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 파주목사에 부임한 박태보는 선정으로 명망이 자자했다. 그 해 교하현이 파주목에 통합되면서 환곡 문제가 발생했지만, 박태보가 이를 원만히 처리했다.
1687년 파주목사에 부임한 박태보는 선정으로 명망이 자자했다. 그 해 교하현이 파주목에 통합되면서 환곡 문제가 발생했지만, 박태보가 이를 원만히 처리했다.
박태보는 모친이 파주에 거주했기에 파주목사를 자임했으며, 이 해 박세당, 윤증, 박세채가 모두 파주관아에 모여 박태보와 이틀간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박태보는 모친이 파주에 거주했기에 파주목사를 자임했으며, 이 해 박세당, 윤증, 박세채가 모두 파주관아에 모여 박태보와 이틀간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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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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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목사로 부임한 박태보는 당시 파주 관아의 상태가 매우 열악함을 확인했다. 청사는 이미 허물어진 지 50여 년(일부 기록에는 20여 년)이 지나, 목사가 창고에서 기거하며 업무를 봐야 할 정도로 남루한 실정이었다. 이에 박태보는 관아를 대대적으로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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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청사 안팎에서 주방과 창고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칸에 이르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민가에서 한 집당 두 사람씩 부역을 나와 50여 일 만에 공사를 마쳤다. 관아 건물이 완공될 무렵, 마침 파주 지역에 10여 년 만에 보기 드문 대풍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서로 치하하고 북치고 춤추는 모습을 본 박태보는 백성을 기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동헌의 이름을 '풍락헌(豊樂軒)'이라 지었다. 이때 '안회당(安懷堂)'이라는 건물도 함께 지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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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의 관아 중수 사실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한 기문인 '풍락헌기(豊樂軒記)'가 남아 있으며, 이는 후임 목사 홍우승이 1712년(숙종 38년)에 현판으로 만들어 벽에 걸었다. 훗날 1766년(영조 42년) 목사 이창운(李昌運)은 풍락헌과 안회당이 퇴락하자 "전임자가 이룬 공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며 이를 보수하고 증축하여 '어목헌(禦牧軒)'을 준공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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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는 파주목사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나,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순절했다.<ref>파주읍지</ref>_-paki 2026년 1월 2일 (금) 10:40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