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협정은 진서면 널문리에 있는 판문점에서 1953.7.27일 체결했고 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인 현재의 공동경비구역으로 이전했다.

2010년 판문점, 사진 파주위키

지명유래

원래 휴전협정을 체결한 판문점(板門店)은 서울과 개성을 잇는 널문리 마을에 있으며 지명유래는 여러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지명유래중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때 다리가 낡아 다리 위에 문짝을 깔아서 건너게 했다고 해서 '널문교'라는 이름이 생겼고 마을 이름도 널문리로 됐다.

또한 마을에 널빤지로 만든 대문이 많았다는 것과 함께 지형이 넓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넓은리 → 널븐리 → 널문리로 변천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와함께 휴전회담 당사자였던 중국측이 널문리 한자 표기를 '판문점'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지명이 굳어 진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회담장소가 널문리로 결정되기 이전부터 판문점(Panmunjom)이라는 명칭이 회담 기록에 나타나고 1883년 '연원직지'에 판문점(板門店)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한국전쟁 이전 조선시대부터 널문리 길목에 있던 주막마을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있다.

휴전협정 장소

판문점 위치 변경

6.25전쟁 정전 [1] 회담은 1951.7.10일 개성 송악산 기슭의 래봉장 [2] 이라는 요정에서 처음 시작됐다. 이 지역은 공산군이 장악한 지역으로 공산군 측은 승전이라는 장소로 이용했다.

공산군 측은 래봉장이 남향의 건물이라는 점을 이용해 북쪽에는 공산군 측이 자리하고 남쪽 입구에는 유엔군 측을 배치했다. 회담장 내부의 의자도 유엔군 측이 공산측보다 낮은 것으로 하고 회담장으로 이동하는 차량에 백기를 달아 운행 하는 등 대외적으로 유엔군 대표단을 항복사절단으로 보이게 하려는 전술을 폈다. [3]

유엔군 대표단은 정전회담 장소가 공산측 지역에 위치하고 개성 주민과 마주치는 등 중립지대 규정을 위반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하자 회담장소 이전을 제안했다. 공산군 측은 개성 시가지를 경유하지 않는 당시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발송리 사이의 널문리를 제안하면서 1차 이전하게 됐다.

널문리는 개성과 서울을 잇는 도로 주변으로 초가집 4채가 남아 있었고 정전회담은 마을 맞은편에 군용 천막을 설치해 1951.10.월부터 속개 됐다. 정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총·포격은 금지되고 구역 내에서 이동이 자유로운 '공동경비구역'으로 설정했다.

최초 정전협정 시작된지 2년여이 지난 1953.6.9일부터 정전 협상이 마무리되자 협정 조인을 위해 200여평의 목조건물을 신축하고 1953.7.27일 정식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1953.7. 22일 군사정전위원회 준비회의에서는 공산군 측이 협정을 조인하는 판문점 건물을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로 사용하자고 주장했지만 유엔군 측은 군정위 회의실을 정전협정에 따라 군사분계선 위에 새로 설치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휴전 협정후 군사정전위원회는 1953년 10월 제25차 본희의에서 북한군 공병 중좌가 제시하고 미국 공병 중령이 동의한 선적리의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공동경비구역을 설정하기로 합의하면서 현재 위치로 2차 이전하게 됐다.

북한은 널문리의 옛 판문점을 "평화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정전협정 조인시 유엔군 항의로 가려졌던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을 지붕으로 옮겨 놓았다.--paki 2024년 5월 5일 (일) 20:34 (KST)

공동경비구역

공동경비구역 배치도

공동경비구역은 동서 800m, 남북 400m에 달하는 장방형으로 널문리보다 1.5km정도 남쪽에 위치하며 당시 포로교환 업무를 맡았던 중립국 인도군의 막사와 포로교환 장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이전된 공동경비구역은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언덕이, 남쪽으로는 평지가 자리한 지세로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승전국이 산을 뒤로 등진 배산(背山)의 남쪽으로 향하고 패전국이 산을 앞으로 자리하는 임산(臨山)의 북향을 취한 결과가 됐다. 결국 새 판문점 위치는 북측에게 시계(視界) 및 사계(射界) 확보뿐 아니라 유리한 상징 효과를 갖는 위치가 됐다. [4]

공동경비구역의 정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軍事停戰委員會板門店共同警備區域)', 영어로는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Joint Security Area - Pan Mun Jŏm'라고 한다. 이를 통상적으로는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 또는 '판문점'이라고 부른다. 판문점이라 불리는 공동경비구역은 전체 부지가 15만평으로 그 중간은 군사분계선으로 나누어지며 24동의 건물이 분산되어 있다.

이 구역 중심에는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중립국감독위원회회의실 등 7개의 단층 건물이 동서로 늘어서 있다. 공동경비구역 남쪽에 자리잡은 '자유의 집'은 1965.9월에 준공된 팔각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1989.12월 준공한 3층의 석조 건물 '평화의 집'은 남북관계가 활성화 될 것을 기대하고 신축했다.

