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리 예술마을/헤이리 조성과 특징

헤이리의 조성 과정과 특성을 1997년~2008년까지 헤이리 예술마을 초대 사무총장이었던 이상李相 문화집단 가갸날 대표가 기고했다.(2020.12.1)

전경

개요

헤이리 예술마을은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지구에 있는 예술인들의 거주와 문화 공간이다. 헤이리는 파주출판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거시설이나 서점 등의 문화시설 설치가 불가하게 되자 별도로 조성한 마을이다.

'헤이리'라는 이름은 인접한 마을에 전해 오는 전래 농요인 '헤이리 소리' 에서 따왔다. 전체 495,000㎡(15만평)의 공간에 미술인, 영화인, 건축가, 음악가 등 4백여명의 예술인들이 작업실, 미술관, 박물관, 갤러리, 주거 공간 등을 만들어 가고있다.

헤이리 로고

헤이리 마을 조성

헤이리는 어떻게 태동하였는가

헤이리 구상은 출판도시를 만드는 도정에서 발아하였다. 낙후된 출판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988년 출판인 조합이 결성됨으로써 시작된 출판도시 추진사업은 오랫동안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다가 1995년 파주시 자유로변에 대상부지를 정함으로써 발빠른 행보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산업단지 형태를 띠게 됨으로써 뜻하지 않은 법률적 제약에 부딪치게 되었다.

주거시설이나 서점을 비롯한 문화시설 도입에 어려움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애초 출판도시를 통해 구현코자 했던 기능의 일부를 다른 곳에서 보완해야 했다.

출판도시 인근 통일동산지구에서 적정부지를 찾아내 마을 건설을 위한 발기모임이 태동한 것은 1997년 3월. 소문은 빨리 번져나갔다.

출판계를 넘어 지근거리에 있는 화가, 도예가, 건축가, 영화인, 문화기획가, 갤러리 등이 참여를 희망해왔다. 이렇게 하여 종합적인 문화예술마을로 그 개념이 확장되었다.

이처럼 헤이리 만들기가 순조로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추진주체들이 출판을 비롯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라는 주체적 조건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문화예술에 대한 우리 사회 전반의 요구가 탄탄한 밑받침을 형성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헤이리 참여자의 면면에서 실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문화예술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대거 가입을 노크해왔는데, 그들의 상당수는 작품을 컬렉션하고 있다든지 혹은 갤러리나 서점 같은 문화시설을 운영하고 싶어하였다. 문화예술에 대한 요구가 우리 사회에 미만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한 트렌드를 읽어내고 구현해낸 것이 바로 헤이리 만들기라 할 수 있다.

나름의 순수한 열정과 문화예술에 대한 열망이 없었다면 헤이리는 초기에 좌초하고 말았을 것이다. 회원조직사업이 순조로이 진행되던 1997년 12월초 IMF사태라는 폭풍을 만났기 때문이다. 거대기업마저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속에서 문화예술마을 건설이라니, 몽상가들의 한가로운 놀음으로 치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헤이리 회원들의 꿈이 소박하나마 구체성을 지닌 것이었고, 그것이 시대정신과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었기에 흔들림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파주 통일동산에 둥지를 틀다

헤이리는 경기도 파주 통일동산지구 내에 위치한다. 헤이리 뒷산에 올라가보면 북녘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점에 주목하여 외국 언론들은 “군사경계선 가까이에 문화예술마을 탄생”(朝日新聞 2003), “아무도 살지 않는 땅에 핀 꽃 한송이-남북한을 가르는 완충지대에 창조성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으려는 계획된 마을이 자라나고 있다”(Financial Times 2006)며 헤이리의 지정학적 위치를 주목하였다.

2001년 헤이리 부지

문화예술의 상대적 유연성과 진보성이 긴장의 땅을 예술의 보금자리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통일동산은 특별법으로 조성된 개발지구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가깝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땅이 매각이 안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버려져 있다시피한 땅의 가치를 발견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헤이리였다.

