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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인 1656년, 『동국여지지』에서는  '分水院분수원'으로 표기됐다.. 이전의 '焚修院분수원'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이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보다는 유교국가인 조선이  불교적 색채를 지우는 과정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기인 1656년, 『동국여지지』에서는  '分水院분수원'으로 표기됐다.. 이전의 '焚修院분수원'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이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보다는 유교국가인 조선이  불교적 색채를 지우는 과정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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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汾水院분수원'이라는 표기도 나타났는데, 이는 분수원과 같은 의미로 물의 흐름을 형상화한 한자였다. 焚修院분수원에서 分水院분수원, '汾水院분수원으로 이어지는 명칭 변화는  600년 역사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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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汾水院분수원'이라는 표기도 나타났는데, 이는 분수원과 같은 의미로 물의 흐름을 형상화한 한자였다. 焚修院분수원에서 分水院분수원, '汾水院분수원으로 이어지는 명칭 변화는  600년 역사의 변천사를 담고 있다.
    
==위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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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과 역할 ==
 
==기능과 역할 ==
분수원은 시대에 따라기능과 역할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전형적으로 사찰에서 운영되는 역원으로 통행객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발굴된 용미리의 혜음원의 역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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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원은 시대에 따라기능과 역할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전형적으로 사찰에서 운영되는 역원으로 통행객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발굴된 용미리 혜음원의 역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분수원은  승유억불 정책에 따라 분수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관료를 위한 공식적인 숙박 시설로 전환 된 것이다. 특히, 영조가 장릉에 참배하러 갈 때, 고종이 능행차를 할 때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을 보면  역할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분수원은  승유억불 정책에 따라 분수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관료를 위한 공식적인 숙박 시설로 전환 된 것이다. 특히, 영조가 장릉에 참배하러 갈 때, 고종이 능행차를 할 때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을 보면  역할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