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자료

개요

한국의 성씨는 2015년 통계청 기준 553개이다. 이 중 파주지역을 본관으로 둔 성씨는 12개본이고 김씨는 6개본, 파평 윤씨, 교하 노씨, 파주 임씨, 평당 서씨, 원평 야씨, 단주 한씨가 각1개본 씩 있다. --pi 2021/11/26

한국 성씨의 유래

성씨란 부계나 모계로 내려오는 친족집단의 대표 이름이며, 본관이란 성씨의 지역 본거지를 말한다. 씨성(氏姓)이나 토성(土姓)의 의미가 성과 본관을 함께 나타내기 때문에 성씨 자체를 이 둘이 합쳐진 의미로도 쓴다.

우리의 성씨는 대부분 중국식을 모방한 한자 성으로 그 역사는 삼국시대 말기로 부터이다. 삼국시대 말기 이전부터 사용하던 고유의 성을 한성화(漢姓化)한 왕실과 성을 사여(賜與)받은 귀족에게만 국한되어 쓰였다. 그러다 고려시대로 들어와 관료층과 양민층에게만 쓰이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천민층에게까지 단계적으로 보급됐다.((여주시사- 성씨와 인물))

파주 성씨의 입향과 정착

파주는 고려 때 수도 개성과, 조선시대 한양과 가까운 곳이라 도성과의 접근이 용이한 지역이다. 조정에 관직이 있을 때에는 도성에서 생활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후에는 파주에 묘역과 위토를 마련하여 후손들이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

이와는 달리 잦은 범람으로 농지로 활용하지 못하던 하천 주변에 보와 둑을 쌓고 개간하여 대규모 농토를 소유하여 농장을 경영하면서 파주지역에 뿌리를 내리기도 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안목, 안원 등이 임진강 유역을 개간하여 농장을 크게 경영하면서 순흥 안씨의 후손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경우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임진강 유역 사목리의 장수 황씨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교하 낙하리의 안동 권씨, 교하 곡릉천 주변 송촌리의 교하노씨와 양천 허씨, 문발리의 경주 김씨, 와동리의 파평 윤씨 등이 있다. 문산천 주변에 능산리 아가뫼마을의 함안 조씨와 내포리의 강릉 김씨, 내포4리의 창녕 성씨, 위전리의 수원 백씨, 도내리의 청송 심씨 등도 번성했다.

농장경영과는 달리 혼인으로 인한 입향의 경우도 있다. 월롱면 일대에 수원 백씨와의 혼인으로 정착한 함안 조씨가 그 예이다. 영월 신씨와의 혼인으로 들어온 창녕 조씨, 그리고 안동 권씨 권근의 집 안과 혼인하여 파주에 입향한 대구 서씨, 우계 성혼 집안의 창녕 성씨와의 혼인으로 정착한 평산 신씨 등이 있다.

왕이 내려준 사패지로 인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는 성씨는 파평 윤 씨, 장수 황씨, 전주 이씨, 밀양 박씨 등이 있으며 정치적 영향으로 인한 입향은 개성 내씨, 청송 심씨, 거창 신씨, 진주 류씨의 경우를 일례로 들 수 있다.

벼슬에서 물러나 적성으로 낙향한 경우는 적성면 구읍리 관골마을의 청주 정씨가 있으며, 그 밖에 관직과 관련하여 파주에 정착하게 된 경우는 임진왜란시 선조가 몽진을 할 때 임금을 호송하다가 적성면 주월리에 정착하게 된 경주 김씨와 가월리 안동 권씨가 있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에서 적성현감으로 왔다가 머물러 뿌리를 내리고 살게 된 적성면 장현리 능성 구씨가 있으며, 조리읍 대원리의 홍해 배씨도 입향조 배용택이 수문장 벼슬을 하게 되어 경상도 봉화에서 올라와 파시조의 묘가 있는 조리읍 오산리에 정착하게 됐다.

