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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4.11일 19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2012.4.3일에는 이인재 파주시장과 박원순 서울 시장이 일반묘역을 납골당이나 수목장으로 전환하고 잔여지 75%는 학교와 병원, 연구소 등의 시설을 유치하기로 합의했다고 언론에서 발표했다. | 2012.4.11일 19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2012.4.3일에는 이인재 파주시장과 박원순 서울 시장이 일반묘역을 납골당이나 수목장으로 전환하고 잔여지 75%는 학교와 병원, 연구소 등의 시설을 유치하기로 합의했다고 언론에서 발표했다. | ||
− | 2012.4월 합의문 발표하기 이전 2011.12.15일에는 윤후덕 국회의원 예비후보가 서울시를 방문하여 김상범 행정부시장과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문제를 논의했다. 윤후덕 예비후보는 묘지구역을 정비하고 서울시의 교육시설 등을 이전해 달라는 | + | 2012.4월 합의문 발표하기 이전 2011.12.15일에는 윤후덕 국회의원 예비후보가 서울시를 방문하여 김상범 행정부시장과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문제를 논의했다. 윤후덕 예비후보는 묘지구역을 정비하고 서울시의 교육시설 등을 이전해 달라는 [[용미리_시립묘지/윤후덕의견서|의견서]]를 전달했다. |
− | 서울시와 합의후 일반묘역을 축소하는 '시립묘지의 생산적 활용을 위한 개발계획' 용역을 발주하고 관련 전문가가 참여하는 실무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지만 2022년 현재까지 결과는 아직 없다. | + | 서울시와 합의후 일반묘역을 축소하는 '시립묘지의 생산적 활용을 위한 개발계획' 용역을 발주하고 관련 전문가가 참여하는 실무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지만 2022년 현재까지 결과는 아직 없다. |
==관련 정보== | ==관련 정보== |
2022년 6월 27일 (월) 15:53 판
1963년 서울 망우리와 남양주 내곡리의 서울시립묘지가 만장이 되자 광탄과 조리 경계의 명봉산 동편 용미리에 서울시립 공동묘지를 처음 조성했다.
개요
조선시대에는 한양도성 10리 이내까지는 무덤을 사용할 수 없어 도성과 주변의 백성들은 대부분 서울 진관동 이말산 묘지를 이용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미아리 등 경성부 19곳에 공동묘지로 지정했고 외곽으로 공동묘지를 계속 확대해 나갔다.
시립묘지 파주이전
서울시는 미아리 공동묘지가 만장에 이르자 1933. 5.27일 당시 양주군 망우리 임야 70만평을 공동묘지로 추가했다.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공동묘지가 포화 상태에 이르자 1963.11.1일 광탄면 용미리 산107번지 일원 283만제곱미터 부지를 서울시립 용미리 제1묘지로 개설했다.
이 당시 서울특별시장은 윤태일 육군 제36보병사단장으로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다가 예편하고 시장으로 취임했던 시절이다. 서울시립묘지로 지정된 곳은 광탄면 용미와 조리면 장곡리를 통과하는 도로변 남측으로 243m의 높이의 명성산 계곡이 중심지이다. 부지는 국유지로 31천여 기의 묘지 설치가 가능했다.
서울시립 제1묘지는 35년만인 1998.8월에 만장되었고 2007.5월 일부 구역을 자연장지로 조성했다. 2017.8월에는 진입로 옹벽에 민들레의 일생을 그린 조형벽을 만들기도 했다.
망우리 조성된 서울시립묘지에 28천여기가 만장 되자 1973.12.26일 혜음령 고개 인근 용미4리 지역에 107만제곱미터 부지의 서울시립 용미리 제2묘지를 만들었다.
서울시는 부족한 묘지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군부대가 훈련장으로 사용하던 제2묘지와 인접한 용미리 산6-1부지 28만여제곱미타(85천여평)을 반환 받았다. 1997.4월 지목변경 및 환경영향평가 등 묘지 조성과 관련된 절차를 밟고 사업비 99억원을 투입해 1999년말 시립묘지 조성을 완료했다.
부지 확대로 용미리 제2묘지는 전체 1,37만제곱미터 묘지 6,951기를 확보했지만 1998년 이후 신규매장을 중단했다. 다만 예약된 묘지이거나 부부 합장의 경우 허용했다.
묘역 만장과 납골당 운영
1990년대 부터는 유교사상으로 지속되던 매장문화도 점차 화장 방식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98.8월초 북부지역 집중호우로 용미리와 벽제동 시립묘지 4천기 정도 유실되고 최종현 SK회장이 화장을 유언으로 남겼다.
서울시는 매장 방식의 문화를 화장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당시 고건 서울시장은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을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로 1998년 말부터 서울 시립승화원(벽제화장장)을 찾는 시민들이 급격히 증가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따라 서울시는 용미리 1묘지 구역에 묘지형태의 본묘형 7,650위, 벽식형 5,348위, 왕릉·벽식 통합형 26,934위 전체36,932위를 신설했다.
2000.4.9일에는 용미리 2묘지에 36,945위를 모실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인 '제2추모의집'을 준공했다. 이 납골당은 지하2층, 지상3층 연건평 3천여제곱미터 규모로 유리납골함과 부부형 납골함도 설치 했다.
납골당 이외에도 용미리 1묘지에 잔디와 수목장지 43천여 위와 화장된 고인의 유회를 뿌리는 추모의 숲 1.1만제곱미터를 조성했다.