1998년 7월 한국토지공사와 통일동산내 서화촌부지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6만5천평 부지는 원형지 상태로서 상세계획을 스스로 수립하여야 했다. 거의 단지설계를 마쳐갈 즈음 이웃 경모공원에서 헤이리땅을 굽어보는 부지로 묘역을 확장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우여곡절 끝에 같은 통일동산 내 민속촌 땅으로 부지를 이전하였다.

그리고 참신한 이미지의 이름을 갖기 위해 공모를 통해 ‘헤이리 아트밸리’(나중에 ‘헤이리’로 통일)로 개명하였다. ‘헤이리’는 헤이리가 위치하는 경기도 파주지역의 농요 <헤이리소리>에 착안해 붙여진 이름이다.

헤이리 조성의 특징

헤이리는 기존의 도시 개발과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이와 같은 개발방식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안 커뮤니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뉴어버니즘이나 어반빌리지 등에 의한 도시들이 개발업자들이 주도함으로써 상업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점과도 큰 차이가 있다.

뛰어난 디자인과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아낸 헤이리 건축들은 개별건축 차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을 뿐 아니라, 건축적 랜드스케이프 개념을 통해 헤이리만의 건축풍경을 만들어내었다. 원래의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고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꾀하는 생태적 태도 역시 헤이리 사람들의 자부심이자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마스터플랜 : 중심의 해체

아날로그 문화를 꿈꾸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예술세계를 그렸던 데서 처음부터 헤이리 회원들은 서울로부터의 엑소더스, 탈중심의 가치관을 일정하게 공유하였다.

헤이리 마스터플랜에 대해 자주 등장하는 비판은 기능별 조닝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이리 회원들은 오랜 논의를 통해 그같은 조닝이 헤이리에는 적절치 않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래서 헤이리 안에는 특별한 중심이 없다. 오히려 마을의 한가운데 습지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그것의 연장으로서 비워두는 개념의 광장이 들어서 있다.

도로로 둘러싸여 있는 단지의 특성을 반영해 9군데 진출입로가 만들어졌다. 이 역시 주진출입로 개념의 도입에 의해 특정한 중심이 형성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헤이리 회원들은 이같은 방번론이 헤이리의 주체적 조건에 맞는 민주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우선 헤이리는 서울이라는 중심을 탈피하여 건설되는 공간이다. 그런데 다시 헤이리 안에 중심과 주변으로 분화되는 단지개념이 필요한 것인지 반성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헤이리 안에서 기능이 분리된 유일한 곳으로는 다수의 내방객들에게 자신의 공간이 노출되기를 원하지 않는 창작자들을 위한 게이트하우스 지구가 있을 뿐이다.

건축설계지침: Architectual Landscape

헤이리 건축물 가운데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건축물이 여럿이다. 헤이리는 회원들의 꿈을 실현해줄 건축가를 초빙하면서 헤이리의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건축에 담아낼 건축언어가 젊고 진취적인 건축가’들로 참여 건축가 그룹을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조화로운 건축을 구현하기 위해 건축설계지침을 마련하였다.

건축지침을 마련하고 참여건축가와의 가교 역할을 맡을 건축 코디네이터에는 김종규, 김준성 두 건축가가 위촉되었다.

1년 이상의 작업을 거쳐 2001년 초 선보인 ‘헤이리 건축설계지침’은 250여 면의 방대한 분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론적 틀인 ‘건축적 랜드스케이프’를 구현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각 개별필지에 대한 적용기준까지를 도면화해놓았다.

코디네이터들은 자연환경을 보전하는 방법으로서 인공의 요소들을 한데 모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럼으로써 상대적으로 보존되는 자연의 영역이 넓어지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이렇게 남겨진 부분은 마을의 공원임과 동시에 개인의 넓은 정원이 된다는 것이다.