조선 중기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각 지역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지역별로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거주하는 자료가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파주지역 본관 성씨인 윤, 야, 노, 염, 김, 서, 한씨 외에도 여러 성씨가 오래전부터 파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성씨별로 거주 현황을 보면 지금의 파평과 봉성지역에는 지智, 윤尹, 방邦, 백(白), 피(皮), 서(徐), 염(廉), 야(夜)의 성씨가 주로 거주했다. 적성지역에는 유(劉), 신(申), 김(金), 노(盧), 崔(최), 현(玄), 조(趙),서(徐),양(梁)의 성씨가 교하 지역에는 노(盧), 김(金), 옥(玉), 박(朴),윤(尹) 전(田)의 성씨가 심악지역에는 이(李), 박(朴), 전(全)의 성씨가, 석천(교하 부근)지역에는 야(夜), 염(廉), 차(車), 호(虎)의 성씨가 거주한 것으로 나탄난다.

파주문화원에서 2020.12월에 조사한 문중별 조사표에 따르면 파주에 본관을 둔 성씨는 6개 성씨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는 별도로 통계청에서 2015년 조사된 인구는 교하 노씨 775명, 파주염씨 505명, 파평 윤씨 318명, 파평 김씨 19명, 교하 김씨 9명, 적성 김씨 8명 정도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파주 본관 성씨 소개

교하 노씨(交河盧氏)

교하 노씨의 시조는 노오(盧塢)이다.

그는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둘째 아들로 신라 말에 아버지를 따라 건너와 교하백(交河 伯)에 봉해졌다. 『교하노씨세보(交河盧氏世譜)』에 의하면 오(塢)의 후손 강필(康弼)이 신라 말 에 기계(杞溪)에 세거하면서 학문이 현달하여 문명을 떨쳤고, 관향을 장산(章山)으로 이관하였다가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통합삼한 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져서 교하(交河)로 복관(復貫)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교하(交河)로 삼고, 강필(康弼)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교하는 경기도 파주시에 속한 지역이다. 고구려 때 천정구현(泉井口縣)·굴화(屈火)·어을매관(於乙買串)이라 하였고, 신라 경덕왕 때 교하군(交河郡)이라 개칭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선에 와서 교하현(交河縣)으로 강등되고 1687년(숙종 13)에 파주군(坡州郡)에 편입되었다가, 1733년(영조 9) 파주군에서 갈리어 교하군으로 승격되었다가1895년(고종 32)에 다시 파주군에 편입, 그 후 한두 번의 변천을 거쳐 파주군 교하면(交河面)이 되었다.

역사인물로는 2세손 안맹(安孟)이 동서면병마사(東西面兵馬使)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영순(永醇)은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후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 영수(潁秀)의 아들 척(頙)은 경녕옹주(慶寧翁主: 평양공 현의딸)와 혼인하고 충목왕(忠穆王) 때 좌정승(左政丞)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창성군(昌城君) 진(稹: 척의 둘째 아들)의 손자 한(閈)은 임금의 장인인 민제(閔霽)의 딸 과 혼인하여 태종(太宗)과 동서지간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명나라 사신의 방자한 횡 포를 저지시켜 명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세종과 성종 대의 명신 사신(思愼)은 돈녕부사(敦寧府事) 물재(物載)의 셋째 아들이며, 상신(相臣) 한(閈)의 손자로 세조 때 익대좌리공신(翊戴左理功臣)으로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성종 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그 밖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친 직(稙), 임진왜란 때 병조참판으로 왕을 호종한 직(稷) 등이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하 노씨는 파주시에 170여 가구 총 7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주에 살고 있는 교하 노씨 공숙공파(恭肅公派)는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경기도관찰사와 한성부윤을 지낸 공숙공 한(閈, 1376~1443)을 파시조(派始祖)로 하며, 영의정을 지내고 『삼국사절 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한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을 파주 입향조(入鄕祖)로 하는 후손들로 맥금동 3호, 금촌 5호, 탄현면 대동리 2호, 만우리 3호, 교하동 송촌과 탄현면 법흥리등에 모두 30호 가량이 살고 있다. 예전에는 교하읍 송촌리 새터골에 80여 호가 살았는데 공릉천 정비사업으로 파주관내로 흩어져 지금은 15호 정도가 살고 있다.

