목 관아와 임진도를 거쳐 개성으로 가는 구간을 표시됐다. | | 1864년(고종 1)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파주구간이 혜음령을 시작으로 파주목 관아와 임진도를 거쳐 개성으로 가는 구간을 표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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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신 또는 권원은 대부분 한양에서 병전거리를 지나 고양 벽제관에 숙박하고 다음날은 파주목 관아의 봉성당에서 숙박하고 개성으로 출발한다, 광탄 용미리 혜음령에서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판문저)까지의 파주 구간은 38km 거리로 의주로 전체 구간에 1/11 장도이다. | + | 사신 또는 관원은 대부분 한양에서 병전거리를 지나 고양 벽제관에 숙박한다. 다음날은 파주목 관아의 봉성당에서 숙박하고 개성으로 출발한다. 광탄 용미리 혜음령에서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판문저)까지의 파주 구간은 38km 정도 거리로 의주로 전체 구간에 1/11 정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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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 경과지 목록''' | | '''주요 경과지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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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현발소(調絃撥所) -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초현장마을 | | * 조현발소(調絃撥所) -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초현장마을 |
| | * 판적천교(板積川橋) -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판문점) | | * 판적천교(板積川橋) -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판문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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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 경과지 소개== | | ==주요 경과지 소개== |
| | === 혜음령(惠陰嶺) === | | === 혜음령(惠陰嶺) === |
| − | 파주구간은 혜음령부터 시작된다. 이 고개는 주변에서 가장 큰 고개이다. 해발고도는 164m에 불과하지만 주변이 낮아 가파른 고개길로 유명하다. | + | 파주구간은 [[혜음령|혜음령]]부터 시작된다. 이 고개는 주변에서 가장 큰 고개이다. 해발고도는 164m에 불과하지만 주변이 낮아 가파른 고개길로 유명하다. |
| | 혜음령을 오르기전 고양동에 벽제관이 있으며 중국 사신이 입경하기 전 날 이곳에서 항시 하룻밤을 묵었다. 예로부터 고개 위에 그늘이 져서 쉬기에 적합하므로 "그늘의 은혜를 입는다" 하여 혜음이라 이름 지어졌다. 과거에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가다가 산 아래 고양 벽제관에 이르기 전 고단한 몸을 잠시 쉬어 가는 고개라 해서 '쉬엄령 고개'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 | 혜음령을 오르기전 고양동에 벽제관이 있으며 중국 사신이 입경하기 전 날 이곳에서 항시 하룻밤을 묵었다. 예로부터 고개 위에 그늘이 져서 쉬기에 적합하므로 "그늘의 은혜를 입는다" 하여 혜음이라 이름 지어졌다. 과거에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가다가 산 아래 고양 벽제관에 이르기 전 고단한 몸을 잠시 쉬어 가는 고개라 해서 '쉬엄령 고개'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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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세류점(細柳店) === | | === 세류점(細柳店) === |
| | 혜음령 너머 용미3리는 세류동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잔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역참인 세류점이다. 이 마을에는 병자호란 때 호병들이 이곳에서 후퇴하였다 하여 '호주골'이라고도 불렸고, 호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여 '죽골'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 | 혜음령 너머 용미3리는 세류동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잔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역참인 세류점이다. 이 마을에는 병자호란 때 호병들이 이곳에서 후퇴하였다 하여 '호주골'이라고도 불렸고, 호병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여 '죽골'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
| | === 쌍불현(雙佛峴) === | | === 쌍불현(雙佛峴) === |
| − |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국보 제93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는 곳이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7.4m, 얼굴 크기는 2.4m 정도이다. | + |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위치한 국보 제93호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는 곳이다.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7.4m, 얼굴 크기는 2.4m 정도이다. |
| | 고려 13대 왕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선종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그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 고려 13대 왕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를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를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매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선종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다. 그러자 그해에 왕자 한산후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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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분수원(焚修院) === | | === 분수원(焚修院) === |
| − |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위치한 원 시설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원 시설이다. 의주대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장소였다. 분수원마을은 현재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 + |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원 시설이다. [[분수원|분수원]]은 의주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장소였다. 분수원 마을은 현재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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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점(新店) === | | === 신점(新店) === |
| | 광탄면 시가지 삼거리에서 용주골 방면으로 1km 정도 가면 미군이 비행장으로 이용했던 캠프스탠턴이 있다. 이 마을은 행정명으로 신산3리이고 자연부락명칭으로는 새술막, 신탄막이라고 불렸다. | | 광탄면 시가지 삼거리에서 용주골 방면으로 1km 정도 가면 미군이 비행장으로 이용했던 캠프스탠턴이 있다. 이 마을은 행정명으로 신산3리이고 자연부락명칭으로는 새술막, 신탄막이라고 불렸다. |
| | 새술막은 의주로를 이용하는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이 새로 만들어져서 붙은 이름이다. 신탄막은 임진왜란때 선조가 피난가면서 만들어진 명칭으로 알려졌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던 중 비가 심하게 내려 어가 행렬이 멈춰 섰다. 저녁 준비를 위해 장작에 불을 지피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이때 주막에서 참나무 숯을 가져와 불을 지폈고 옷을 말릴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선조가 "이 숯은 처음 보는 숯이군"이라고 말했다. 이후 이곳을 '신탄막'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 | 새술막은 의주로를 이용하는 여행객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주막이 새로 만들어져서 붙은 이름이다. 신탄막은 임진왜란때 선조가 피난가면서 만들어진 명칭으로 알려졌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가던 중 비가 심하게 내려 어가 행렬이 멈춰 섰다. 저녁 준비를 위해 장작에 불을 지피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이때 주막에서 참나무 숯을 가져와 불을 지폈고 옷을 말릴 수 있었다. 이를 지켜본 선조가 "이 숯은 처음 보는 숯이군"이라고 말했다. 이후 이곳을 '신탄막'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
| | === 광탄천(廣灘川) === | | === 광탄천(廣灘川) === |
| − | 양주군 백석면과 광적면 양쪽에서 흘러 내린 물이 문산천으로 합류하여 넓은 여울을 형성하는 데서 광탄이라 칭하였다.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두만마을과 방죽리 검단마을 사이에 흐르는 내로, 의주로가 이 하천을 건너는 지점이었다. | + | 양주군 백석면과 광적면 양쪽에서 흘러 내린 물이 문산천으로 합류하여 넓은 여울을 형성하는 데서 광탄이라 칭하였다. 이 곳은 광탄면 신산리 두만마을과 방죽리 검정마을 사이에 흐르고 의주로가 이 하천을 건너는 지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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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파주(坡州) === | | === 파주(坡州) === |
| − | 파주구읍,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에 위치한 파주목의 중심지였다. 1459년 세조에 의해 목으로 승격되면서 파주라는 지명이 제정되었다. 파주라는 지명은 파주의 옛 지명 파해평사의 파와 고을이라는 뜻의 주자를 합하여 이루어졌다.
