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래 시장 또는 전통시장으로 불리며 물품의 교환 또는 판매를 위해 형성된 시장이다.
시장 역사
장터 형성
재래시장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으며, 고려시대에는 '시전'이라는 관영상업시설이 등장했고. 조선시대에는 5일장 형태의 정기시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파주는 조선 후기 수리 시설과 농경지개간이 이루어지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과 인구가 증가 되면서 새로운 촌락을 형성해했다. 교하(현재 금촌)에는 신화리가 신설되었으며, 서패리가 동서로 분동되는 등 5개의 동·리가 추가되어 생활권이 확대됐다.
파주 지역 시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로, 이후 19세기 들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830년), 『동여도지(東輿圖志)』(1834년경), 『여도서(輿圖書)』 (1850년경)에 등재되었으며, 각 군현의 『읍지(邑誌)』에서 지역별 시장 현황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나는 18·19세기 파주 지역 시장의 개시 현황을 보면 『동국문헌비고』 시기에는 봉일천장, 이천장, 광탄장, 장파장, 부내장, 사천장, 고랑포장, 월롱장, 두일장, 임암장 등 총 10개 시장이 개장됐다.
『임원경제지』 시기에는봉일천장, 문산포장, 눌노장, 원기장, 신화리장, 삼군장, 부내장, 사천장, 사미천장, 구화장, 고랑포장, 도정장, 두일장, 오목천장, 임암장 등 총15개 시장이 개장했다.
입지와 분포
파주의 시장는 입지형태에 따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그 첫째는 수운을 활용한 입지이며, 둘째는 육상 교통을 이용한 시장, 셋째는 관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읍치, 농촌 부근에 입지한 형태이다.
파주는 대량 운송수단인 선운(船運)이 가능했던 지역이었으며 경기만에 인접해 있어 조소 차이에 의한 선박 출입이 용이하여 많은 포구가 형성되었다. 18세기 이후 선박을 통한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입거가 좋은 곳을 중심으로 포구는 상업이용을 취하는 물류의 거점으로 변화했다.
거래물품
파주 지역 시장의 거래 물품은 『임원경제지』를 통해 알 수 있다. 파주의 봉일천장에서는 미곡, 면포, 마포, 어염, 소(牛), 용기, 사기, 유기(범루고리), 비단 등이 거래됐다.
교하의 신화리장에서는 미곡, 면포, 과일, 어염, 연초 등이 거래되었다. 또한 장단의 부내장에서는 미곡, 면포, 소(牛), 용기 등이 거래되었고, 적성의 두일장에서는 미곡, 면포, 마포, 과일(배, 밤, 감 등), 어염, 소, 연초 등이 유통되었다.
개항 이후 시장 활동
개항 이후에도 파주 지역에서는 활발한 시장 활동이 이어졌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파주 지역 시장의 현황을 알 수 있는 자료로는 1888년 일본에 의해 간행된 『조선지략(朝鮮地略)』과 19세기 말 편찬된 각 군현의 『읍지』, 『동국문헌비고』를 개정한 1908년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이 있다.
파주 지역에서 19세기 중엽 개시했던 시장는 모두 16기 정도로 파악되는데 개항 이후에도 여전히 16기의 시장이 개설되었으나, 그 내용상으로는 장단의 도정장, 교하의 삼군장이 소멸되고, 적성의 신장, 장단의 판문장이 신설되었다.
파주에는 1906년 서울과 의주를 잇는 경의선 철도가 부설되었고, 이로 인해 서울 및 인근 지역과 더욱 활발한 물류이동이 이루어졌다.
시장 특징
파주는 한강, 임진강과 같은 대형 하천과 의주로를 접하고 있는 지리적 입지, 그리고 도성의 위수 지역이라는 환경적인 요소가 합쳐져 상업이 발달했고 이는 시장의 개설로 이어졌다. 또한 파주는 서해안과 관서 지역의 산물이 서로 운반되는 길목이었고, 서전의 금난전권이 적용되는 범위에서 벗어났다.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 도성의 상공도구와 연계하며 상업이 확대될 수 있었다.
파주에는 한강, 임진강 이외에 공릉천, 문산천, 사미천 등이 운행이 가능한 하천에 위치해 선운을 통한 물류 유통이 가능했다. 이들 하천을 기반으로 봉일천장, 신화리장, 사미천장, 문산포장 등의 시장가 개설될 수 있었다. 파주 지역 시장는 대부분 한강, 임진강이나 의주대로 주변에 입지해 있었다. 또한 왕의 장은 행차로 관부의 간섭이 심한 능침 주위에 시장가 개설되었다.
이러한 여건으로 파주 지역의 시장는 지역 내 상품 유통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관서지역과 서해안의 산물을 도성으로 연결시켜 주는 중계지 역할도 담당하며 발전했다.
수운과 경의선 철도를 이용해 개항 이후에도 파주 지역의 시장에서는 여전히 상업이 성행했다. 따라서 파주 지역의 시장은 안성장 등과 더불어 도성 및 경기 지역의 물류 유통에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역별 시장
신화리장
조선시대 교하군 석관면의 삽교장(鍾橋場)과 함께 교하군 동7리 아동면에 소재한 신화리장은 현재 공릉천 변의 새꽃마을로 1830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처음 등장한다.
성시를 이루었던 신화리장은 1872년 작성된「교하군지도(交河郡地圖」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순조 당시인 19세기 말까지 상업 활동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쇠곳나루(金串津)보다 상류에 금성진 포구가 있어 상선이 정박하였지만 매년 홍수로 하상이 높아지면서 새꽃마을 부근의 포구로 이전 됐다.
금촌통일시장
금촌의 시장은 1906년 4월 3일 경의선 개통과 함께 금촌역(金村釋) 인근에 새로 개설된 시장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공설 정기시장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휴전이 되고 봉일천에 있던 가축시장이 금촌으로 옮겨와 금촌시장은 이때부터 가축시장 병설의 정기시장이 되었다.
금촌시장은 1,6일장으로 노점상이 모여들면서 개장시부터 금촌 지역뿐만 아니라 교하,탄현,월롱,조리 등 인근 지역에서도 이용했다.
금촌 시장에는 금촌전통시장과 명동로시장, 문화로시장으로 나누어 운영되다가 2015년 중소기업형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육성하기 위해 '금촌통일시장'으로 통합됐다.
문산자유시장
광탄경매시장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현재 육군 제1사단본부와 캠프스텐턴에 주둔하면서 1956년부터 광탄면 신산리 226번지 일원에 상설시장이 조성됐다. 2016년 전국 최초로 전통시장을 경매장터로 운영하면서 광탄경매시장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기존 광탄시장은 5,10일장으로 운영되었으나 신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오일장이 신시가지로 이전 되었다. 그 후 기존 광탄시장 구역에 3,8일장 별도로 신설되면서 2개의 장날이 운영되었다가 5,10일장은 폐쇄됐다.--paki 2025년 4월 11일 (금) 16:16 (KST)
적성전통시장
봉일천전통시장
관련 정보
링크 모음
가볼만한곳
더보기
자료 출처
- 파주연구10호, 2016발행, 금촌지역 시장의 어제와 오늘, 권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