휴전 초기에는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경비와 관리를 공동으로 운영했으나,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분리했다.

2018년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비무장화 및 자유왕래에 합의하고 JSA 감시초소 및 각종 화기가 상호 검증 아래 철수되면서 비무장화 조치가 완료됐다. 현재는 자유왕래를 위한 협의를 진행 중에 있다


주변 시설

공동경비구역 평화의 집 서쪽 사천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옛 '판문교'로 군사분계선이 중간 부분을 통과한다. 정전협정 조인 후 이 다리를 통해 포로들이 교환되었고 이 다리를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하여 '돌아 오지 않는 다리'로 불렀다.

유엔군은 도끼만행 이후 이다리의 통행을 금지했고 북한은 통일각 부근 사천에 콘크리트 다리를 신설했다. 유엔군은 북한이 이 다리를 72시간 만에 완성하여 '72시간 다리'로 명명했다.

운영 관리

판문점 주소 부여

파주시는 2020.12.23일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67년만에 비무장지대(DMZ) 일대 미등록 토지 135필지, 59만2천㎡를 파주시 토지로 회복하면서 판문점에 대한 주소를 부여했다. 판문점 남쪽 지역은 옛 장단군 지역으로 한국전쟁 이전에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로 불리다가 1972년 파주시로 편입됐다. 판문점 북쪽 지역은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판문점리'로 북한의 행정구역이다.

판문점 관광자원화 추진

파주시는 2018년 '판문점 선언'을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판문점을 관광코스화 하기 위해 2020.5월 통일부에 판문점견학 운영권 이전을 요청하였으나 유엔사에서 통일부에 위임하여 불가 통보를 받았다. 아울러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던 건물에 경기도와 정부 주관으로 국제컨밴션센터를 건립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2020.6월에는 판문점관광자원화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완료하고 단계별로 추진하기로 했다. 용역에서는 추진방법으로 1단계 원천스토리 발굴, 2단계 콘텐츠화 대상 선정, 3단계 문화콜라쥬를 통한 스토리텔링, 4단계 콘텐츠네트워크화, 5단계 브랜드·이미지·상품화를 제안했다

판문점관광자원화 기본계획

출입 관리

비무장지대인 판문점은 정전협정 제9항의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얻어 들어가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군인이나 인력이 DMZ 지대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라는 규정에 따라 출입허가를 받아야 한다.

판문점 방문은 공무외에는 견학이라는 목적으로 국내·외국인 모두 가능하다. 그동안 방문자 성격에 따라 통일부, 국방부, 국가정보원으로 나누어 출입을 관리했다. 2021.2월부터는 견학 창구가 통일부로 통합되면서 '판문점견학지원센터'로 일원화 됐다.

판문점 견학은 만8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년1인 1회만 가능하고 방문희망일 1개월 전에 '판문점견학지원센터'로 신청해야한다. 국내 기관 및 단체견학은 온라인 또는 전화로 별도 상담을 해야하고 외국인과 시민권자는 유엔사에서 지정한 여행사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판문점견학지원센터 견학신청 바로가기

관련 정보

링크 모음

파주튜브

판문교 전설

고려 말기, 판문점 인근 한 마을에 살던 촌장의 딸 옥화는 그녀의 미모에 반한 억쇠라는 총각 때문에 곤경에 처하게 된다. 억쇠는 옥화에게 첫눈에 반해 심하게 짝사랑을 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결국 죽고 만다.

억쇠의 죽음 이후, 사천강이 범람하고 판문교가 물에 떠내려가는 등의 괴이한 일들이 발생한다. 옥화는 꿈에서 만난 흑룡의 말에 따라 아버지의 병을 고치고 마을의 다리도 새로 놓게 한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자 날씨가 개고, 옥화가 새 다리를 건널 때, 흑룡이 나타나 그녀를 하늘로 데려간다. 이후 사천강은 홍수가 나지 않고 강폭이 좁아지며, 떠내려가는 다리도 사라진다. [5]--paki 2024년 5월 8일 (수) 21:40 (KST)


사진 자료


주변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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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파주 DMZ를 바라보는 여섯개의 시선(파주시중앙도서관, 2020년 발행)
  • 파주모던타임즈1950-1980(파주시중앙도서관, 2021.5월 발행)
  1. 정전이라는 용어는 1951년 당시부터 사용됐다.
  2. 개성시 고려동 396번지에 위치하며 조선시대부터 요정으로 이용됐다
  3. 정전회담장 개성의 來鳳莊 1651.7.21 동아일보/ SPACE,판문점 시공의 정치학 김재한 한림대교수,https://vmspace.com/report/report_view.html?base_seq=MTg3
  4. SPACE,판문점 시공의 정치학 김재한 한림대교수,https://vmspace.com/report/report_view.html?base_seq=MTg3
  5. 파주문화원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