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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근거===
 
===문헌 근거===
 
승정원일기 영조 7년 9월 7일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능행차 중 파주 지역을 지나면서 길가의 비석을 가리키며 "이는 누구의 비석인가?"라고 물었고, 신하가 "박태보의 거사비입니다"라고 답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영조는 "일찍이 이 고을 목사를 지냈는가?"라고 묻자, "박태보가 이 고을 목사가 되어 치적이 으뜸이었습니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7년 9월 7일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능행차 중 파주 지역을 지나면서 길가의 비석을 가리키며 "이는 누구의 비석인가?"라고 물었고, 신하가 "박태보의 거사비입니다"라고 답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영조는 "일찍이 이 고을 목사를 지냈는가?"라고 묻자, "박태보가 이 고을 목사가 되어 치적이 으뜸이었습니다"라는 답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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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비 건립 시기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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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진은 이 마애 선정비가 1694년에 각석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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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가 1689년 7월 직첩을 돌려받았지만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정비에 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6년 후인 1694년 갑술환국에서 신원과 증직이 결정된 후에야 선정비 건립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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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반적인 석비 건립에 비해 경비가 절감되는 마애각석 방식을 택한 것은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함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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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가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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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견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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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파주에서 유일한 마애 선정비라는 희소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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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1689년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 폐위사건으로 절의를 지킨 이세화, 오두인, 박태보의 생사 궤적을 파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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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승정원일기 기록과 일치하는 실물 자료로서 조선 후기 파주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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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의주로와 광탄 소주정소의 위치, 남계 박세채의 남계영당 위치 추정에도 도움을 주는 등 파주 지역의 역사 지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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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 일대기==
 
==박태보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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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보는 파주목사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나,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순절했다.<ref>파주읍지</ref>_-paki 2026년 1월 2일 (금) 10:40 (KST)
 
박태보는 파주목사로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었으나,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 가던 중 노량진에서 순절했다.<ref>파주읍지</ref>_-paki 2026년 1월 2일 (금) 10:4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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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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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화의 회고와 시 「풍락헌(豊樂軒)」===
기사환국으로 율곡과 우계가 문묘종향에서 출향되자 자운서원과 파산서원에도 출향해야 했으나, 박태보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켜 인책과 면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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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인현왕후 폐위사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세화, 오두인과 함께 소두로 지목되어 혹독한 국문을 당한 후 옥독으로 귀양길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했다.같은 해 7월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신원은 안 되었고, 1694년(숙종 20년)에 신원과 증직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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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화(李世華, 1630~1701)가 박태보(朴泰輔)를 그리워하며 남긴 시는 박태보가 파주목사 재임 시절 중수한 동헌인 '풍락헌(豊樂軒)'을 주제로 하고 있다. 평안도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세화는 훗날 이곳 파주의 풍락헌을 지나며, 먼저 세상을 떠난 박태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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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비 건립 시기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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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연구진은 마애 선정비가 1694년에 각석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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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가고 빈 동헌에는 흔적만 남았는데 (人去空軒尙有浪 인거공헌상유랑)
박태보가 1689년 7월 직첩을 돌려받았지만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정비에 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6년 후인 1694년 갑술환국에서 신원과 증직이 결정된 후에야 선정비 건립이 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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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청빈함 우러러 보네 (至今驚應仰淸風 지금경응앙청풍)
또한 일반적인 석비 건립에 비해 경비가 절감되는 마애각석 방식을 택한 것은 정치적, 경제적 의미가 함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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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이 백수인 관찰사는 (餘生白首李觀察 여생백수이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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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박사군이 너무 그립구려 (最憶當年朴使君 최억당년박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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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가치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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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박사군'으로 지칭된 박태보와 이세화는 각별한 인연을 맺은 사이였다. 두 사람은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 당시 오두인과 함께 인현왕후의 폐위를 목숨 걸고 반대하다 국문을 당한 '삼간신(三諫臣)'으로 불렸다. 박태보는 모진 고문 끝에 유배 길에 올라 노량진에서 순절하였으나, 이세화는 살아남아 훗날 복직되었다.
이번 발견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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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파주에서 유일한 마애 선정비라는 희소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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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락헌은 박태보가 파주목사로 재임하던 1688년, 낡은 관아를 헐고 '백성이 기뻐한다'는 뜻을 담아 새로 지은 건물이다. 주인은 떠나고 빈 건물만 남은 풍락헌을 마주한 이세화는, 박태보의 청빈했던 삶을 회상하며 백발(백수)의 노인이 되어 홀로 살아남은 자신의 처지에서 먼저 간 동지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ref>파주연구 제15호, 2021.12월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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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1689년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 폐위사건으로 절의를 지킨 이세화, 오두인, 박태보의 생사 궤적을 파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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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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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으로 율곡과 우계가 문묘종향에서 출향되자 자운서원과 파산서원에도 출향해야 했으나, 박태보는 조정의 정책에 따르지 않고 그대로 존속시켜 인책과 면직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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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 인현왕후 폐위사건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세화, 오두인과 함께 소두로 지목되어 혹독한 국문을 당한 후 옥독으로 귀양길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했다.같은 해 7월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신원은 안 되었고, 1694년(숙종 20년)에 신원과 증직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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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승정원일기 기록과 일치하는 실물 자료로서 조선 후기 파주 지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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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의주로와 광탄 소주정소의 위치, 남계 박세채의 남계영당 위치 추정에도 도움을 주는 등 파주 지역의 역사 지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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