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파주목사 박태보가 진정한 공직자의 길을 묻다
17세기 조선,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강직한 공직자의 표상, 정재 박태보(1654~1689). 최근 그가 파주목사 재임 시절 펼쳤던 선정(善政)의 증거가 300여 년의 세월을 뚫고 세상에 드러나 화제가 되고 있다.
흙 속에 묻혔던 300년 전의 기록, ‘마애 선정비’의 발견
지난 2025년 8월 17일, 파주읍 부곡리 광탄천로 391번지에서 실시된 현장조사 도중 의미 있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토사에 파묻혀 있던 흙을 걷어내자, 바위에 새겨진 명문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음 날인 18일, 파주문화원 부설 파주학연구소장과 문화원 관계자들이 긴급 참관하여 확인한 결과, 이는 파주목사 박태보의 공적을 기리는 ‘마애 선정비’로 밝혀졌다. 이번 발견은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박 목사의 애민 정신이 실제 현장 유물로 증명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주의 정신을 지키다: 성혼·이이 문묘 퇴출 반대
박태보는 단순히 행정을 잘하는 목사로 머물지 않았다. 그는 파주가 낳은 위대한 유학자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의 정신을 수호하려 했던 인물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당파 싸움의 영향으로 두 성현을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서 내쫓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학문적 뿌리를 부정하는 처사였으나, 박태보는 인책 면직의 위협 속에서도 이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는 권력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보다 지역의 자부심과 유교적 가치를 지키는 길을 택했다.
죽음으로 맞선 정의: 인현왕후 폐위 반대와 순국
일반인들에게 박태보라는 이름이 가장 깊이 각인된 사건은 ‘인현왕후 폐위’ 사건이다. 1689년(기사환국), 숙종이 장희빈에게 눈이 멀어 어진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폐위하려 하자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모두가 화를 입을까 몸을 사릴 때, 박태보는 주동적으로 상소를 올려 왕의 잘못을 꾸짖었다. 격노한 숙종은 그에게 직접 혹독한 고문을 가했으나, 박태보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결국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진도 유배길에 올랐던 그는 노량진 근처에서 고문의 독(獄毒)을 이기지 못하고 3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풍락헌’에 담긴 백성과의 약속
1688년 부임 당시, 20년 넘게 방치된 낡은 창고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백성들을 독려해 100여 칸의 청사를 50일 만에 완공했던 박태보. 공사가 끝날 무렵 파주 들녘에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춤을 추자, 그는 청사 이름을 ‘풍락헌(백성과 함께 풍년을 즐긴다)’이라 지었다.
이번에 발견된 선정비는 바로 그 ‘풍락헌’ 시절, 백성들이 박 목사에게 보냈던 존경과 사랑의 흔적인 셈이다. 300여 년 전 파주 백성들이 바위에 새긴 글귀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공직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