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랑은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기녀로 불리는 기생으로 사대부를 사랑하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파주의 해주 최씨 선산에 묻혔다.

파주시 다율동 홍랑의 묘,2012년


홍랑의 삶

홍랑은 함경도 홍원 출신으로 어려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다가 12살에 어머니가 죽자 그 지역의 관아인 함경도의 기생으로 입적했다. 그 후 16세가 넘던 가을에 홍랑은 당시 율곡 이이, 송익필 등과 함께 조선 중기 8대 문장가이던 고죽 최경창을 만났다.

최경창은 병마절도사 보좌관 직책의 관리로 2년정도 순환 보직되는 자리였고 가을 어느날 고을 원님이 초청한 술자리에서 홍랑을 만났다. 이듬해 봄에 보직을 마치고 한양으로 복귀하는 최경창을 잊지 못해 홍랑도 동행하기도 했다.

당시의 관기는 소속된 지역을 벗어날 수 없어 홍랑은 함경도로 되돌아 갔다. 홍랑은 함경도 경계인 함관령에서 송별시를 써서 최경창에게 보냈다. 이 시는 국내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한글로 된 시 원본이 2000년 11월에 발견되면서 유명해 졌다.

최경창이 복귀한 다음 해에 병이 들어 겨울까지 자리에서 일어 나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홍랑은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에 들어와서 병 수발을 했다. 그러나 사헌부는 최경창이 북방의 관기를 도성에 살게 한 것을 빌미로 1576년 봄에 파직 시켰다.

파직 당한 최경창은 본래의 깨끗한 성품을 인정받아 복직하게 되었고 몇 번 변방의 한직으로 근무하다가 1583년 45세의 나이로 객사했다. 홍랑은 파주 월롱면 영태리 묘지에 찾아와 대성통곡하고 자신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흉한 모습으로 시묘살이를 했다.

홍랑이 시묘살이를 한지 9년이 되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유작들을 모아 고향으로 피난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최경창의 유작을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가 비록 천한 신분의 관기였으나 집안 사람으로 여겨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 주었다.

변방곡

                - 홍랑-
산버들 곱게 꺽어 보내노니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한글 원작시와 한자번역시>
“묏버들 갈ᄒᆡ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ᄃᆡ
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擇折楊柳寄千里 人爲試向庭前種 須知一夜生新葉).”

송별

                 -최경창-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의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묘지 이전

교하읍 다율리로 이전

원래 최씨 문중의 선산 4만평이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고 최경창과 홍랑은 이곳 문중의 묘지에 있었다. 이 선산은 1969년 캠프에드워드가 주둔하면서 국방부에 의해 미군부대 부지로 강제로 수용됐다.

영태리의 선산을 징발 당한 최씨 문중은 당시 교하면 다율리 519-7번지 야산을 구입해 종중묘를 이장했다.

법원읍 동문리로 이전

교하 다율리로 문중 묘를 이장하고 2000년 홍랑의 시가 발견되자 홍랑의 묘지에 문학과 관련된 학생이나 일반인들의 방문이 많아 졌다.

2005년 교하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종중 소유의 부지 1만평중 절반 가량이 수용됐다. 이 당시 문중에서는 나머지 땅도 언제 개발될지 모르다며 오산으로 이장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영태리 캠프에드워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자 최씨 문중은 수용됐던 토지 매수를 추진했다. 종중은 원래의 선산에 조선시대 유명한 문인들의 묘소를 복원할 수 있도록 전국 각지에 산재한 문중의 서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했다.

국방부는 해당 토지를 현금으로 지급하고 매수한 토지이기 때문에 원 소유자에게 수의 매각이 불가하다고 답변했다. 순탄하지 않던 다율리 최씨 문중 묘지는 2018년 GTX A노선의 기지창으로 결정되면서 다시 수용지역으로 편입됐다.

종중에서는 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2022년 적성면 지역으로 이장을 결정했다. 적성면 이전을 추진했으나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어 도로변이나 주거지역에 근접한 곳에 설치가 어렵게 되자 2023년 법원읍 동문리 295-9번지로 이전 했다.--paki 2024년 2월 7일 (수) 13:21 (KST)

동문리 묘역 시설

홍랑의 묘는 해주최씨 종중묘역에 최경창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위치는 법원읍 동문리 295-9번지로 당초 동문리 295-2 번지 임야에 묘지를 조성하면서 분할됐다.

부지는 전체 800㎥ (242평)으로 가운데 고죽 최경창 부부와 홍랑, 좌측에 최수인 부부, 최휘의 (諱凝)부부, 우측에 최휘집(諱潗) 부부의 묘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묘역 입구에는 1969년 6월 다율리에 세웠던 이장 묘역 조성비와 홍랑가비를 이전 설치했다. 묘역 조성비는 해주최씨 선조의 업적과 연혁을 비석 4면에 새겼다.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 세운 홍랑가비는 전면에 묏버들 시와 함께 후면에는 고죽 최경창이 묏버들가를 한시로 번역한 문장을 새겼다.

홍랑 가비

종중묘역 입구, 사진 파주위키

전면 -홍랑가비

묏버들 갈ᄒᆡ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ᄃᆡ
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후면- 고죽시비
고죽시비로 명명되고 <묏버들가>를 최경창이 한자로 번역한 <변방곡>이 새겨져 있다.

折楊柳寄與千里 人爲我試向庭前(절양류기여천리 인위아시향정전)
須知一夜新生葉 椎悴愁 眉是姜身(수지일야신생엽 추췌수미시강신)

좌측 측면- 시비 설치 취지
좌측에는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가 시비를 설치한 취지를 새겼다.
이 비(碑)는 고죽(孤竹)의 진적(眞跡)에 의하여 1981년 11월 문중의 협조로 세우다.

우측측면- 묏버들 작문시기
우측에는 홍랑이 시를 작문한 시기로 고죽 최경창이 병이 난 시기이다.
萬曆 丙子夏 孤竹 病人 (만력 병자하 고죽 병인)
만력 병자년(1576년) 여름 고죽이 병이나다.

시비 기단
이와함께 시비 기단에는 제작을 주관한 단체와 동호회원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시비 제작 단체는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로 전면에는 김동욱 등 27명과 후면에는 최래옥 등 2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후대 평가

  • 홍랑의 시는 1981년 김동욱 교수에 의해 알려졌고 고등학교 고문교과서에 게재되기도 했다. 2000.11월에는 1573년 한글로 쓰인 '묏버들 가려 꺽어' 원본이 발견되어 더욱 유명해 졌다.
  • 홍랑을 기리기 위해 파주홍랑문화예술협회라는 민간단체가 창립됐고 2018년에 제1회 파주 홍랑문화예술를 개최했다. 2019년에 제2회 예술제가 열렸지만 코로나19로 인하여 그 다음해 부터는 행사가 개최되지 않았다.

관련 정보

이슈 유튜브


KBS 한국사전 – 시인과 기생, 사랑으로 시대를 넘다


임영웅이 부르는 홍랑

사진 기록

Pk-홍랑묘지1.JPG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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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