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뀜

2,661 바이트 추가됨 ,  2024년 2월 7일 (수) 13:21
편집 요약 없음
42번째 줄: 42번째 줄:     
==묘지 이전==  
 
==묘지 이전==  
원래 최씨 문중의 선산 4만평이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고 최경창과 홍랑은 이곳 문중의 묘지에 있었다. 이 선산은 1969년 캠프에드워드가 주둔하면서 국방부에 의해 미군부대 부지로 강제로 수용됐다. 영태리의  선산을 징발 당한 최씨 문중은 당시 교하면 다율리에 야산을 구입해 종중묘를 이장했다.  
+
===교하읍 다율리로 이전===
 +
원래 최씨 문중의 선산 4만평이 월롱면 영태리에 있었고 최경창과 홍랑은 이곳 문중의 묘지에 있었다. 이 선산은 1969년 캠프에드워드가 주둔하면서 국방부에 의해 미군부대 부지로 강제로 수용됐다.  
   −
교하 다율리로 문중 묘를 이장하고 2000년 홍랑의 시가 발견되자 홍랑의 묘지에 문학과 관련된 학생이나 일반인들의 방문이 많아 졌다. 2005년 교하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종중 소유의 부지 1만평중 절반 가량이 수용됐다. 이 당시 문중에서는 나머지 땅도 언제 개발될지 모르다며 오산으로 이장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
영태리의 선산을 징발 당한 최씨 문중은 당시 교하면 다율리 519-7번지 야산을 구입해 종중묘를 이장했다.
   −
영태리 캠프에드워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자 최씨 문중은 수용됐던 토지 매수를 추진했다. 종중은 원래의 선산에 조선시대 유명한 문인들의 묘소를 복원할 수 있도록 전국 각지에 산재한 문중의 서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했다. 국방부는 해당 토지를 현금으로 지급하고 매수한 토지이기 때문에 원 소유자에게 수의 매각이 불가하다고 답변했다.
+
===법원읍 동문리로 이전===
 +
교하 다율리로 문중 묘를 이장하고 2000년 홍랑의 시가 발견되자 홍랑의 묘지에 문학과 관련된 학생이나 일반인들의 방문이 많아 졌다.
 +
 
 +
2005년 교하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종중 소유의 부지 1만평중 절반 가량이 수용됐다. 이 당시 문중에서는 나머지 땅도 언제 개발될지 모르다며 오산으로 이장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
 
 +
영태리 캠프에드워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하자 최씨 문중은 수용됐던 토지 매수를 추진했다. 종중은 원래의 선산에 조선시대 유명한 문인들의 묘소를 복원할 수 있도록 전국 각지에 산재한 문중의 서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했다.  
 +
 
 +
국방부는 해당 토지를 현금으로 지급하고 매수한 토지이기 때문에 원 소유자에게 수의 매각이 불가하다고 답변했다.
 +
순탄하지 않던 다율리 최씨 문중 묘지는 2018년 GTX A노선의 기지창으로 결정되면서 다시 수용지역으로 편입됐다.
 +
 
 +
종중에서는 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2022년 적성면 지역으로 이장을 결정했다. 적성면 이전을 추진했으나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이 강화되어 도로변이나 주거지역에 근접한 곳에 설치가 어렵게 되자 2023년  법원읍 동문리 295-9번지로 이전 했다.--paki 2024년 2월 7일 (수) 13:21 (KST)
 +
 
 +
==동문리 묘역 시설==
 +
홍랑의 묘는 해주최씨 종중묘역에 최경창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위치는 법원읍 동문리 295-9번지로 당초 동문리 295-2 번지 임야에 묘지를 조성하면서 분할됐다.
 +
 
 +
부지는 전체 800㎥ (242평)으로  가운데  고죽 최경창 부부와 홍랑, 좌측에 최수인 부부, 최휘의 (諱凝)부부, 우측에 최휘집(諱潗) 부부의 묘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
 
 +
묘역 입구에는 1969년 6월 다율리에 세웠던 이장 묘역 조성비와 홍랑가비를 이전 설치했다. 묘역 조성비는 해주최씨 선조의 업적과 연혁을 비석 4면에 새겼다.
 +
 
 +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  세운 홍랑가비는 전면에 묏버들 시와 함께 후면에는 고죽 최경창이 묏버들가를 한시로 번역한 문장을  새겼다.
 +
 
 +
===홍랑 가비===
 +
[[File:20240206_홍랑002.jpg|400px|섬네일|종중묘역 입구, 사진 파주위키]]
 +
'''전면 -홍랑가비'''
 +
<poem>
 +
묏버들 갈ᄒᆡ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ᄃᆡ
 +
자시ᄂᆞᆫ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
 
 +
'''후면- 고죽시비'''
 +
시비 전면은 고죽시비로 <묏버들가>를 최경창이 한자로 번역한 <번방곡>이 새겨져 있다.
 +
 
 +
折楊柳寄與千里 人爲我試向庭前(절양류기여천리 인위아시향정전)
 +
須知一夜新生葉 椎悴愁 眉是姜身(수지일야신생엽 추췌수미시강신) 
 +
 
 +
'''좌측 측면- 시비 설치 취지'''
 +
좌측에는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가 시비를 설치한 취지를 새겼다.
 +
이 비(碑)는 고죽(孤竹)의 진적(眞跡)에 의하여 1981년 11월 문중의 협조로 세우다.
 +
 
 +
'''우측측면- 묏버들 작문시기'''
 +
우측에는 홍랑이 시를 작문한 시기로 고죽 최경창이 병이 난 시기이다.
 +
萬曆 丙子夏 孤竹 病人 (만력 병자하 고죽 병인)
 +
만력 병자년(1576년) 여름 고죽이 병이나다.
 +
 
 +
'''시비 기단'''
 +
이와함께 시비 기단에는 제작을 주관한 단체와 동호회원 명단이 기록되어있다. 시비 제작 단체는 "전국국어국문학시가비건립동호회"로 전면에는 김동욱 등 27명과 후면에는 최래옥 등 2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poem>
   −
순탄하지 않던 다율리 최씨 문중 묘지는 2018년 GTX A노선의  기지창으로 결정되면서 다시 수용지역으로 편입됐다. 종중에서는 문화유적공원으로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2022년  적성면 지역으로 이장을 결정했다.
      
==후대 평가==
 
==후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