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 마애 선정비

파주시 광탄천로 391번지 도로변 바위 암벽에 새겨진 조선시대 파주목사 박태보의 선정비이다,

박태보 마애 선정비, 파주학연구소

개요

마애 선정비는 도로변 바위 암벽 하단부 자연 암반에 직접 새겨진 형태로, 일반적인 석비와 달리 별도의 비석을 세우지 않고 바위면에 글자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발견 과정

위치도, 카카오맵

최초 제보자인 최도순과 이경성 씨가 김순현(파주신문 대표), 한기황(파주에서신문 이사장), 정헌식(파주문화원 부원장)에게 제보하면서 발견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2025년 8월 17일 현장조사를 실시했고, 토사에 묻힌 흙을 제거하자 명문이 드러났다. 다음 날에는 파주문화원 부설 파주학연구소장과 문화원국장이 현장을 참관하여 학술적 가치를 확인했다.

선정비 내용

각자된 마애비석 개요

각자 내용, 파주학연구소

발견된 마애비는 파주시 광탄천로 391번지 도로변 바위 암벽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 암반에 직접 새겨진 형태로, 일반적인 석비와 달리 별도의 비석을 세우지 않고 바위면에 글자를 새긴 것이 특징이다.

내용 분석

명문은 "牧使朴公泰輔□世□忘"으로 해석된다. 세부적인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 '牧'의 手 부수와 '使'의 人부수는 탈락된 상태이다
  • 앞의 □은 '萬' 혹은 '永'일 것으로 추정되나, 잔존한 글의 획을 보면 '萬'일 가능성이 높다
  • 뒤의 □은 일반적인 선정비 명문으로 '不'일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체 명문은 "牧使朴公泰輔萬世不忘"(목사 박공태보 만세불망)으로 파악된다 이는 "목사 박태보의 은덕을 만세토록 잊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측면에는 각석 시기가 적혀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서는 글씨가 보이지 않아 탁본을 통한 추가 확인이 필요한 상태이다.

문헌 근거

승정원일기 영조 7년 9월 7일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능행차 중 파주 지역을 지나면서 길가의 비석을 가리키며 "이는 누구의 비석인가?"라고 물었고, 신하가 "박태보의 거사비입니다"라고 답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영조는 "일찍이 이 고을 목사를 지냈는가?"라고 묻자, "박태보가 이 고을 목사가 되어 치적이 으뜸이었습니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정비 건립 시기 추정

연구진은 이 마애 선정비가 1694년에 각석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박태보가 1689년 7월 직첩을 돌려받았지만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정비에 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6년 후인 1694년 갑술환국에서 신원과 증직이 결정된 후에야 선정비 건립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일반적인 석비 건립에 비해 경비가 절감되는 마애각석 방식을 택한 것은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함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역사적 가치와 의미

이번 발견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파주에서 유일한 마애 선정비라는 희소성을 갖는다.

둘째, 1689년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 폐위사건으로 절의를 지킨 이세화, 오두인, 박태보의 생사 궤적을 파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셋째, 승정원일기 기록과 일치하는 실물 자료로서 조선 후기 파주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의주로와 광탄 소주정소의 위치, 남계 박세채의 남계영당 위치 추정에도 도움을 주는 등 파주 지역의 역사 지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박태보 일대기

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박세당의 아들이며 박세후에 입후되었다. 그의 관직 이력과 주요 행적은 다음과 같다:

관직 생활

박태보는 이천현감을 시작으로 부수찬, 교리, 이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특히 호남의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과감한 비리 지적으로 조정 대신들의 감탄을 받았고, 호남 지역 주민들로부터도 진정한 어사라는 찬사를 받았다.