매년 10월 15일 맥금동 산 50 선영 묘역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이 곳에는 교하노씨 150여기의 후손 묘가 모여 있다. 문중 회장은 노성남이다.((파주의 성씨 연구보고서 2020.12월, 파주문화원))

파주 염씨(坡州廉氏)

파주 염씨(坡州廉氏)의 시조는 염형명(廉邢明)이다.

중국 교목세가(喬木世家)의 후손인 그는, 후당(後唐)의 국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신라에 들어와 봉성(峰城)에 자리 잡은 뒤 대사도(大司徒)를 지내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 후 고려 때 후손 한(漢)이 문종 때 동해(東海)에 침입해 온 해구를 격퇴하였고, 북변(北邊)을 침범한 동번족(東蕃族)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병부상서(兵部尙書)·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하였다.

그의 현손(玄孫)으로 전하는 신약(信若)은 명종 대에 명신이었다.충렬왕 때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을 지낸 승익(承益)의 손자 제신(悌臣)은 일찍이 아버지를여의고 원나라에 가서 평장사(平章事)로 있는 고모부 말길(末吉)의 집에서 수학했다.

원나라 태정황제(泰定皇帝)의 총애를 받아 정동성낭중(征東省郎中)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충숙왕의 신임을 받았다. 여러 벼슬을 거쳐 1354년(공민왕 3) 좌정승에 올랐다.그 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권신 신돈(辛旽)과 김흥경(金興慶) 등의 모함을 받았으나, 공민왕은 끝까지 그를 신임했다.

우왕이 즉위하자 영삼사사(領三司事)와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를 지냈으며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그리하여 후손들은 제신(悌臣)을 일세조로 하고 본관을 처음에는 봉성(峰城)으로 하였다가 곡성(曲城)으로 개관하였으나, 곡성현(曲城縣)이 서원(瑞原)으로 개칭됨에 따라 다시 서원(瑞原)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산군 때 와서 서원이 다시 파주(坡州)로 개칭됨에 따라 현재의 파주(坡州)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파주는 경기도에 위치한 지역이다. 475년(장수왕 63)에 파주사현(坡州史縣)이라 칭하였고,1398년(태조 7)에는 서원군(瑞原郡)과 파평현(坡平縣)을 병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였으며, 1415년(태종 15) 교하현(交河縣)을 폐지시켜 이에 병합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뒤에교하현을 다시 복구시켰으나 도호부는 그대로 두었다. ((파주의 성씨 연구보고서 2020.12월, 파주문화원))

1461년(세조 7)에 파주목(牧)으로 승격하였으며, 1504년(연산군 10)에 본주(州)를 유행지소(遊幸之所)로 삼고 나머지 땅은 인접 고을에 소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1) 파주목으로 복귀, 1895년 파주군(坡州郡)이 되었고, 1914년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군을 폐합하였다.

역사인물로는 제신(悌臣)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는데, 맏아들 국보(國寶)가 공민왕 때 대제학을 지낸 후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졌고, 둘째 흥방(興邦)도 충목왕 때 서성군(瑞城君)에 봉해진후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으며, 특히 학문에 뛰어나 여러 번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막내인 정수(廷秀)는 1371년(공민왕 20) 벼슬이 동지밀직(同知密直)·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조선에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증(憎), 서산군수(瑞山郡守)·단천부사(端川府使)를 역임한상항(尙恒), 상호군(上護軍) 종항(從恒) 등이 뛰어났고,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선무이등공신에 책록된 걸(傑)과 서(瑞) 등도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파주 염씨는 파주시에 총 50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주에 살고 있는 파주 염씨 동정공파는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낸 염제신(廉悌臣)의 2자 염 흥방(廉興邦,1304~1382)을 파시조(派始祖)로 하며 입향조(入鄕祖)는 조선조에 적성면 어유지 리 봉화촌에 입향한 14세 염의만(廉義萬,1730~1801), 19세기 말 문산읍 운천1리 대덕골로 입 향한 23세 염수동(1899~1968)이 있다.

