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각
광탄면 출신으로 3.1운동 때 광탄과 봉일천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개요
심상각(沈相恪)은 1888.12.10일 김포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청송 호는 우산(又山)으로 심정택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광탄면 신산리 58번지이고 1963.9.7일 사망했다. 광탄면 신산리에 생가가 있으며 현재는 손자인 심재만이 거주하고 있다
심상각은 만세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약 10년 후 국내로 돌아와 신간회에 가입하고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했다..
정부는 1977년 대통령표창과 함께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생애 기록
토지소유
1913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토지대장에 따르면 광탄면 신산리 지역에만 심상각 개인 또는 심경섭과 공유지분으로 전답 17,238평을 소유하고 있었다. [1]
토지소유 목록 보기
- 신산리 144 전 304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147 답 546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187 전 80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28 전 1,727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15 전 716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25 전 250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27 답 137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33 전 61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19 전 197펼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12 전 168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03 전 2,182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01-1 전 1,152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01-2 답 380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04 답 181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05 답 975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338 전 216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294 전 1,003평 / 심상각, 심경섭 공유
- 신산리 81 전 199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39 전 155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25 전 946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17전 656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07 전 1,997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267 전 64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93 답 105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95 답 372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96답 87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84 전 72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82-1 답 347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82-2 전 277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22 답 486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21 전 331평 / 심상각 단독 소유
- 신산리 159 답 869평 / 심상각 단독 소유
임야 대부 취득
1917년(대정6년)에는 광탄면 신산리 시곡 [2] 33번지의 산지 0.4704정 (1,400여평,4,600㎥ )을 조선총독부로부터 대부 받았다. [3]
대부 토지는 현재 신산초등학교 인근 산지로 보인다.
1919년 만세운동
광탄면 시위
1919.3.27일 광탄면 발랑리에서 동네사람 수백 명이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는 주동 인물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부락민이 자연스럽게 결집하여 이루어졌다.
다음날인 28일에도 면사무소 앞에서 계속 시위를 전해하였다. 이후 시위 군중들은 조리면 봉일천리까지 행진하여 봉일천 장날에 모인 군중들과 합세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로 광탄면(廣嘆面) 발랑리(發郞里)의 조무쇠(曺茂釗)·이인옥(李仁玉)·남동민(南東敏)·정천화(鄭天和)·정갑석(鄭甲石)·이기하(李起河)·정봉화(鄭奉和)·강흥문(康興文) 등 8명이 체포되어 각각 징역 8월의 형을 받았다. 광탄면의 시위는 부락민이 자연발생적으로 세를 형성하여 진행하였다는 특징이 있으며 그들의 대다수인 농민들이 주축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겠다. [4]
조리면 시위
봉일천 장날의 만세사건은 심상각의 주도하에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이근영, 이종구, 유영 등이 주동이 되어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대표 19명이 모의하여 군내는 물론 고양군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의 시위를 3월28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광탄면 등지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봉일천 시장으로 몰려와 그곳에 있던 1,000여 명의 군중과 합세하여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와중에 시위 군중들이 봉일천 주재소를 공격하자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발포, 광탄면에 사는 박원선(朴元善) 등 6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 당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군내애서 전개 되었던 3.1운동 중 가장 대규모적이었고 치열한 양태를 나타내었다. [5]
상해 망명
1919년 만세시위 운동후 심상익은 박찬익과 함께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1934.4월에 귀국했다. [6]
광탄 사립보통학교 설립
상해 망명후 1934년 귀국하여 광탄사립보통학교 설립하여 교장을 역임했다. [7]
신산초교 부지 기증
광탄면 신산초등학교[8] 부지 중 일부를 학교용지를 기증 했다. [9]
봉루주조 양조장 운영
상해 망명 귀국후 1937.10.15일 당시 주내면 파주리 429-5번지에 봉루주조 (鳳棲酒造 合名)회사를 설립 했다. [10]. 이 회사는 합명회사로서 심상각은 대표사원으로 자본금 2만원 중 5천원, 사원인 유재형 (柳在衡), 안병철(安秉哲), 이정하(李貞夏)가 각각 5천원씩 출자했다.
봉루주조의 대표인 심상각의 당시 주소는 광탄면 신산리 58번지로 관보에 등록됐다. [11]
일제 감정기 이전에는 집안마다 고유하게 가양주를 빚어 내거나 주막에서 빚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등록된 업체만 술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술의 생산을 통제하고 주세를 재정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가양주나 소규모 주조는 밀주로 불법화되고 양조업과 판매업이 분리되어 양조산업과 주류 판매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12]
독립유공자 지정
국가보훈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공적개요
1919.3.27 파주군 광탄면에서 5,00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시위하고 중국 상해로 도항하여 임정 요인인 동향의 박찬익의 협조를 받으며 임정에 참여하여 요원으로 활동하고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상해방면의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사실이 확인된다.