파주목사 재직

1687년 파주목사에 부임한 박태보는 선정으로 명망이 자자했다. 그 해 교하현이 파주목에 통합되면서 환곡 문제가 발생했지만, 박태보가 이를 원만히 처리했다. 박태보는 모친이 파주에 거주했기에 파주목사를 자임했으며, 이 해 박세당, 윤증, 박세채가 모두 파주관아에 모여 박태보와 이틀간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관아 중수

파주목사로 부임한 박태보는 당시 파주 관아의 상태가 매우 열악함을 확인했다. 청사는 이미 허물어진 지 50여 년(일부 기록에는 20여 년)이 지나, 목사가 창고에서 기거하며 업무를 봐야 할 정도로 남루한 실정이었다. 이에 박태보는 관아를 대대적으로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공사는 청사 안팎에서 주방과 창고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여 칸에 이르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민가에서 한 집당 두 사람씩 부역을 나와 50여 일 만에 공사를 마쳤다. 관아 건물이 완공될 무렵, 마침 파주 지역에 10여 년 만에 보기 드문 대풍년이 들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서로 치하하고 북치고 춤추는 모습을 본 박태보는 백성을 기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동헌의 이름을 '풍락헌(豊樂軒)'이라 지었다. 이때 '안회당(安懷堂)'이라는 건물도 함께 지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태보의 관아 중수 사실과 그 뜻을 기리기 위한 기문인 '풍락헌기(豊樂軒記)'가 남아 있으며, 이는 후임 목사 홍우승이 1712년(숙종 38년)에 현판으로 만들어 벽에 걸었다. 훗날 1766년(영조 42년) 목사 이창운(李昌運)은 풍락헌과 안회당이 퇴락하자 "전임자가 이룬 공을 유지하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며 이를 보수하고 증축하여 '어목헌(禦牧軒)'을 준공하기도 했다.

박태보는 파주목사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나,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순절했다.[1]_-paki 2026년 1월 2일 (금) 10:40 (KST)

이세화의 회고와 시 「풍락헌(豊樂軒)」

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박태보(朴泰輔)를 그리워하며 남긴 시는 박태보가 파주목사 재임 시절 중수한 동헌인 '풍락헌(豊樂軒)'을 주제로 하고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세화는 훗날 이곳 파주의 풍락헌을 지나며, 먼저 세상을 떠난 박태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사람은 가고 빈 동헌에는 흔적만 남았는데 (人去空軒尙有浪 인거공헌상유랑)
지금도 그 청빈함 우러러 보네 (至今驚應仰淸風 지금경응앙청풍)
남은 생이 백수인 이 관찰사는 (餘生白首李觀察 여생백수이관찰)
그날의 박사군이 너무 그립구려 (最憶當年朴使君 최억당년박사군)

시에서 '박사군'으로 지칭된 박태보와 이세화는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두 사람은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당시 오두인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위를 목숨 걸고 반대하다 국문을 당한 '삼간신(三諫臣)'으로 불렸다. 박태보는 모진 고문 끝에 유배 길에 올라 노량진에서 순절하였으나, 이세화는 살아남아 훗날 복직되었다.

풍락헌은 박태보가 파주목사로 재임하던 1688년, 낡은 관아를 헐고 '백성이 기뻐한다'는 뜻을 담아 새로 지은 건물이다. 주인은 떠나고 빈 건물만 남은 풍락헌을 마주한 이세화는, 박태보의 청빈했던 삶을 회상하며 백발(백수)의 노인이 되어 홀로 살아남은 자신의 처지에서 먼저 간 동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2]


기사환국과 죽음

기사환국으로 율곡과 우계가 문묘종향에서 출향되자 자운서원과 파산서원에도 출향해야 했으나, 박태보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켜 인책과 면직의 원인이 되었다. 1689년 인현왕후 폐위사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세화, 오두인과 함께 소두로 지목되어 혹독한 국문을 당한 후 옥독으로 귀양길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했다.같은 해 7월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신원은 안 되었고, 1694년(숙종 20년)에 신원과 증직이 이루어졌다.


관련 정보

링크 모음

가볼만한곳



더보기



자료 출처


  1. 파주읍지
  2. 파주연구 제15호, 2021.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