| + | 파주시 파주읍 파주리에 위치한 파주목의 중심지였고 고려시대에는 [[마산역|마산역]]이 있었다. 1459년 세조에 의해 목으로 승격되면서 [[파주목|파주]]라는 지명이 제정되었다. 파주라는 지명은 파주의 옛 지명 파해평사의 파와 고을이라는 뜻의 주자를 합하여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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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천(梨川) === | | === 이천(梨川) === |
| |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와 선유리를 흐르는 내이다. 의주로가 파주읍에서 임진강으로 향하는 구간에서 건너는 하천이었다. | | 파주시 문산읍 이천리와 선유리를 흐르는 내이다. 의주로가 파주읍에서 임진강으로 향하는 구간에서 건너는 하천이었다. |
| | === 임진도(臨津渡) === | | === 임진도(臨津渡) === |
| − | 임진강을 건너는 나루터로서 의주로의 핵심 지점 중 하나였다. 개경과 남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 + | 임진강을 건너는 나루터로서 보통은 임진나루라고 불리고 개경과 남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
| | + | *[[임진강_나루터| 임진강 나루터 목록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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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파역(東坡驛) === | | === 동파역(東坡驛) === |
| | 고려시대 임진현에 위치한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동파역으로 불렸다. 청교역과 마산역 사이에 있었다. 통파역의 위치는 개경으로부터 남방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임진나루길'의 핵심적 지점에 위치하였다. 개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청교역의 바로 다음 역이며, 남쪽으로는 바로 임진강의 임진나루와 접해 있는 지점에 해당하였다. | | 고려시대 임진현에 위치한 역이다. 조선시대에는 동파역으로 불렸다. 청교역과 마산역 사이에 있었다. 통파역의 위치는 개경으로부터 남방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임진나루길'의 핵심적 지점에 위치하였다. 개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청교역의 바로 다음 역이며, 남쪽으로는 바로 임진강의 임진나루와 접해 있는 지점에 해당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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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주시 진서면 유현마을에 위치한 고개이다. 동파역에서 장단으로 가는 구간에 있는 작은 고개로, 버드나무가 많아서 유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파주시 진서면 유현마을에 위치한 고개이다. 동파역에서 장단으로 가는 구간에 있는 작은 고개로, 버드나무가 많아서 유현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 === 장단(長湍) === | | === 장단(長湍) === |
| − |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에 위치했던 장단현의 중심지이다. 임진강과 인접한 지역으로 의주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현재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속해 있다. | + | 파주시 군내면 읍내리에 위치했던 장단현의 중심지이다. 임진강과 인접한 지역으로 의주로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고구려가 장천성현(長淺城縣)을 설치하였다가 신라가 병합하고 [[장단|장단]]현으로 됐다. |
| | === 오목리(吾木里) === | | === 오목리(吾木里) === |
| | 파주시 군내면 오목마을에 위치한다. 장단에서 조현발소로 가는 구간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오목리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 | | 파주시 군내면 오목마을에 위치한다. 장단에서 조현발소로 가는 구간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오목리라는 이름이 붙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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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판적천교(板積川橋) === | | === 판적천교(板積川橋) === |
| | 의주로 파주구간의 마지막 지점으로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에 위치한다. 현재의 판문점 지역에 해당한다. 판적천을 건너는 다리였으며, 이곳을 지나면 개성으로 향하게 된다. | | 의주로 파주구간의 마지막 지점으로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에 위치한다. 현재의 판문점 지역에 해당한다. 판적천을 건너는 다리였으며, 이곳을 지나면 개성으로 향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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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주요 경과지 추정도== |
| | + | 1864년 발간된 대동지지의 노선을 근간으로 현재 구글 지도에 표시한 추정 위치이다. 추정 표시된 위치는 대략적으로 표시되었으며 특정 시기별로 의주로 경로를 달라 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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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File:pk-wijuro-ext.jpg|800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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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위 지도는 데스크랍 PC로 구글어스에서 [https://earth.google.com/earth/d/1C9FOcF-2yhdzWFB9g3FaAN_AiAUT_wbY?usp=sharing 의주로 파주 구간]의 경로를 볼 수 있다. 구글어스는 한국 정책상 모바일에서는 서비스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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