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곡리 거지무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3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1970년대 소금장수 거지가 묻혔던 파주읍 부곡리 산 49-16번지 부근의 묘지로 2020년대 수도권 제2외곽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
1970년대 소금장사를 하던 거지가 묻혔던 파주읍 부곡리에 있는 묘지로 2020년대 수도권 제2외곽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File:pk부곡리거지무덤.png|400px|섬네일|미디어자료]]
 
[[File:pk부곡리거지무덤.png|400px|섬네일|미디어자료]]
  
6번째 줄: 6번째 줄:
 
조선행은 금촌읍 아동리 연자방앗간에서 두 자녀와 함께 소금장수로 생활했다. 1971년 4월, 광탄면 발랑리에서 소금 행상을 마치고 금촌으로 돌아 오다가  백경수가 흐르는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사망했다.
 
조선행은 금촌읍 아동리 연자방앗간에서 두 자녀와 함께 소금장수로 생활했다. 1971년 4월, 광탄면 발랑리에서 소금 행상을 마치고 금촌으로 돌아 오다가  백경수가 흐르는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사망했다.
  
소식을 들은 수십 명의 거지들이 모여 사망 현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는 거지 공동체의 상부상조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
소식을 들은 수십 명의 거지들이 모여 사망 현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는 거지 공동체의 상부상조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행의 자녀들은 성공적인 삶을 이루었다. 장남 조장원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차남 조창원은 미국에서 사업가가 되었다. 형제는 아버지의 묘역 7,000평을 매입해 와복형국(蛙伏形局, 개구리가 엎드린 형태)으로 조성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행의 자녀들은 성공적인 삶을 이루었다. 장남 조장원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차남 조창원은 미국에서 사업가가 되었다. 형제는 아버지의 묘역 7,000평을 매입해 와복형국(蛙伏形局, 개구리가 엎드린 형태)으로 조성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12번째 줄: 12번째 줄:
 
==무덤 위치==
 
==무덤 위치==
 
[[File:pk거지무덤 위치.png|400px|섬네일|추정위치]]
 
[[File:pk거지무덤 위치.png|400px|섬네일|추정위치]]
주민에 따르면 거지무덤의 위치는 소금을 팔았던 광탄면 발랑리 벽초지수목원 근처의 마을과  4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부곡3리 마을 안쪽 산이라고 한다. 다만, 경기도 의주길 안내판은 마을에서 파주-부곡간 도로 고개길에서 북쪽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
주민에 따르면 거지무덤의 위치는 파주읍 부곡리 산 49-16번지 부근으로 소금을 팔았던 광탄면 발랑리 벽초지수목원 근처의 마을과  4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한다. 다만, 경기도 의주길 안내판은 마을에서 파주-부곡간 도로 고개길에서 북쪽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시대 배경==
 
==시대 배경==

2025년 1월 24일 (금) 14:24 기준 최신판

1970년대 소금장사를 하던 거지가 묻혔던 파주읍 부곡리에 있는 묘지로 2020년대 수도권 제2외곽고속도로 건설로 인해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디어자료

무덤 유래

금촌읍 아동리(현 안산말)의 연자방앗간에는 수십 명의 거지가 정착했다. 이들은 겨울에는 볏짚으로 이엉을 만들어 추위를 피했고, 여름에는 모기를 피해 야외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잠을 잔다. 조선행은 금촌읍 아동리 연자방앗간에서 두 자녀와 함께 소금장수로 생활했다. 1971년 4월, 광탄면 발랑리에서 소금 행상을 마치고 금촌으로 돌아 오다가 백경수가 흐르는 길가에서 잠들었다가 사망했다.

소식을 들은 수십 명의 거지들이 모여 사망 현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이는 거지 공동체의 상부상조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행의 자녀들은 성공적인 삶을 이루었다. 장남 조장원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천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차남 조창원은 미국에서 사업가가 되었다. 형제는 아버지의 묘역 7,000평을 매입해 와복형국(蛙伏形局, 개구리가 엎드린 형태)으로 조성하고 매년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무덤 위치

추정위치

주민에 따르면 거지무덤의 위치는 파주읍 부곡리 산 49-16번지 부근으로 소금을 팔았던 광탄면 발랑리 벽초지수목원 근처의 마을과 4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한다. 다만, 경기도 의주길 안내판은 마을에서 파주-부곡간 도로 고개길에서 북쪽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시대 배경

1900년부터 1970년까지 한국은 일제강점기, 해방, 6.25전쟁을 거치며 극심한 빈곤을 겪었다. 매년 반복되는 홍수와 흉년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리밥, 시레기죽, 피삼죽 등으로 연명했다. 이 시기에 집을 잃은 사람들은 남사당패, 각설이, 돌중이 되어 전국을 떠돌았다.

거지 공동체는 연령대별로 역할을 나누어 경제활동을 했다. 어린 거지들은 아침저녁으로 깡통을 들고 각 가정을 돌며 밥을 구걸했다. 청장년층은 지팡이를 짚거나 병신 행세를 하며 시장에서 각설이 타령으로 구걸했다. 50-60대 노년층은 옹기장수나 소금장수로 일했다. 모든 수입은 왕초거지에게 전달되어 공동 저축되었다.

여론 여담

명당과 후손

거지무덤은 파주문화원 홈페이지 전설편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사이트에도 많이 소개되기도 한다. 지역 주민들이 많이 알고 있고 기록에 남아 있다는 것은 전설이기 보다는 사실적인 스토리로 보인다.

최근 경기도는 경기옛길 중 의주길을 소개하면서 파주읍 부곡3리 부근에 안내판을 설치했다.안내판에는 와복형국의 명당자리에 조선행의 무덤을 만들게된 경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거지무덤은 한국 근현대사의 빈곤 속에서도 인간적인 공동체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신분적 특성으로 인해 이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를 꺼리겠지만 외곽순환고속도로에 편입되어 이전된 것은 후손에게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2025년 1월 23일 (목) 20:33 (KST)~

미디어 자료


관련 정보

링크 모음

가볼만한곳


더보기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