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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례 방식은 유교식이 아닌 무당을 불러서 지낸다. 그래서 축을 읽거나 하는 것은 없다. 무당은 마을 단골무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바뀔 수 있다. 고 한다. 원래 있던 당골무당이 죽은 후 외부에서 무당을 부르고 있다 | + | 의례 방식은 유교식이 아닌 무당을 불러서 지낸다. 그래서 축을 읽거나 하는 것은 없다. 무당은 마을 단골무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바뀔 수 있다. 고 한다. 원래 있던 당골무당이 죽은 후 외부에서 무당을 부르고 있다. |
고사는 부정거리, 성주거리, 솟대거리 순으로 하루 종일 지낸다. 먼저 마을회 관 현관 안에서 무당이 부정거리를 한다. 방, 부엌, 화장실, 문지방에 시루떡을 한접시씩 놓고, 현관 안 큰상에 시루떡판을 판째로 올리고 술을 부으면 부정거주가 시작된 것이다. 무당은 오방기(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를 들 2마을회관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부정을 쫓는다. | 고사는 부정거리, 성주거리, 솟대거리 순으로 하루 종일 지낸다. 먼저 마을회 관 현관 안에서 무당이 부정거리를 한다. 방, 부엌, 화장실, 문지방에 시루떡을 한접시씩 놓고, 현관 안 큰상에 시루떡판을 판째로 올리고 술을 부으면 부정거주가 시작된 것이다. 무당은 오방기(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를 들 2마을회관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부정을 쫓는다. |
2025년 1월 21일 (화) 20:49 판
광탄면 용미4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전통 마을굿으로 마을의 안녕을 위해 치성과 제사를 지내는 행사이다.
개요
용미리 진대굿은 용미4리에 전승되는 전통 마을행사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주둔했던 '진지동'이라는 지명과,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솟대 문화가 결합되어 형성됐다.--2025년 1월 21일 (화) 20:34 (KST)
명칭
용미리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광탄면 지역의 호미리·구룡리 전부와 분수원 일부를 병합하면서, 구룡리의 '龍'자와 구미의 '尾'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이 지역은 속칭 '진지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593년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진을 쳤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기 위해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여 만든 것을 솟대라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춧대, 표춧대, 솔대,서낭대 등 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미리 진대굿은 행정지명과 진지동이라는 자연부락명이 솟대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유래
임진왜란 때 조선의 원군으로 파병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왜적을 막기 위해 진을 쳤던 곳으로 이여송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혜음령 너머 벽제관 일대에서 소서행장의 군대와 격전을 벌여 두 아우를 잃는 등 크게 패하고 평양으로 철수하였다고 한다.
마을사람 들이 전쟁이 끝나 돌아온 후 마을에 먹을 것이 부족하자 서울의 재부를 물어 오라는 기원으로 장대에 황새모양의 솟대를 세워 서울쪽 방향으로 두었다고 한다.
용미리 진대굿은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음력 10월의 한 날짜를 정해 무당이 산치성과 굿판을 함께해 치뤘다. 날짜가 정해진 다음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일정을 다시 잡았다.
1962년도부터는 음력 10월 3일로 고정하고 고사형식으로 간단하게 지냈지만 마을에 우환이 자주 생겨 1988년부터 다시 대동굿 형태로 전환했다고 한다.
의례 방법
제장(祭場)에는 육산도당·소산도당·진대가 있다. 육산도당(肉堂, 도당서낭)은 마을 왼쪽 산기슭에 있으며 당집 없이 터 주변에 소나무가 10여 그루 둘러 있다. 대동굿을 할 때 이들 소나무 중 한 나무에 한지를 접에 묶어 신체(神體)로 삼는다.
육당은 도당할아버지를 모신 곳으로 제물로 고기를 올린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소산도당(소당서낭)은 육당 옆쪽 산 밑에 있으며 육당과 마찬가지로 신목(神木)을 이름지어 도당할머니의 신체(神體)로 삼는다. 제물로는 고기를 일체 쓰지 않는다.
진대는 마을 입구(진대할아버지)와 뒤쪽(진대할머니)의 교회 앞에 세워져 있다. 진대는 소나무로 만든다.4m 높이의 진대 끝에 올린 새 모양을 ‘황새대가리’라 했다. 예전엔 진대를 3년마다 새로 세웠으나 근래엔 썩으면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어 세운다. [1]
의례를 위한 경비는 가구별로 추렴하고 부근의 공장에서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의례 절차
의례 방식은 유교식이 아닌 무당을 불러서 지낸다. 그래서 축을 읽거나 하는 것은 없다. 무당은 마을 단골무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바뀔 수 있다. 고 한다. 원래 있던 당골무당이 죽은 후 외부에서 무당을 부르고 있다.
고사는 부정거리, 성주거리, 솟대거리 순으로 하루 종일 지낸다. 먼저 마을회 관 현관 안에서 무당이 부정거리를 한다. 방, 부엌, 화장실, 문지방에 시루떡을 한접시씩 놓고, 현관 안 큰상에 시루떡판을 판째로 올리고 술을 부으면 부정거주가 시작된 것이다. 무당은 오방기(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를 들 2마을회관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부정을 쫓는다.
부정거리를 마치면 바로 산에 올라가 성주거리를 시작한다. 먼저, 상을 차리고 무당이 오방에 절을 하면 굿거리가 시작된다. 굿거리의 마 사역이 무당이 소머리를 삼지창에 꽂아 신이 제사를 받았음을 확인한다. 성주거리가 끝나면 솟대로 와서 고사를 지낸다. 솟대는 할아버지 솟대와 할머니솟대 두 개가 있다.
할아버지 솟대는 마을회관 앞에 있고, 할머니 솟대는 마 올교회 맞은편 계단에 있다. 두 솟대의 머리는 모두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당과 부녀 회원들은 할아버지 솟대 앞에 고사상을 차린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과실, 팥시루떡, 북어, 술 등을 올린다. 각 가정의 식구들 이름을 적은 소지 들올리고 불태우며 평안을 빈다. 그 사이 부녀회 회원 두 사람이 할머니 솟대에 도 간소한 상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현대적 계승
2020년대에 들어 농촌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전통 마을굿의 존속이 위협받는 가운데, (사)용미리진대굿보존회는 이를 축제 형식으로 발전시켜 전통문화 보전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보존회는 특히 코로나19 시기에도 지역 주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하는 문화유산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적 의의
용미리진대굿은 단순한 의례를 넘어 마을 공동체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문화적 장으로 기능해왔다. 현재는 전통문화 보존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지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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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파주시지 파주의 문화와 예술,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