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줄: |
3번째 줄: |
| ==개요== | | ==개요== |
| [[File:심학산원경.PNG|400px|섬네일|심악산 원경]] | | [[File:심학산원경.PNG|400px|섬네일|심악산 원경]] |
− |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교하의 심악산(深岳山; 深嶽山)’ 이름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조선총독부가 1913년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처음 심학산(尋鶴山)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심학산|'심학산']]이라고 불린다.. | + |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교하의 심악산(深岳山; 深嶽山)’이름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다.1913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전설급동화(朝鮮傳說及童話)'에서 심학산(尋鶴山)이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심학산|'심학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
| | | |
| 2021.8월 정우진 상명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심학산’으로 개명한 것은 심악산의 풍수적 형국을 와해시키고 명당의 기운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창지개명한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ref> 정우진 · 김일림, 한강하구 ‘심악(深岳)’ 문화지형의 형성과 해체 , 2021.8월 </ref>--paki 2024년 8월 9일 (금) 10:49 (KST) | | 2021.8월 정우진 상명대학교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심학산’으로 개명한 것은 심악산의 풍수적 형국을 와해시키고 명당의 기운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창지개명한 것이라고 논문에서 밝혔다. <ref> 정우진 · 김일림, 한강하구 ‘심악(深岳)’ 문화지형의 형성과 해체 , 2021.8월 </ref>--paki 2024년 8월 9일 (금) 10:49 (KST) |
15번째 줄: |
15번째 줄: |
| 고문헌 가운데 심악산에 대한 가장 주목되는 기록은 국가에서 발간된 관찬사료로 심악산은 경기도 교하 일대를 대표하는 산악이자, 역사적으로 경기 북부지역에서 중요한 읍치로 기술된다. | | 고문헌 가운데 심악산에 대한 가장 주목되는 기록은 국가에서 발간된 관찬사료로 심악산은 경기도 교하 일대를 대표하는 산악이자, 역사적으로 경기 북부지역에서 중요한 읍치로 기술된다. |
| | | |
− | 관찬 사료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과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의 기록은 비교적 서 자세하게 나타난다. | + | 관찬 사료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 國輿地勝覽)과 영조 연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 圖書)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
| | | |
| 심악산은 교하현 읍치 남쪽 21리 또는 15리의 지점에 있으며, 고봉산(208m)에서 뻗어 나온 산이다.. 고구려의 천정구현을 신라가 차지한 후 교하현이 되었고, 한때 보신향으로 명명된 적이 있다고 한다. | | 심악산은 교하현 읍치 남쪽 21리 또는 15리의 지점에 있으며, 고봉산(208m)에서 뻗어 나온 산이다.. 고구려의 천정구현을 신라가 차지한 후 교하현이 되었고, 한때 보신향으로 명명된 적이 있다고 한다. |
23번째 줄: |
23번째 줄: |
| 여지도서에는 현의 관아가 심악산 아래에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읍치 배후의 진산 (鎭山)이 심악산 이었다는 것으로 풍수적 주산과 대부분 일치한다. | | 여지도서에는 현의 관아가 심악산 아래에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읍치 배후의 진산 (鎭山)이 심악산 이었다는 것으로 풍수적 주산과 대부분 일치한다. |
| | | |
− |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이래 큰 규모의 읍치로 유지된 심악현이 폐지되어 일개 마을로 격하된다. 태조 3년(1394) 심악현은 고양에 예속되었다가 태종 14년(1414)에 심악·교하·석천(石泉) 세 고을이 교하로 통 통합되면서 폐현이 되었다. | + | 조선시대에는 삼국시대 이래 큰 규모의 읍치로 유지된 심악현이 폐지되어 일개 마을로 격하된다. 태조 3년(1394) 심악현은 고양에 예속되었다가 태종 14년(1414)에 심악·교하·석천(石泉) 세 고을이 교하로 통 통합되어 폐현 되었다. |
| | | |
| 이때부터 심악은 작은 고을로 축소되어 명맥을 유지되었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 | 이때부터 심악은 작은 고을로 축소되어 명맥을 유지되었다가 고려가 멸망하고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
30번째 줄: |
30번째 줄: |
| 심악산은 조선 후기의 모든 문헌에서 일관되게 ‘深岳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을의 토착지명은 물을 막는다는 뜻의 '수막산(水幕山)’이 자주 거론된다. | | 심악산은 조선 후기의 모든 문헌에서 일관되게 ‘深岳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마을의 토착지명은 물을 막는다는 뜻의 '수막산(水幕山)’이 자주 거론된다. |
| | | |
− | '심악’과 ‘수 막’은 소리값이 유사하여 민간에서 불렀던 이명이었 것으로 보이고 문헌에서는 ‘수막’을 사용한 문인의 기록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문인 황세정(黃世楨) 은 선대 문인 구봉 송익필의 행적을 기록하며 '심악산' 을 ‘수막(水幕)’으로 명명한 바 있다. | + | '심악’과 ‘수막’은 소리값이 유사하여 민간에서 불렀던 이명이었 것으로 보이고 문헌에서는 ‘수막’을 사용한 문인의 기록이 간혹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 후기 문인 황세정(黃世楨) 은 선대 문인 구봉 송익필의 행적을 기록하며 '심악산' 을 ‘수막(水幕)’으로 명명한 바 있다. |
| | | |
| '수막’이 송익필 이 머물며 학문을 닦았던 심악산을 가리킨 것이 분명 하므로, 당시 심악산을 ‘수막산’이라고도 달리 불렀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수막’은 글자 그대로 ‘물의 장 막’이란 뜻을 지닌다. 이에 대해서는 파주지명유래와 전설(1997)에 잘 나타난다. | | '수막’이 송익필 이 머물며 학문을 닦았던 심악산을 가리킨 것이 분명 하므로, 당시 심악산을 ‘수막산’이라고도 달리 불렀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수막’은 글자 그대로 ‘물의 장 막’이란 뜻을 지닌다. 이에 대해서는 파주지명유래와 전설(1997)에 잘 나타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