주변지역의 변화
1963년부터 최근까지 390만제곱미터 규모의 서울시립묘지가 용미리에 들어 서면서 주변지역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 났다.용미리 시립 1,2묘지의 부지는 2004년에 준공된 LG디스플레이 산업단지 165만제곱미터(50만평)의 2.4배 정도 넓고 용미1·2· 3·4리 전체 면적 1,234만제곱미터(373만평)에서 1/3 정도를 차지 한다.
용미리는 1973년말 전체 292가구에 1천5백명 정도가 거주하고 4개리로 나누어진 전통적인 농촌형 마을이다. 서울시립묘지가 개설되면서 용미리는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됐다. 묘지 조성 단계부터 작업인부로 참여했고 장례때 석축 및 봉분 조성 작업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묘지 인근에는 분묘 조성에 필요한 비석과 상석 등을 제작하는 석재업체, 장지 부근의 상주를 위한 식당, 명절 시기의 성묘객을 대상으로 조화 판매 등의 사업이 시작됐다. 장례가 끝나고 매년 벌초, 뗏밥 보충, 제초제 살포 등의 작업을 대행해 주는 사업도 번창했다.
매장 작업시 보통 봉분을 설치하려면 3~4명의 인부가 1개 조로 운영된다. 묘지관리는 1년 2회 정도 제초와 잔디 보강 작업을 대행했다. 묘지관리 대행료는 6평형 봉분규모 기준 1980년대에는 3만원, 2010년대에는 2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고 당시 최고 2천기의 묘지를 1개 조가 관리하기도 했다.
묘지가 점차 늘어 나면서 묘지와 관련한 봉분 조성과 연중 묘지 관리는 지역의 이해 관계로 발전해 주민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1980년대에 상주에게 봉분과 석축을 의뢰하는 과정에서 암묵적인 관할 구역을 지키지 않아 깡패를 동원하거나 경찰권력을 이용한 경우도 있었다.
서울시는 묘지의 행정 관리를 위해 용미1리 장곡리 부근 400구역, 용미2리 300구역, 용미3리 200구역, 용미4리 100구역으로 정해서 운영했다. 용미리 주민들은 묘지 공사 및 관리와 관련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구역별로 비공식 조합을 구성해 운영했다.
서울시립 묘지가 용미리에 생기면서 설날과 추석, 한식 등의 명절 전후에 밀려 오는 성묘객으로 광탄 지역은 매년 홍역을 치루는 것이 일상이었다. 2010년대만 해도 하루 평균 1만2,000여대가 다니는 이 도로는 추석, 설 등 성묘철만 되면 4만6,000여대가 몰려 극심한 정체를 빚는 곳이다.
성묘에 따른 교통 정체를 해소하기 위해 서울시는 명절기간 1주전부터 버스를 증차하고 고양리 버스 노선을 광탄 시가지로 우회하여 통일로로 회차 시키는 방법도 이용했다. 이와함께 승용차를 이용한 성묘객의 차량통제를 위해 서울시설관리 공단 직원을 묘지별로 배치했다.
사설묘지 급증
서울시립묘지가 용미리에 개설되면서 파주 지역에는 사설 종교묘지가 급증했다. 1964년부터 광탄면 광탄추모공원· 나사렛공원· 바다의 별, 탄현면 천주교 평화묘원, 조리읍 최자실금식원 등 전체 12개소 88만제곱미터 부지에 3만여 기의 묘가 조성됐다.
이외에도 1970년대에는 금촌 낙원공원묘지, 탄현 기독교상조회, 월롱 해방교회, 광탄 화교화원 등 5개소에 117만제곱미터 부지에 5만3천기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묘역이 조성됐다.
경기도가 2019년에 발행한 경기도 장사시설 지역수급계획에 따르면 경기도에 공설·공동묘지·법인 묘지의 전체 부지가 2,500만제곱미터이고 파주는 220만제곱미터로 8.8% 차지한다, 이는 서울시립묘지 397만제곱미터가 제외되어 있어 파주지역 전체는 전체 617만제곱미터에 이른다.
시립묘지 갈등
파주가 묘지 시군이라는 오명을 갖게 된 것은 서울시립묘지의 영향이 가장 크다. 광탄이 고양시와 근접하면서도 주택보다 공장이 더 많은 것은 이 지역이 주택지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해서 일 것이다.
이런 피해의식은 1990년대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 더 심화되었고 주민들은 실력으로 봉안당 설치 허가를 지연시키는 등 지자체간의 갈등으로 확대됐다. 또 명절 및 한식때 방문하는 성묘객으로 교통체증이 발생하자 도로 확포장과 버스노선 증차 등 지역과 관계되는 사업을 서울시에 요구하기도 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은 2010년 4월부터 8개월간 파주의 서울시립묘지의 묘역을 축소하고 화장장, 납골당, 골프장, 학교 건립 등과 관련된 타당성 용역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가 광탄면 발전기금을 4천억원 정도를 지원한다면서 광탄면 주민 대표와 서울시설관리공단장을 면담까지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2012.4.11일 19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 2012.4.3일에는 이인재 파주시장과 박원순 서울 시장이 일반묘역을 납골당이나 수목장으로 전환하고 잔여지 75%는 학교와 병원, 연구소 등의 시설을 유치하기로 합의했다고 언론에서 발표했다.
2012.4월 합의문 발표하기 이전 2011.12.15일에는 윤후덕 국회의원 예비후보가 서울시를 방문하여 김상범 행정부시장과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문제를 논의했다. 윤후덕 예비후보는 묘지구역을 정비하고 서울시의 교육시설 등을 이전해 달라는 의견서를 전달했다.
서울시와 합의후 일반묘역을 축소하는 '시립묘지의 생산적 활용을 위한 개발계획' 용역을 발주하고 관련 전문가가 참여하는 실무협의체를 구성하기로 했지만 2022년 현재까지 결과는 아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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