공훈록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하고,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후진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공적조서
- 유공자명:: 심상각(한자) 沈相恪
- 호적명 : 이명
- 생존여부 : 사망
- 성별 : 남
- 생년월일 : (양)1888년 12월 10일
- 사망년월일 : (양)1963년 09월 07일
- 본적 : 경기도 파주 京畿 坡州 廣灘 新山 58
- 독립운동당시 주소 : 京畿 坡州 廣灘 新山 58, 中國 上海
- 운동계열 3.1운동 소속 및 지위 : 臨政 同濟社會員
- 독립운동기간 15년 활동지역 : 坡州, 中國 上海
- 수형년수 : -
- 복역년수 : -
- 추천훈격 : 애국장
- 사정훈격 : 애국장
- 공적개요
- 1919.3.27 坡州郡 廣灘面에서 5,00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서 시위하고 中國 上海로 渡航하여 臨政要人인 同鄕의 朴贊翊의 협조를 받으며 臨政에 참여하여 요원으로 활동하고 申圭植이 조직한 同濟社에 가입하여 上海方面의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전개하는 등 15년간에 걸친 활동공적이 인정되므로 建國勳章 愛國章에 해당하는 분으로 사료됨
여론 여담
광탄 사립보통학교 설립
심상각 지사의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 시 문산여자종합고등학교 김민태 교장은 본인이 사립 광탄보통학교 5학년을 수료하였다는 확인서를 발급했다. 이와 함께 확인서에는 파주군에서 기미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여 사립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1917년생인 김민태 전 문산여자종합고등학교장은 1924년과 1925년에 사립 광탄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주내읍에 있는 파주초등학교에서 졸업했다고 최근에 말했다.
김민태 전 교장이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 시 본인이 광탄 사립보통학교 5학년을 수료 했다는 것은 착오로 보이며, 당시 신산보통학교는 1926년 1월 22일 4년제로 인가되고 1926년 4월 7일 정식으로 개교됐다. 따라서 광탄 사립보통학교는 폐교된 것으로 보인다.
심상각이 1919년 만세 시위 후 상해로 망명하고 1934년에 귀국하였으므로 광탄 사립보통학교는 1919년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설립 시기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이 발표되면서 4년제 학제가 도입 된 것으로 보아 광탄 사립보통학교는 1911년 이후부터 1919년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학교와 관련하여 1921년 6월 25일자 매일신보 기사의 "7월부터 학계를 설립하여 교육자금에 충당하기로 결정했다'라는 내용이 학교를 설립한다는 취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참고로 당시 신문 기사에서는 "파주군 광탄면에서 4월 1일부터 융화회를 설립한 후 교육부, 서무부, 운동부를 설치했다. 면내 서당 개량을 위시하여 일반 면민의 산업에 이르기까지 대개혁을 할 것이다. 7월부터 학계를 설립하여 교육 자금에 충당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광탄 사립보통학교에 관한 기록이 별도로 발견되지 않아 설립과 운영 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심상각이 1919년 독립만세운동 후 망명하고 1934년에 귀국한 것으로 보아 광탄 사립보통학교의 설립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paki 2024년 6월 1일 (토) 19:2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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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 국가기록원 지적아카이브, https://theme.archives.go.kr/next/acreage/viewCadastreDetail.do?packid=0000087988&docid=&mngno=CJD0002438&type=10&want=1&formType=keyword&rtURL=%2facreage%2flistKeywordTotalSearch.do%3fkeyword%3d%25EA%25B4%2591%25ED%2583%2584%25EB%25A9%25B4%2b%25EC%258B%25A0%25EC%2582%25B0%25EB%25A6%25AC^imageField.x%3d0^imageField.y%3d0^tp_id%3d12^tp_id%3d13^tp_id%3d10^tp_id%3d11^start_year%3d^end_year%3d
- ↑ 계곡이라는 말
- ↑ 1917.6.2일(대정6년) 조선총독부관보
- ↑ 파주군지
- ↑ 파주군지 상권 499쪽,1995 발간
- ↑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시 확인서, 확인자 1987년 윤보선
- ↑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서, 확인서 작성 : 문산여자종합고등학교 교장 김민재
- ↑ 신산보통학교 1926.4.7일 개교
- ↑ 독립유공자 지정 신청서 , 확인서 작성 : 1988년 파주군 교육청
- ↑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1939년판)
- ↑ 소화13년(1938년) 관보
-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 자료 제공 : 심상각의 손자 심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