지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수립된 건축 전략은 크게 먼저 건축적 하부구조를 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다시 건축범위를 규정하는 것으로 하였다. 지침의 엄격성으로 인해 실제 구현될 수 있을지 많은 우려가 있었음에도 건축지침은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생태적 패러다임

토목공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헤이리 회원들은 시공사와 CM사에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는 드러나는 쟁점들을 끝없이 토론하였으며, 검증되지 않은 공사기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연을 보존하고 환경을 덜 훼손하며 미학, 디자인, 경관적으로 전향적인 것이라면 채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헤이리를 개념적으로 ‘생태마을’로 정의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점이 많다. 특히 건축물의 소재와 에너지 시스템 등에서 한계가 있다. 하지만 헤이리 부지 면적의 30%에 이르는 원형의 자연을 그대로 남겨두고, 개별필지의 녹지공간이 절반이 넘도록 하는 한편 담을 없앰으로써 넓은 녹지축이 이어지도록 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마을 한가운데 자연 그대로의 늪지를 보존한 일이며, 마을내 전도로를 블록을 사용해 포장한 점도 생태적 패러다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다.

헤이리의 형성

1단계: 회원모집 및 마스터플랜 수립단계(1997.3~2001.5)

1997년 서화촌건설위원회 발기모임이 태동하면서 회원 모집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회원 모집이었는데, 공동사업이기 때문에 회원모집은 곧 자본을 모으는 일이자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회원 모집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만들어갈 마을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헤이리초대석’이라는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는 토론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국내외 문화탐방 행사를 지속하였다. 1998년 7월 한국토지공사와 통일동산내 부지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어서 단지설계와 건축설계지침 작업에 착수하였다.

2단계: 물리적 환경 조성단계(2001.6~2005.12)

2단계는 헤이리를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조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실시설계를 마치고 2001년 6월 조성공사를 시작하였다. 2002년 5월부터는 순차적으로 개별건축에 착수하였다. 2005년 말까지 104채의 건물이 준공되어 헤이리의 물리적 경관이 얼추 꼴을 갖추었다.

3단계: 문화예술 프로그램 생산단계(2006.1~현재)

3단계의 고객은 외부 관객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애호가들이 헤이리를 방문함으로써 문화적 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이 헤이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2003년부터 헤이리페스티벌이 시작되었으며, 2006년부터는 본격적이고 폭넓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가동되었다. 헤이리 회원들도 개별공간에서 다채로운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헤이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헤이리 회원들은 누구라도 예외없이 문화예술과 관련한 활동을 하여야 한다. 회원의 자격을 문화예술 창작활동에 종사하거나 문화예술 비즈니스를 수행할 사람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도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유기적 관계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볍게 생각해서 그런 원칙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도시는 유기체와 같은 것이어서 일정시점이 지나면 스스로의 논리에 의해 성장 발전해갈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헤이리가 ‘문화예술’적 정체성을 확실히 지니게 될 것이며, 그같은 토대를 기반으로 발전해갈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헤이리를 함께 만들고 그 만들어진 공간에서 삶을 영위해갈 주체를 누구로 하며, 그들이 어떤 책임과 의무를 지도록 할 것인가 하는 원칙과 규칙이 만들어졌다. 장르를 불문하고 창작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당연히 환영되었다. 다음은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 서점 등의 문화시설을 운영할 사람들이었다.

도시가 생명력을 갖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동질적인 집단이라는 측면보다는 문화예술도시로서의 구조가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창작자가 아닌 헤이리 회원들은 자신의 건물공간 60% 이상(주거공간 포함)을 문화예술 용도에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만들어졌다.