파주 염씨는 문산읍 당동리 집성촌이 있었으나 현재는 흩어졌으며 문산읍 선유리에 2호, 적성면 어유지리에 4호, 문산읍 운천1리에 3호 등이 살고 있다. 매년 음력 10월 17일 당동리 입향조(入鄕祖) 묘소에서 시제를 지내며 적성 어유지리에서는 음 력 10월 15일 시제를 지낸다. 선영은 적성면 어유지리, 문산읍 당동리, 문산읍 운천1리, 법원 읍 동문리 등에 있다. 장단군에 염제신 신도비가 있으며 문산읍 당동리에 염수동의 묘가 있 다

파평 윤씨(坡平尹氏)

파평 윤씨(坡平尹氏)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이다.

『조선씨족통보』와 『용연보감(龍淵寶鑑)』 등의 문헌에 의하면 신달은 경기도 파주 파평산(坡平山) 기슭에 있는 ‘용연지(龍淵池)’라고 못 가운데 있던 옥함(玉函)속에서 출생했다고 하며, 그가 옥함(玉函)에서 나올 때 겨드랑이에 81개의 비늘과 발에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고, 손바닥에는 윤(尹)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성(姓)을 윤(尹)으로 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벽상삼한익찬2등공신(璧上三韓翊贊二等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의 관작을 받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본관을파평(坡平)으로 삼았다.

파평은 경기도 파주시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고구려 때 파해평사(波害平史)·액봉현(額蓬縣)이라 불리다가 경덕왕 때 파평(坡平)으로 고쳐져 내소(來蘇: 양주)의 영현이 되었다. 1398년 (태조 7) 서원(瑞原)과 파평(坡平)을 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고, 1461년(세조 6) 파주목 (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교하현을 폐합 하였다.

역사인물로는 윤신달의 현손5) 문숙공 윤관(瓘)이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지냈다. 1107년(예종 2) 여진정벌 원수가 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전, 함주(咸州)와 영주(英州)등 9지구에 성(城)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개선했으며, 뒤에 벼슬이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이르렀다.

한편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 정정공 번(璠)이 세조의 국구(國舅)가 되어 대사헌·우참찬 등을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 파평부원군 (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번(璠)의 맏아들 사분(士昐)이 우의정을 지냈고, 둘째 아들 사윤(士昀)은 예조판서(禮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영평군에 올랐으며, 셋째 아들 사흔(士昕)은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우의정에 올랐다.

곤(坤)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으며 1408년(태종 8) 사은사(謝恩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온 후 세종(世宗)때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호(壕)는 성종비(成宗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버지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진 뒤 영돈녕부사를 거쳐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올랐던 필상(弼商)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우참찬에 특진되고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해졌다. 필상(弼商) 증손 현(鉉)은 『종중실록』 편찬에 참여한 뒤 호조판서·돈녕부사에 이르렀다.

그 밖에 인종 때 영의정을 역임하고 위사일등공신(衛社一等功臣)에 오른 인경(仁鏡), 영조 때 대사간·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이른 동도(東度), 한말에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준희(俊熙)·창석(昌錫)·기섭(기燮)·해(海)·애경(愛卿)·석구(錫求)·현진(顯振),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일본군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 대장 등을 폭사시킨 의사 봉길(奉吉) 등이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파평 윤씨는 파주시에 총 7,97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파주에 살고 있는 파평 윤씨 정정공파(貞靖公派)는 공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해진 번(璠, 1384~1448)을 입향조(入鄕祖)로 하며 입향 시기는조선초기인 15세기 초반 무렵이다.

주요 인물로는 입향조(入鄕祖) 번을 비롯하여 1506년(중종1)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에 책봉되고 돈녕부판사에 오른 여필(汝弼, 1466~1555) 등이 있다.

교하동, 운정동, 당하동, 문산읍 선유리 등지에 후손들이 800호 가량 살고 있다. 매년 10월 3~10일 사이에 당하동 4번지의 선영에서 시제를 지낸다. 당하동에 정정공파 교하종중 상가 건물을 소유하고 있으며 종중 회장은 윤훈덕이다.

당하동과 다율동 일대에 파평 윤씨 정정공파 교하종중의 선산에 조성된 묘역이 있는데 그 면적은 약 635.381㎡에 이른다. 이곳에는 조선 제7대 왕인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의 아버지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정정공을 비롯하여 중종의 비인 장경왕후의 아버지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중종의 둘째 계비(繼妃)인 문정왕후의 아버지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지임(之任,?~1534) 등 정정공파 후손들 묘가 600여기에 달한다.

