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철교

서울~신의주 경의선 구간 중 임진강을 횡단하는 상하행 철교이다.

임진강철교

개요

임진강 철교는 경의선 구간 중 문산읍 마정리와 장단면 노상리를 연결하는 임진강 횡단 복선 철교이다.

철교 설치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서울-의주간 군용철도 개설을 강행했다.전체 구간 중 용산~개성 구간은 1904.3.12일부터 공사를 시작됐고 임진강 철교는 1905.2.15일에 완공됐다.단선 철교로 완공됐던 임진강 철교는 1938년부터 시작된 경의선 복선공사때 복선으로 만들어졌다.[1]

철교 규모

임진강 철교중 상행선 구간은 연장 701.84m의 강철 교량으로서 경간 60.6m의 트러스형 8개와 그 보다 짧은 규모의 18.3m의 판형 10개로 구성됐다. [2]

철교 폭파

폭파된 임진강 철교와 임시 작전교량

한국전쟁 당시 임진강 철교는 서울과 개성을 가장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서부전선의 주요 작전교량이다. 따라서 피아간 전투상황에 따라 철교의 거부조치는 작전상 필요한 상황이다.

임진강 철교의 폭파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인천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폭파했다는 것과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연합군이 폭파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국군도 6.25 당일 급작스런 북한군의 38선 공격으로 육군 1사단이 긴급히 후퇴작전을 진행하면서 철교 폭발을 시도했다.

1950.6. 25일 정오즘 한국군 제1사단 소속 공병대장 장치은 소령은 철교 폭파 준비를 마치고 개성 소속의 12연대 주력부대의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력부대가 선두부터 임진강 철교로 진입했지만 후미에 적군이 따라오고 있다는 보고로 오후4시경에 폭파 명령이 하달됐다

공병대가 명령대로 폭파를 시도했지만 도화선 문제로 철교 폭파는 실패하고 적군과 교전이 시작됐다. 이 당시 북한군 주력 전차부대는 임진강 철교가 폭파될 것으로 판단하여 고랑포를 도하하여 파평산~문산으로 침공해 왔다.[3]

임진강 철교를 폭파 시킨 것은 인민군이라는 설은 북한에서 한국으로 망명한 김태산이 자유아시아 방송과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1950.10월경 인천상륙 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임진강 철교를 폭파한것으로 김태산이 주장했다. [4] 그렇지만 1950.12.31일까지 경의선 기차가 운행됐다는 기록이 있어 신뢰성이 부족하다.

현재 임진각에 전시되어 있는 증기기관차 화통((증기기관차 앞부분)은 장단역에서 피폭되어 철로에 이탈하여 남아 있던 것을 임진각에 옮겨 놓은 것이다.

이 증기기관차는 중공군 참전으로 평양에 있는 연합군의 군수물자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동중에 상황이 돌변하여 서울로 회차하는 중에 있었다. 장단역에 잠시 정차했던 기차는 1950.12.31일 22:00시쯤 후퇴하던 연합군이 기차 화통에 1천 여발의 총탄을 사격해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무용지물이 된 기차 화통을 인민군이 폭파하여 철로 밖으로 이탈시키고 나머지 화차 25량은 견인해 갔다.[5]

장단역 증기기관차를 연합군이 거부한 상황을 유추해 보면 장단역과 4km 남단의 임진강 철교가 점령될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연합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

가설 교량 설치

1950.10.19일 중공군 개입으로 전황이 바뀌면서 연합군은 서울에서 철수했다가 반격을 통해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했다.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미군은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임진강에 11개의 작전교량을 설치했다. 작전 교량중 파주 지역에는 리비교 등 6개의 교량이 설치됐다.

폭파된 임진강 철교 상하행선 가운데에는 '자유의 다리'라고 불리는 작전교량이 임시로 설치됐다. 이 작전교량은 임진강 철교 상행선 복구중인 1952년도3월10일에도 군트럭이 임시 교량을 통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마가 끝난 1951년 하반기부터 이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강 철교가 1952년 6월 25일 복구되면서 임시 작전교량은 점차 이용이 줄어 들었고 1952년 7월 홍수에 상류에 설치되었던 리비교(당시 X-ray bridge )와 함께 홍수로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철교의 복구

준공식

임진강 철교중 상행선은 동쪽의 하행선보다 피해가 덜했다. 상행선 구간은 연장 701.84m의 강철 교량으로 트러스 8개중 3개가 폭파되고 5개가 파손되었으며 판형은 1개가 추락됐다.

1951년 7월10일 개성 개봉장에 정전협상이 개시되고 같은해 12월 8일에는 쌍방이 포로명단을 교환 하면서 군수물자 수송과 포로교환이 필요했다. 미군 당국과 남한의 교통부가 합동으로 1952년 3월 1일부터 임진강 철교를 복구하기 시작해 6월25일까지 117일간 공사 끝에 복구를 완료하고 1952.7.17일 개통식을 가졌다.

이 공사는 트러스 1개를 신규로 가설하고 트러스 2개를 수리하는 것으로 미군 제84공병대대가 하부구조와 아이빔 2개를 설치하는 공사를 맡았다. 이 복구 공사에는 공사비 948,148,489환, 노력비 332,550,500환, UN군공급 재료비 427,589,639환, 교통부부담 재료비 427,589,639환이 소요되었으며 연인원 33,707명이 참여했다. 교량 복구에 따른 재료비는 아마 UN군과 한국이 50:50으로 부담한 것으로 추정된다.[6]

도로 이용

1952년에 복구된 상행선 철교는 휴전후에 물자와 인력 수송을 위한 도로로 이용됐다. 철교 는 도보 이동은 불가하고 오로지 차량으로만 이동이 가능했으며 자유의 다리 남단에서 검문 절차를 거치고 통과할 수 있다.

1차선으로 복구된 철교 도로는 차량의 교행이 불가하여 북문과 남문 검문소에서 차량이 대기 했다가 교대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1998년 임진강 상류 1km 지역에 통일대교가 설치되면서 2002년에 남북철도 연결을 위한 철로로 복원됐다.

스카이 워크 설치

경기도는 2016.12.21일 임진강 철교 하행선 교각 위에 '내일의 기적소리'라는 스카이워크를 설치했다. 길이 105m, 폭5m로 복원된 구간에는 장단역에서 폭파된 증기기관차 화통과 전망대 등을 설치했다. --pi 20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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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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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1. 사단법인 철우회, 손실길의 철길따라,http://www.srkr.or.kr/bbs/sub6_1/65037
  2. 철도산업정보센터 교량변천사(3), 구조 및 규모 (단순 리벳 강복사재트러스 60.6m, 3 경간 연속 리벳강 평행형복 사재트러스 3@62.6 (187.60)m=2 연, 단순 리벳 강 복사재 트러스 60.6m=1 연, 단순 리벳 강판형 18.3m=10 연, 총연장 701.84m),http://www.kric.go.kr/jsp/railplaza/rhp/fieldsHistoryDetail.jsp?p_id1=M02040201&p_id2=1&q_name=all2
  3. 유용원의 군사세계 개성~문산지구전투, 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8&pn=1&num=3676
  4. 자유아시아방송 2017.9.8.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back_to_days/fe-ms-09082017094257.html
  5.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소식지 2019.2.1.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73541&bbsId=BBSMSTR_1008&pageUnit=0&search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
  6. 한국철도건설백년사, 2005년발행, 한국철도시설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