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을-강근숙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했을까. 성리학이 조선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대부는 여자를 돌같이 보아야 하며 사랑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다. 양반집 남녀는 반드시 내외를 해야 했으며, 연애나 사랑, 여색을 가까이하는 것은 철저하게 배격했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상적인 국가를 실현하려 했던 조광조는 이웃집 처녀가 그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해서 사랑을 고백했다가 회초리를 맞았다는 일화가 있다. 사랑 고백하는 여인의 종아리를 치다니, 아마도 큰일을 하려는 사대부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경고였을지 모른다.

조선 사대부들이 기록한 글에는 양반집 규수와 연애담은 볼 수 없고, 기생과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기생, 혹은 기녀라면 오늘날까지도 화류계 여성을 일컫는 말이지만, 본래는 특별한 기술이나 기예를 가진 기능적 여성을 의미했다. 초기에 이들은 침선이나 의약, 가무를 익혀 나라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었다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회 변화에 따라 차츰 위안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어차피 양반들의 술 시중을 들어야 하는 처지지만, 뛰어난 재주와 학식을 갖춘 기생은 결코 창기 취급은 당하지 않겠다는 자존심으로 자신을 기생이 아닌, 한 사람의 예인으로 존중해주기를 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시대 명기 중에 황진이만큼 널리 알려진 기생은 없을 것이다. 황진이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조선 중종 대에 개성에서 활동한 명기로 기명은 명월明月이다. 아버지는 진사 황씨였고, 어머니 맹인 진현금은 얼굴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열여덟이 되기 전에 가야금 명수로 관가에 불려 다녔다. 종모법에 따라 황진이는 어머니 신분을 따를 수밖에 없었으나, 기생이 된 것은 그녀를 흠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은 이웃집 서생 때문이라 한다. 황진이 집 앞에서 서생의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저고리를 벗어 관을 덮어주자 비로소 앞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다.
황진이는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깨우쳤고, 뛰어난 미모와 예술적 재능으로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교류했다. 조선의 남존여비 제도 속에서 수많은 남자를 굴복시켰고, 30년 벽면 수도한 생불이라 불리는 지족선사도 황진이 미색에 무너졌다. 종실 벽계수가 그녀의 아름다운 소리에 반해 뒤돌아보다가 나귀 등에서 굴러떨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면서 유교 인습에 빠져있던 사대부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받아치는 결기가 멋들어지다.
靑山里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과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조선의 기생은 원칙적으로 관청에 소속되어 수청드는 것이 관례였으나, 황진이는 관습에 굴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랑을 구가했다. 그중 한 사람이 소세양으로 그녀보다 이십 년이나 연상이었다. 이조판서와 우찬성을 지낸 정객이자 명문장가 소세양은 황진이에게 ‘류榴’ 한 글자로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황진이도 ‘어漁’ 한 글자로 답을 했다. 이들의 기묘한 편지의 뜻은 소세양의 편지는 ‘석유나무유碩儒那無遊’로서 ‘여기 큰선비가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느냐’는 뜻이고, 황진이의 답장은 ‘고기자불어高妓自不語’로서, ‘뛰어난 기생은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으니 오든 말든 맘대로 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떠본 두 사람은 딱 한 달만 살아보자 합의하였고, 꿈같은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한다. 황진이는 소세양의 손을 잡고 개성 남쪽 누대에 올라 술잔치를 벌였다. 그녀는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 없이 시 한 수를 지어 소세양에게 주었었다.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도 노랗게 피었네
누각은 높이 하늘이 한 척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이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 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황진이 소문을 들은 소세양은 친구들에게 ‘나는 황진이가 아무리 절색이라 해도 한 달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고, 그 뒤에 미련을 갖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호언장담했는데, 그는 조정의 부름으로 한양으로 돌아간 뒤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리워했다. 얼마 후, ‘소야월곡’이란 편지 시 한 장을 받는다. 편지를 받은 소세양은 “난 사람이 아니어도 좋다”며 황진이를 다시 찾았다. 한 여인이 헤어진 정인을 그리워 보낸 시조 한 편이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현대식으로 가사를 바꾸고 음률에 입혀져 노래가 되었다.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가 애절하다 생각했는데, 바로 황진이 시에서 나온 노래였다.