2002년 9월 16일 파평윤씨 정정공파 96기의 묘에 대해 경기도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받았다.파평 윤씨 소정공파는 윤승례의 형 윤승순의 아들인 윤곤(尹坤, ?~1421)의 후손들로 윤곤의묘는 파주읍 연풍리에 위치하며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소정공파 후손들은 문산읍 운천리 대덕골을 비롯해 광탄면 용미4리에 후손들이 1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파평 김씨(坡平金氏)

파평 김씨(坡平金氏)의 시조는 경순왕의 후손으로 전하나 고증할 문헌이 없다. 『파평김씨신해보(坡平金氏辛亥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장수(金長壽)는 염주인(鹽州人)으로 일찍이 당나라 명신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지식이 해박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났다.

1361년(공민왕 10) 상호군(上護軍)으로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중랑장(中郞將) 겸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올랐다. 1363년(공민왕 12) 중신(重臣) 김용(金鏞)이공민왕(恭愍王)이 흥왕사(興王寺)에 있음을 기회로 왕을 시해(弑害)하려고 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이를 평정(平定)하려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일등공신에 책록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개성윤(開城尹)에 추증하였으며 파평군(坡平君)에 추봉(追封)한 후 시호를 충간(忠簡)으로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삼게 되었다.

파평은 경기도 파주시에 속해 있는 지역이다. 고구려 때 파해평사(波害平史)·액봉현(額蓬縣) 이라 불리다가 경덕왕 때 파평(坡平)으로 고쳐져 내소(來蘇: 양주)의 영현이 되었다. 1398년 (태조 7) 서원(瑞原)과 파평(坡平)을 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고, 1461년(세조 6) 파주목 (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역사인물로는 인기(仁奇)가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됨을 시작으로 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장수(長壽)의 현손(玄孫) 효신(孝新)은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갔다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확(鑊)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으나 무오 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울산(蔚山)에 유배, 중종(中宗) 때 풀려나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등용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선조(宣祖)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차남 석(錫)은 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을 지냈고, 막내 대(鐓)는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파평 김씨는 확(鑊)·석(錫)·대(鐓) 3형제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인재공파(忍齋公派)·동향촌파(東向村派)·평양파(平壤派) 등 11파(派)로 나누어졌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파평 김씨는 파주시에 총 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당 서씨((平當徐氏)

시조는 서준으로 조선씨족보朝鮮에 의하면 이천 서씨의 시조 신일의 6세손으로 고려 때 형부상서를 지낸 것으로 전한다. 그는 외적의 침입 때 공을 세워 봉성군에 봉해졌으며, 아들 약진과 손 승조 봉성군峯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이천 서씨에서 분적 하여 본관을 평당(平當,파주의 별호)으로 삼아 대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준방의 7세손 원경이 고려에서 문하시중 냈고 그의 아들 인기는 정랑을 지냈으며, 손자 신은 목사를 역임하 전서를 지낸 언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시조를 달리하여 다른 파로 봉성 서씨가 있는데 시조가 서극으로 과에 급제하였다고만 전해지며 문헌이 없어 사적이나 대 등은 알 수 없고 평성 서씨와의 연관관계도 알 수 없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는 평당 · 봉성은 하나의 본관 로 조사되었으며, 전국에 78가구 237명, 파주에는 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서원 서씨가 전국에 112가구 311명, 파주시에 5가구 18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서원이 파주의 옛 이름이라고 보면 같은 일족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교하 김씨(交河金氏)

교하 김씨(交河金氏)의 시조는 김맹정(金孟貞)이다. 고려 때 장군인 그는 경순왕의 둘째 아들 김굉(金鍠)의 8세손이다. 135년(인종 13) 묘청(妙淸) 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교하군(交河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로 하고 교하(交河)를 본관으로 삼아 나주 김씨에서 분적하였다.

