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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명칭==
용미리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광탄면 지역의 호미리·구룡리 전부와 분수원 일부를 병합하면서, 구룡리의 '龍'자와 구미의 '尾'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이 지역은 속칭 '진지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593년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진을 쳤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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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리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광탄면 지역의 호미리·구룡리 전부와 분수원 일부를 병합하면서, 구룡리의 '龍'자와 구미의 '尾'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이 지역은 속칭 '진지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593년 임진왜란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진을 쳤던 곳이라 유래됐다고 한다.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기 위해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여 만든 것을  솟대라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춧대, 표춧대, 솔대,서낭대 등 으로 부르기도 한다..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하기 위해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여 만든 것을  솟대라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춧대, 표춧대, 솔대,서낭대 등 으로 부르기도 한다..  
 
    
 
    
 
용미리 진대굿은 행정지명과 진지동이라는 자연부락명이 솟대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용미리 진대굿은 행정지명과 진지동이라는 자연부락명이 솟대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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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유래==
 
[[File:pjsigi진대1.jpg|400px|섬네일|진대]]
 
[[File:pjsigi진대1.jpg|400px|섬네일|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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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 들이 전쟁이 끝나 돌아온 후 마을에 먹을  것이 부족하자 서울의 재부를 물어 오라는 기원으로 장대에 황새모양의 솟대를 세워 서울쪽 방향으로 두었다고 한다.
 
마을사람 들이 전쟁이 끝나 돌아온 후 마을에 먹을  것이 부족하자 서울의 재부를 물어 오라는 기원으로 장대에 황새모양의 솟대를 세워 서울쪽 방향으로 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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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리 진대굿은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음력 10월의 한 날짜를 정해 무당이 산치성과 굿판을  함께해 치뤘다. 날짜가 정해진 다음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일정을 다시 잡았다.
 
용미리 진대굿은 추수가 끝나고 마을에서 음력 10월의 한 날짜를 정해 무당이 산치성과 굿판을  함께해 치뤘다. 날짜가 정해진 다음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일정을 다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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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도부터ㅌ는 음력 10월 3일로 고정하고 고사형식으로 간단하게 지냈지만 마을에 우환이 자주 생겨 1988년부터 다시 대동굿 형태로  전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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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도부터는 음력 10월 3일로 고정하고 고사형식으로 간단하게 지냈지만 마을에 우환이 자주 생겨 1988년부터 다시 대동굿 형태로  전환했다고 한다.
    
==의례 방법==
 
==의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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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절차==
 
==의례 절차==
 
[[File:jindaea5.jpg|400px|섬네일|진대굿]]
 
[[File:jindaea5.jpg|400px|섬네일|진대굿]]
의례 방식은 유교식이 아닌 무당을 불러서 지낸다. 그래서 축을 읽거나 하는 것은 없다. 무당은 마을 단골무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바뀔 수 있다. 고 한다. 원래 있던 당골무당이 죽은 후 외부에서 무당을 부르고 있다. 올해 2년에는 의정부 무당이 징을 담당하는 신아버지와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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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 방식은 유교식이 아닌 무당을 불러서 지낸다. 그래서 축을 읽거나 하는 것은 없다. 무당은 마을 단골무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해마다 바뀔 수 있다. 고 한다. 원래 있던 단골무당이 죽은 후 외부에서 무당을 부르고 있다.
    
고사는 부정거리, 성주거리, 솟대거리 순으로 하루 종일 지낸다. 먼저 마을회 관 현관 안에서 무당이 부정거리를 한다. 방, 부엌, 화장실, 문지방에 시루떡을 한접시씩 놓고, 현관 안 큰상에 시루떡판을 판째로 올리고 술을 부으면 부정거주가 시작된 것이다. 무당은 오방기(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를 들 2마을회관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부정을 쫓는다.
 
고사는 부정거리, 성주거리, 솟대거리 순으로 하루 종일 지낸다. 먼저 마을회 관 현관 안에서 무당이 부정거리를 한다. 방, 부엌, 화장실, 문지방에 시루떡을 한접시씩 놓고, 현관 안 큰상에 시루떡판을 판째로 올리고 술을 부으면 부정거주가 시작된 것이다. 무당은 오방기(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연두색, 흰색)를 들 2마을회관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부정을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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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솟대는 마을회관 앞에 있고, 할머니 솟대는 마 올교회 맞은편 계단에 있다. 두 솟대의 머리는 모두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당과 부녀 회원들은 할아버지 솟대 앞에 고사상을 차린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과실, 팥시루떡, 북어, 술 등을 올린다. 각 가정의 식구들 이름을 적은 소지 들올리고 불태우며 평안을 빈다. 그 사이 부녀회 회원 두 사람이 할머니 솟대에 도 간소한 상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할아버지 솟대는 마을회관 앞에 있고, 할머니 솟대는 마 올교회 맞은편 계단에 있다. 두 솟대의 머리는 모두 서울 쪽을 바라보고 있다. 무당과 부녀 회원들은 할아버지 솟대 앞에 고사상을 차린다. 제물은 돼지머리, 삼색과실, 팥시루떡, 북어, 술 등을 올린다. 각 가정의 식구들 이름을 적은 소지 들올리고 불태우며 평안을 빈다. 그 사이 부녀회 회원 두 사람이 할머니 솟대에 도 간소한 상을 차리고 고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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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의 경우에는 이른 아침 부정과 액운을 없애는 것으로 시작해 불사(하늘의 문을 열어 가정의 건강과 재물 기원), 대신(운세풀이), 도사(학시과 풍수지리) 등으로 진행됐다. 이와함께 별상 작두타기와, 사물놀이 등의 순으로 행사가 마무리됐다.<ref>파주시대,2020.1.21, http://www.pajusidae.com/archives/news/11960</ref>
    
==현대적 계승==
 
==현대적 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