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진

정태진(丁泰鎭,1903.7.25음~1952.11.2일)은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을 편찬하다가 일제에서 징역2년형을 치루었던 한글학자로 1903.7.25일 당시 교하군 아동면 금릉리 40번지에서 출생했다.

석인 정태진 선생

생애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석인(石人). 경기도 파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규원이며, 어머니는 죽산박씨이다.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나 1917. 4월 서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1.3월 4년제를 졸업했다. 1918. 3월 안동권씨인 정옥과 혼인하였다.

1925.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함경남도 함흥에 있는 영생고등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27. 5월 미국으로 유학하여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31년 다시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학과 과정을 마친 다음, 1931.9월 돌아와 영생고등여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1941. 6월 영생고등여학교를 떠나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의 일을 맡았다.

1942. 9월에 이 학교 여학생의 일기장에서 발견된 한글교육 사실이 알려져 이른바 '한글어학회' 사건으로 확대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 8월 광복과 더불어 조선어학회로 돌아와 『조선말큰사전』 편찬을 다시 시작하는 한편, 연희대학·중앙대학·홍익대학·동국대학 등에서 국어학 강의를 맡았다.

 
조선말 큰사전, 서울역 일제 압수물 창고, 한겨레신문

1949년 한글학회 이사로 피선되었고 《조선말 큰사전》이 셋째 권까지 출간될 즈음인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선생은 고향에서 겨우 목숨을 보존하고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해 곤궁한 생활을 하였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선생은 큰사전을 마무리하기 위해 전쟁 중인 1952년 5월 서울로 혼자 올라와 사전 편찬 작업을 계속했다.

1952.10.28일 원고를 서울신문사에 넘기고 식량 조달을 위해 군용트럭으로 파주에 오다가 차량이 전복하여 1952.11월 사망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받았다. 《정태진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있으며, 2001년 12월 21일 파주시의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사상과 활동

1948.3.20일 일본의 오사카 학무국이 일본내 교육기관에서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자 1948.4.1 조선중앙일보에 항의하는 글을 올렸다.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 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 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중략)

동포여! 우리가 뭉치어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킬 때는 온 것이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혼을 영원히 지키어 우리의 만대 자손에게 깨끗하게 전하여 줄 우리의 보물을 저 강도 왜적에게 다시금 백주에 빼앗기고 짓밟히게 하지 말자!”

정태진 선생 기념관

파주시 중앙도서관 옆 쇄재로 33(금촌동 995번지)에 한옥으로 된 '정태진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정태진 선생은 당시 금능리 출신으로 금촌2지구 택지개발 이전 1997년까지는 생가가 있었다. 당시 가족의 요청으로 생가의 보존을 요청했지만 세멘트와 기와로 지붕개량되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었다. 또한 대상지가 7m 이상 매립하는 지역에 포함되어 있어 보존이 불가했다.

파주시는 생가의 보존이 어렵자 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최대한 생가 원형을 보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념관은 후손들의 자부담 1억원과 국비 1억3천만원, 시비 1억원 등 총 3억3천만원으로 2003. 8월 ∼ 2004. 6. 17일까지 안채 63.5㎡, 문간채 45.73㎡, 주변 담장과 조경 등 공사를 완료했다.

2005. 5월에 사업비 3천8백만원으로 전시물 설치공사를 실시하여 액자 40점과 한글사전, 한글학회 간행물 등 책자 41점, 기타 병풍, 작은 책상, 뒤주, 솥, 항아리, 절구 등 생활용품을 전시했다. [1]

기념관에서 공원입구로 올라 가는 길목에는 정태진 선생의 문학비가 있다.

한 생각
                              -정태진-

어버이 주신 입 겨레에게 받은 붓을
헛되이야 쓰오리만 어이 거저 두오리까?
무거운 임의 은혜를 못 갚을까 두려워.
 
우리말 크나큰 홰에 한글의 불을 다려
백두산 상상봉에 높이높이 세우고자
배달의 넓은 들 위에 고루고루 비추리.
 
우리말 크나큰 배에 한글의 돛을 달고
먼 먼 바다 밖에 두루두루 다니고자
고려의 귀한 보배를 온누리에 전하리.
1952. 2. 14.

   ]  ]
기념관 전경 / 기념관 입구 / 중앙도서관에서 본 기념관

금속활자 '큰사전 복원 시연회'

한글 반포 574주년을 맞은 2020.10.9일 일제 탄압에도 끝까지 한글을 지켜낸 석인 정태진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큰사전 복원 시연회>가 활판인쇄박물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한국전쟁 시기 활판인쇄공들을 비롯해 구순에 가까운 원로 인쇄장인들이 참여해 주조기로 다시 금속활자를 만들고, 문선 조판해서 <큰사전>의 일부를 복원했다.

정태진 선생 68주기 기념 전시회

2020.11.15일 파주 출판도시 아시아문화 정보센터에서 정태진 선생의 68주기를 맞아 정태진과 ‘큰사전’ 戰時(전시) 활판인쇄관 전시회가 열렸다. 이 행사는 경기도의 ‘문화예술일제잔재청산’ 사업의 일환으로 2020.12. 31일까지 열렸다.

전시장에는 정태진 선생이 4권 조판작업까지 진행한 ‘큰사전’ 6권 전질 초판본과 소설가 방현석 교수(중앙대)가 집필한 ‘한글전사 정태진’ 등 관련 책자들도 함께 전시됐다. 전시회 개관에 맞춰 정태진 선생을 추모하는 가족백일장 대회와 가족타자기 대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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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1. 2010.11.10일 파주시의회 시정질문답변, 질문 의원 한기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