황진이가 사랑한 인물은 하나둘이 아니다. 풍류객 이사종은 이름을 날리던 명창이었다. 황진이는 그의 풍류를 알아보고 먼저 ‘그대와 함께 6년을 살아야겠습니다’ 동거를 제안했다. 황진이는 3년 살 살림살이와 비용을 마련하여 이사종의 부모 처자를 섬기며 첩의 예를 다하였다. 3년을 마치자 이사종은 황진이 집으로 들어가 그녀와 같이 하였다. 정해진 6년이 끝나자 서로는 깨끗하게 헤어졌다는 파격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일화도 전한다. 황진이는 5백 년 전,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택해 계약 동거를 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인이었다.
당대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세도가 풍류객들 사이에서는 황진이와 술잔을 나누고 시 한 수 읊었다고 하면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화담 서경덕은 여러 해를 가까이 지냈어도 소 닭 보듯 무덤덤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그도 남자인데 별수 있겠냐’며 유혹하러 길을 나섰다. 마침 비가 내렸고, 잠자리 날개 같은 한복은 살결에 달라붙었다. 화담은 젖은 옷을 벗기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잠자리를 만들어준 후, 황진이를 옆에 두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눈을 뜨니 화담은 어디 가고 소박한 밥상이 차려있었다. 황진이는 대학자 서경덕에게 감화되어 다음 날 옷을 단정히 입고 큰절을 올리며,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개성 시내에서 칠십여 리를 달려 천마산 기슭 박연폭포 앞 용바위에 섰다. 박연에서 흐르는 37미터 박연폭포는 굽히지 않는 기개로 힘차게 쏟아져 내린다. 그래서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던가. 만약 화담이 그녀의 육체를 품었다면 난향처럼 그윽하게 전해오는 이야기는 없었을 것이다.

<박연폭포>
한줄기 물줄기 하늘에서 골짝에 떨어져
용추 못 백길 되는 물줄기 용솟음치는구나
날아오른 샘물은 거꾸로 쏟아진 은하수인 듯
성난듯한 물결이 흰 무지개처럼 드리웠구나
날리는 우박 치닫는 우레 소리 골짜기에 가득차고
구술같이 치솟아 부서져 하늘까지 이르네
나그네여 여산廬山의 폭포만 좋다고 말하지 마오
이 천마산 폭포가 해동의 제일임을 알아야 하오
물줄기가 떨어지는 고모담의 담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쪽빛이다. 발아래 용바위에는 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해 머리채를 붓으로 삼아 썼다는 초서체 시는 아무리 들여다 봐도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황진이는 박연폭포에 와서 ‘중국의 여산을 말하지 말라’ 한 것은, 내 나라 조선 땅이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였으리라.
황진이는 기생 신분에도 성별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자유분방한 삶을 산 여인이다. 그는 죽게 될 즈음,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제가 죽거든 관에도 넣지 말고 곡하지도 말며, 풍악을 울려주오.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 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토록 해주세요”했다. 아무리 자유분방하게 살았어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조선 여인이었다. 집안사람이 그대로 따랐는데, 한 남자가 그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었다. 지금의 장단長湍 입우물재口井峴 남쪽에 황진이 무덤이 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제가 평안도사로 부임 되어 가는 길에 송도 황진이 무덤에서 시 한 수 지어 그녀를 추모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세가인이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는 허무함에 임제는 그와 술 한잔 나눌 수 없는 아쉬움을 애도했다. 그러나 관복 입은 양반이 기생의 무덤 앞에서 추모의 시를 읊은 것이 문제가 되어 조정의 비난을 받다가, 끝내는 파직당했다. 당시 사대부들은 기생과의 교유를 풍류로 여길지라도, 천민인 기생이기에 엄격한 관료 사회에서는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린 것으로 여겨 임제는 곤경을 겪게 된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 중에 나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을 가장 좋아한다. 어떻게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는 시를 쓸 수 있을까. 일 년 중 가장 밤이 길다는 동짓달, 과연 어느 시인이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낼 수 있겠는가. 오직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한 상상력은 참으로 절묘하고도 아름답다. 그의 시조는 사랑과 이별,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하면서도 단순한 비탄이 아니라 기품있는 언어로 승화시켰다.

오래전에 서예가 동생이 황진이 시조 여섯 수를 붓글씨로 적은 광목 커튼을 선물했다. 고된 삶 속에서도 커튼을 바라보며 시심에 젖었고, 16세기 기생이라는 멍에를 메고 고뇌의 길을 걸었던 한 여인의 쩌릿한 삶을 아파했다. 이사 다니느라 한동안 접어두었던 커튼을 올겨울 다시 내걸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 잠에서 깨어 빛바랜 광목 커튼이 정인인 양 마주 앉아 애틋한 사랑 시를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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