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문서: 조선시대말 탄현과 교하지역인 공릉천 하류에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 조성한 제방(보)이다. File:갈현벌판.jpg|400px|섬네일|탄현면 갈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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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금) 23:15 판
조선시대말 탄현과 교하지역인 공릉천 하류에 농지를 개간하기 위해 조성한 제방(보)이다.
개요
조선시대 말 공릉천 하류인 방천 일대의 교하와 탄현 지역에는 왕실이 제방을 막아 농지로 조성한 궁방전이 있었다.
궁방전은 조선시대 왕실의 종친에게 지급하는 토지와 매매 또는 개간으로 취득한 농지로 면세와 더불어 노비에게 각종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궁방전의 관리는 궁방 직속 관원인 궁차를 파견해 관리하거나 궁방전의 관리 청부인인 도장(導掌)을 파견해 관리하였다. 궁방 직속으로 감관(監官), 마름(舍音) 등을 두었다.[1]
보의 위치 변화
조선시대의 보는 과거 산지와 들판이 만나는 변곡점에 주로 축조되었던 제(堤)에서 하천의 보(洑) 위주로 전환되었다. 또한, 보의 위치도 점차 하천의 하류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18세기 후반에는 ‘개보(開洑)의 시기’로 평해질 정도로 축보 기술이 발달했다.
16세기 이후 저지대 개간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관개시설의 중심 이동 및 입지 변화가 일어났다. 저지대 개간에는 관개시설 뿐만 아니라, 하천 또는 조수(潮水)의 범람에 대비한 방수시설 등 복합적인 수리시설의 설치가 필요했다. 17~18세기 신전(新田) 개간의 확대와 경영 형태는 축보(築洑), 축언(築堰)과 결합되어 논 면적을 확대하는 데 이용되었다.
궁방전의 광범위한 분포는 조수와 내수(內水)를 차단하기 위한 축언(築堰)과 함께 관개수를 공급하기 위한 축보(築洑) 및 수로(水路)의 개설을 농경지 면적을 확대해 나갔다. 구한말에는 공릉천과 임진강 지류인 탄포천 하류에는 궁방 소유의 보가 여러 개 축조됐다.
보의 설치
보는 매년 봄과 가을, 조수 간만의 차가 작은 시기에 몽리구역 사람들이 8m 높이의 흙제방을 쌓았다.
방천보는 높이 약 8m, 길이는 하천폭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반적으로 150m 이상, 아래 폭은 약 30m, 위 폭은 6~7m 정도였다. 주변 개흙으로 보를 쌓았으며, 매년 조수 간만의 차가 작은 약 10일간 진행했다. 사리 전에 완공되지 않으면 밀물에 의해 허물어지는 위험이 있었다.
흙을 이용하여 제방 형태로 쌓는 것으로 일부 구간은 물이 드나들도록 터놓은 후에 보를 쌓았고 제방이 완성된 후에 막는 방법을 이용했다.
공사에 참여하는 인력에 대하여는 보주(洑主)가 품값을 주고 인력을 고용했는데, 하루 약 200~300명, 전체 작업 기간 약 3,000명이 동원되다. 노임은 수세(水稅)로 충당되었으며, 두락당 벼 2두를 납부했다.
규모가 큰 제방의 경우 조수에 따라 정기적으로 쌓고 허물었지만, 방천보는 매년 축조 공사를 반복했다. 당시 생태적, 기술적 조건에서 이 방법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영천수리조합이 결성되고 순차적으로 수문을 증설하면서 상설 시설로 교체되었다.
보의 이용
가을철에 하천을 막아 보를 축조해 겨우내 논에 물을 가두어 저수지로 이용했고 여름철에는 교량 역할을 했다 . 저수지의 물은 높은 지대부터 순차적으로 공급하여 모내기에 이용했다.
보의 위치
교하 지역
교하 지역에서는 영친왕궁이 방천 일대의 수리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보를 축조하고 매매한 것으로 교하군소재장토도서문적에 나타난다.
보 축조를 기록한 문서들은 영친왕궁에서 보를 축조하기 이전 방천 일대의 수리 상황과 보 위치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1906년과 1907년의 수세기는 해당 지역의 수세징수책과 국유지조사서초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영친왕궁에서 활발한 수리 시설 관리 및 조정이 이루어 것으로 볼 수 있다.
갈현평 지역
갈현평 지역에서는 영친왕궁이 1901년에 갈현평에 위치한 갈방축평보와 갈현리하평보를 포함하여 두 개의 보를 축조하고, 이듬해에 이 보들을 매매한 것이다.
이 지역의 보는 현재 위치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문서 기록과 현존하는 지명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이들이 방천 북쪽의 두 다른 지류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방천 지역
방천 지역에서는 영친왕궁보가 방천 본류에 축조되었으며, 궁방전 폐지 후 방천보로 이어진 것이다.
방천보는 다른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주로 능거리보 또는 영천보로 불렸다. 이 보는 1908년에 홍순모에 의해 창축되었고 1911년에 박창훈이 매입했다. 방천보의 위치는 영친왕궁 보가 있던 자리에서 하류로 약간 이동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보가 방천 일대와 그 하류 지역의 농지에 관개수를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영친왕궁에서 기존의 보를 매입한 것은 새로운 방천보에 의해 기존 보의 몽리구역이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 과정에서 영친왕궁은 기존 보 소유주들에게 수세권 소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한 것으로 보인다.
청룡두천 지역
청룡두천 지역에서는 방천보와 병행하여 중요한 수리 시설이 있었으며, 방천보보다 하류에서 방천과 합류하는 청룡두천에 연다메보라고 불리는 중보가 있었던 것이다. 연다메보는 방천보 하류 지역에 관개수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보조 시설로 축조된 것이다.
""위치 추정 방천지역의 설치된 보의 추정 위치는 관련 기록을 참조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파주위키가 추정한 것으로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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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 강윤원, 교하 영천보와 박필훈, 최봉현에 대한 고찰, 2023년 파주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