한편 헤이리 회원들은 헤이리의 개념을 만들고 마스터플랜이라는 물리적 디자인을 구현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도시계획, 건축, 조경, 환경조형 분야 전문가들을 초빙하고 그들의 조력을 받았지만, 중추적이고 실질적인 개념은 헤이리 회원들의 오랜 토론과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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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리의 꿈

“우리는 서화촌(헤이리의 초기이름)을 한국의 명소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가장 유니크한 문화예술촌으로 만들고자 한다. 서화촌은 우리 혼이 깃든 전통문화유산과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이 경연하고 한데 녹아 새로운 문화를 생산해내는 문화예술의 메카가 될 것이다.

국제적인 내용과 질을 갖춘 페스티벌을 비롯해 연중 다양한 문화이벤트가 끊이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외국의 저명한 문화도시와의 교류 및 결연도 추진될 것이다. 멤버들의 문화의식은 물론이고 그 문화의식을 빛나게 하기 위해 여기에 들어설 건물들도 국내 최고의 건축예술가들을 참여시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건축전시장이 되게 할 것이다.”[1]

헤이리의 비전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초창기의 기록이다. 역동적인 문화예술도시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헤이리 회원들이 작성한 내부 정관에도 “문화예술의 생산, 판매, 전시, 교육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문화예술마을 헤이리 아트밸리를 건설”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헤이리 회원들이 꿈꾼 공간은 처음부터 문화예술이 충만한 작은 도시(micropolis)였다. 창작과 거주에서부터 공연, 전시, 문화상품판매, 교육 등 문화예술의 생산과 소비 전영역이 유기적으로 관계지워지고 소통되는 공간을 목표하였다는 의미이다.

주요 시설

헤이리의 준공건축물들을 분석해보면 전체의 3분의 2 남짓이 두 가지 이상의 복합기능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거주를 하면서 갤러리를 운영한다든지 뮤지엄 안에 부속 카페나 아트숍이 함께 있는 경우다.

헤이리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기능은 작가스튜디오다. 절반 가까이가 작가스튜디오로 분류된다. 미술쪽 인사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영화인, 문인, 음악가, 저술가 등이 작업실을 겸해 헤이리에 거주하고 있다.

방문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30여 곳을 헤아리는 박물관이다. 다양한 주제의 박물관들이 들어서 있으며, 밀집도로는 전세계에 헤이리 같은 곳이 없을 것이다. 미술갤러리는 20관 남짓이 운영되고 있다.

개별 갤러리의 평균면적은 서울 시내 갤러리들에 비하면 큰 편이다. 아쉬운 점은 갤러리의 수효에 비해 운영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을뿐더러, 공동전시 등을 기획하며 가능성을 보이던 갤러리들이 간판을 내리고 만 점이다.

영화 관련시설은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영화촬영소와 마샬아트센터가 있다. 기타 서점 등 책을 소재로 하는 공간, 음악감상실, 기념관, 연극관 등이 들어서 있다. 작가 스튜디오와 일부 갤러리는 교육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예술 프로그램

헤이리내 건축물들의 주기능은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운영이다. 기본적으로는 각 개별공간 단위로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헤이리의 특징은 좁은 공간에 문화시설의 밀집도가 매우 높다는 점이다. 헤이리의 문화시설들은 독자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할 뿐 아니라 공간간의 연대와 협력에 의해 큰 규모의 공동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한다. 이것은 헤이리의 특징이기도 하고 남다른 가능성이기도 하다.

헤이리내의 공동 문화예술 프로그램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헤이리 전체 차원에서 기획하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헤이리판페스티벌이 대표적이다. 둘째, 헤이리 회원공간들의 공동 프로그램이다. 아트로드77 기획전, 헤이리 작가들의 스튜디오를 개방하는 오픈스튜디오와 헤이리 예술캠프 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 외부에서 기획 제안한 프로그램을 헤이리 위원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경우다. 공동 프로그램은 헤이리의 가능성이자 경쟁력이다. 문화예술계의 이슈를 짚어내고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는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헤이리는 이제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화자산의 하나다. 공공성을 높이고 문화예술 창조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키워가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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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1. 서화촌 소식 98. 2(헤이리 공식 간행물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