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현면 성동리 서쪽 임진강 하류에 위치했던 섬이다.
개요
임진강 하류에 존재했던 하중도로 1760년대 제작된 고지도에 '일미도(一眉島)라고 표기되어 있다.
일미도는 강물의 유속이 느려지거나 유로가 바뀌면서 퇴적물이 쌓여 형성되는 하중도로 한강 여의도 면적보다 2.2배 정도 더 크다.
1791년 조선시대 공문서에 의하면 일미도를 궁중소유로 하여 채소를 공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00년대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지 않는다.
현재 수면 아래로 잠겨 있어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일부 항공지도에서는 섬의 윤곽이 나타난다.
위치
일미도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탄현면 성동리와 북한의 관산반도 사이에 위치하고 면적은 6.36 ㎢로 길이 5km, 폭 1.5km이다. 화석정 인근에 있는 초평도보다 3.6배나 크고 여의도 면적에 비해서는 2.2배 규모이다 .
1700년경에 제작된 '팔도군현지도'와 '조선지도'에는 일미도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부분에 표기된 반면에 '어지도'와 '해동지도'에는 좀더 상류에 표기되어 있다. 반면에 최근 카카오맵이나 구글어스에서 제공하는 지도에는 하류 부분에 윤곽이 나타난다.
신동국여지승람 제11권 경기조 교하현편에 일미도는 교하현 북쪽 10리에 위치하고 물이 불으면 잠긴다 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성
하중도는 하천의 유량과 유속에 따라 쉽게 없어지거나 생겨난다. 대부분 하천 유수가 구불구불 흐르다가 속도가 느려지거나 유로가 바뀌면 퇴적물을 하천에 쌓이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하천 바닥에 퇴적물이 쌓이고 하천 한가운데 섬으로 남게 된다.
한국지질자원 연구원의 자료에 의하면 한반도의 서해안은 1500년을 전후에 해수면이 낮아져 대부분 염전이 바다쪽으로 800m 지점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후 1530년대와 1830년대 사이에는 해수면이 0.6m 정도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일미도는 해수면이 낮아진 1500년부터 생성되다가 1700년대 최대 규모의 넓이로 섬이 형성되고 해수면이 점차 상승하면서 1800년대에 수면아래로 잠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일미도보다 상류 20km 정도에 위치한 초평도는 고문헌에 나타나지 않고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다. 초평도가 생성된 것은 1530년대부터 점차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1800년대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
1700년대 제작된 지도나 문헌에 나타나는 일미도는 일관되게 '일미도'로 표기되어 있으나 1724년에 제작된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圖)는 '해암 蟹岩)으로 되어 있다. 해암으로 표기된 것은 임진강 건너 북한의 풍덕에 있던 해암이라는 지명을 오기한 것으로 보고 있다.[1]
일미(一眉)는 하나라는 일(一)과 눈썹의 의미의 미(眉)자를 쓰고 있다. 이 섬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하류 구역으로 강폭이 가장 넓은 곳은 3km 정도이고 나무가 없어 강변에서 수평선으로 보여져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이용
1791년 정조14년 10월3일 일성록 기록에 의하면 교하에 거주하는 이락(李洛)이 일미도의 농사를 본인 소유로 해달라는 상언(상소와는 달리 개인적이 용무를 국왕에게 제출하는 건의서)을 제기했다,
이락은 상언에 일미도 남쪽이 수십년동안 사토가 쌓여 섬과 연결되어 육지가 되어 관청에 허가를 맡아 개간하여 수확했다. 그러나 내수사 관리인들이 기존 왕실토지와 연결된 농토여서 왕실농토 로 강제 소유했다고 반환을 요청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규장각 일성록]
왕실에서는 토지와 노비를 내수사에서 관리하였고 왕실의 경비와 식량이나 채소 공급원으로 이용했다. 일성록 기록을 보면 파주 지역뿐만 아니라 일미도까지 왕실 소유로하여 경작지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록
월암 구경 / 이건명 한포채집 1권
이건명이 임진강을 여행하면서 일미도와 오두산의 경관을 노래한 시로 제목은 〔舟觀月巖〕이다.
시편에는 일미도를 '한 줄기 눈썹처럼 작은 섬 비껴 있고' 라는 문장과 '오도성 서쪽은 이미 어두워졌네' 라면서 오두산성을 노래했다.
한가한 날 작은 배 띄워 바다 어귀 내려가니 / 暇日扁舟下海門 바다는 운몽을 삼킨 듯 광활하네 / 海天寥闊夢雲呑 비 그친 수면에는 가을 기운 더해지고 / 雨收波面增秋氣 조수 빠진 모래섬엔 물결 자국 드러났네 / 潮縮洲邊露水痕 한 줄기 눈썹처럼 작은 섬 비껴 있고 / 一抹脩眉橫小島 두 갈래 찬 폭포는 신령한 샘과 닿았다 / 雙流寒瀑接靈源 저물녘 배는 순풍을 만나 돌아오는데 / 晩來風轉歸帆穩 오도성 서쪽은 이미 어두워졌네 / 烏道城西已夕昏
교하 이락의 상언
“교하(交河)의 유학 이락(李洛)의 상언(상소와는 달리 개인적이 용무를 국왕에게 건의하는 내용)에, ‘제가 사는 고을인 일미도(一眉島) 남쪽이 수십 년 동안 사토(沙土)가 메워지고 쌓인 결과 섬과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입안(立案, 관청에서 발급하는 확인서)을 만들어 내고 개간하여 수확을 하였는데 내수사의 도장(導掌,왕실 토지 관리인)들이 내수사 답결(畓結)과 경계가 이어졌다면서 해마다 문제를 일으켰습니다.때문에 정계(定界)를 측량하여 수기(手記)를 얻어 내고 입지(立旨)를 만들었는데 재작년에 모리배(부당한 방법으로 사익을 취득하는 자)가 사포서(司圃署, 왕실의 농토를 관리하는 부서에 청탁하여 모두 빼앗고자 도모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본서에서 반분(半分)하는 뜻으로 입안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추수를 한 뒤에 박창득(朴昌得)이란 자가 내수사 도장이라고 하면서 제멋대로 강제로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먼저 관에 고하니 본관에서 반분하는 것으로 결정해 주었고, 도백(현재의 도지사)은 비변사 공문(公文)이 있으니 그동안의 문권(文券) 50여 장(張)을 모두 소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엄하게 사실을 조사하여 이것이 과연 본사(本司)에 속한다면 실로 감히 원통함을 호소할 수 없겠지만 만일 도장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라면 도로 내주소서.’ 하였습니다.
비국(비변사)에서 보낸 감결(甘結, 행정명령 공문서)을 가져다 살펴보니, 내수사에 이속(移屬,소속을 옮김)한 일은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에 있었고 이가(李哥)가 입안한 일은 정유년(1777)에 있었으니 주객이 저절로 판가름 났습니다.
그리고 사포서(궁궐 농토 관리기관)의 문적을 상고해 보니, 처음에 통(筒)을 수축하려다가 곧 다시 그만둔 것은 내수사의 소속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이가가 원통함을 호소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관에서 결정해 준 지 1년이 지났는데 전적으로 사실을 숨기고 외람되게 성상을 번거롭게 하였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들어주지 말고 본도로 하여금 엄하게 징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성록, 정조 14년 경술 10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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