교하는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속한 지역인데, 고구려 때에는 천정구현(泉井口縣)·굴화(屈火)· 어을매관현(於乙買串顯)이라 했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교하로 개칭되었다.

교하 김씨는 전객령(典客令) 득성(得成)의 아들 전(田)·삼(三)·어도(御道) 3형제의 후대(後代) 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역사인물로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전(田),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승귀(承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용례(庸禮), 판관(判官)을 역임한 실로(實老),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성구(成九, 후에 다른 일파의 파조가 됨), 숙종 )때 등과하여 현감(顯監)을 지낸 희신(喜臣),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억남(億南), 과 충청도관찰부주사(忠淸道觀察府主事)를 지낸 윤구(尹九) 등이 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하 김씨는 파주시에 총 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 타났다.

적성 김씨(積城金氏)

적성 김씨(積城金氏)의 시조는 김상환(金尙煥)이다. 그는 1669년(현종 1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자는 문원 (文院)이고 부친은 김몽입(金夢立)이며 평양에서 살았다. 적성 김씨는 1930년 평안북도 평원군 공독면 송매리에 21호, 의주시 탑산동에 10호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1명, 무과 2명 등 모두 3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적성 김씨는 전국에 208호 669명이 살고 있는 것으 로 조사되었는데 이 중 파주에는 3호 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9)

임진김씨(臨津金氏)

임진은 경기도 장단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구려때는 진임성으로 불렀다. 시조는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 역임한 김인조이고. 신라종성으로 김일신의 아들이다. 관련된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시조와 본관을 이어 대를 이어 가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는 임진 김씨가 전국에 25가구 1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경기도에도 12가구에 34명이 살고 있으나 파주에는 거주자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장단김씨(長湍金씨)

시조 김선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의 후예로 전하고 있으나 사적 많이 없기 때문에 그 세계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장단부원군에 봉해 졌으므로 그 후손이 관향을 장단으로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아홉 번째 아들 학성부원군의 후 (예 김일신 시조로 전하는 문헌도 보인다. 장단 김씨는 2000년 통계자료에서 전국에 4가구 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파주시에는 거주자가 없다.

원평야씨(原平夜氏)

원평은 파주의 옛 지명이다.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야씨는 원평, 개성, 석천(교하 지역),봉성(파주지역)의 4개의 본관이 있었다. 원평야씨의 시조인 야선조는 대호군으로 고려 1303년(충렬왕 29) 원 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왔고, 그 뒤 좌부승지를 지냈다.

야씨는 1930년도 국제조사 당시 북한지역에만 42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43가구 1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원평(파평) 야씨는 전국에 8가구 27명이 살 고 있으며 경기도에 2가구 7명이 있으나 파주시에는 거주자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단주 한씨 (湍州韓氏)

단주는 파주시 장단면 · 군내면 · 진서면 · 진동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시조 한총례는 고려 현종의 국구로서 광록대부(光祿大夫) 소경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내사령에 증직되었다고 한다.

1001년(목종 4)에 문하시중에 올랐던 한총례의 아들 언공(940-1004)이 고향인 장단을 단주 (湍州)로 승격시켰는데 이 후 아버지 총례를 시조로 하여 단주 한씨가 되었다.

그러나 본래 청주한씨의 분파였기때문에 후에 다시 청주 본관과 합본되었다. 고려인물 중 장단이 고향인 인종 때의 한안인(?~1122)과 그의 사촌 충(?~1129)은 본관이 단주로 기록되어 나타나지만 그 후의 인물 악(1274-1342)과 수脩(1333-1384), 공의(公義, 1307~1365), 제(齊,1340-7)는 본관이 청주로 기록되어 있어 단주 한씨가 후에 청주 한씨로 합쳐졌음이 확인된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단주 한씨는 전국에 31가구 138명이 있 며 파주에는 거주자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파주 한씨가 전국에 698명, 주시에 10명, 교하 한씨가 전국에 7명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들 한씨는 모두 청주로 합본되고 곡산 한씨만 제외되었음이 1987년~1993년 사이에 편찬된 “제6 청주한씨대동족보”에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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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파주시지 4권 파주사람편 2009년, 파주시
  • 파주의 성씨 연구보고서 2020.12월, 파주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