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백학산 암각문을 기록하다[1편] – 강근숙
이 논문은 강근숙 작가가 파주 장단 백학산 계곡의 암각문을 연구한 자료로 2019년 제34회 전국향토문화공모 특별상을 수상했다. 논문에는 민통선 내에 산재한 구유암, 영회대, 아양대 등 3개의 석각을 분석한 결과와 전체 113명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을 확인한 내용이 포함됐다.
연구에 따르면 이 암각문은 옛 선비들이 계곡물에 술잔을 띄우며 풍류를 즐기던 ‘곡수유상’의 흔적이다. 진나라 왕희지의 난정기와 고려말 이제현의 송도팔경 등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 문화를 보여준다. 또한 주변 철책 아래에서 조선시대 기와 및 백자 조각 등이 발견되어 과거 문헌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파주위키는 강근숙 작가가 제공한 이 논문을 4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목차
[1편]
1. 구유암 계축모춘
2. 영회대
3. 아양대
[2편]
4. 백학산 꼭대기 폐허 터 기와조각
5. 영희대부근 석판
6. 아양대
7.동편 석벽
[3편]
8·열쇠는 계축모춘癸丑暮春에 있었다
9. 선비들의 놀이문화 곡수유상曲水流觴
10. 백학산 계곡 암각문을 새긴 시대는 언제였을까
[4편]
11. 곡수유상을 체험하다
파주는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적들이 밀집되어 있다. 임진강 유역 지류를 따라 장산리, 가월리, 주월리, 동파리, 금파리, 노상리 등 구석기 유적이 광범위하게 발견되었고, 운정 택지개발 때에는 교하읍 와동리 일대 시굴조사 중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법원읍 대능리 266~1번지 산업단지개발 과정에서 유적이 발견되어 발굴조사 중이다. 특히 반세기가 넘도록 발길이 닿지 않은 민통선 지역은 다양한 생물의 낙원이며, 문화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된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민간인 통제구역 군내면 정자리와 진서면 금릉리 경계에 자리한 백학산은 타임캡슐처럼 암각문巖刻文을 품고 있었다. 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류명삼柳明三 시인이다. 장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친구와 약초를 캐러 산속을 헤매다가 이 암벽을 발견했다. 나의 기행수필집 『천년의 부활』을 받아본 그는 ‘대단한 유적이 있다’며 날이 풀리면 가보자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살을 에는 혹한이었지만, 빨리 가자고 재촉을 하였다.
파평면 두포리 전진교 남쪽 입구에는 민통선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군부대 검문소가 있다. 백학산 암각문을 보기 위해 세 사람은 검문소에 주민등록을 맡기고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들어갔다. 한국전쟁 이후 파주坡州로 편입된 장단군 일대는 군사 보호지역으로, 그 지역 주민이나 영농자 외에는 자유롭게 오고 갈 수가 없다. 넓은 들녘에는 사람도 차도 보이질 않는다. 장단 실향민 1세대를 위해 2001년 조성된 수복 마을 해마루촌을 오른편에 끼고 20여 분을 달려 백학산 들머리에 차를 세웠다. 백학산白鶴山은 옛날부터 백악白岳이라 전하는 고을의 서북쪽에 자리한 진산으로 개경의 울타리가 되어 왔었다. 인적 끊어진 산속에는 낙엽이 발목을 덮고, 아름드리 고목이 쓰러져 길을 가로막았다.
백학산은 그리 험한 산이 아니었다. 완만한 산길과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며 산마루턱에 올랐다. 내려다보이는 구불구불한 얼음계곡이 암각문이 새겨진 곳이라 하였다. 어디선가 산짐승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후미진 골짜기에는 곳곳에 잔설이 남아있다. 가파른 산비탈을 나무를 잡고 조심스레 내려갔다. 흐르던 물이 얼어붙어 바위에 걸친 모양이 그대로 한 폭의 산수화였다. 먼저 내려간 두 사람은 암벽 앞에 서서 빨리 오라 손짓을 한다. 마음이 급해 얼음 위를 미끄러지고 엉덩방아를 찍으며 내려가 암벽 글씨를 보는 순간, 내 안의 세포들이 모두 깨어나 탄성을 질렀다. 계곡의 양 벽에는 장방형으로 각을 낸 석판이 이어졌고, 석판마다 종縱으로 줄줄이 새겨진 이름 또한 명필이이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1. 구유암龜遊巖 계축모춘癸丑暮春
류명삼 시인은 앞서가면서 긴 막대기로 글씨를 가린 낙엽과 이끼를 걷어낸다. 산 중턱 액자를 걸어놓은 듯, 작은 석판에 구유암龜遊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반가워서 이구동성으로 “구유암이다” 소리쳤다. 구석구석 얼어붙은 풀뿌리와 이끼를 말끔히 긁어내자 구유암 방서傍書 ‘癸丑暮春’ 글씨가 나타났다. 단서는 거기 있었다. 계축년 늦은 봄날 선비들이 계곡에 모인 것이 분명하다. ‘계축모춘癸丑暮春’이란 황금열쇠를 손에 쥔 세 사람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힘이 솟았다.
2. 영회대永會臺
구유암에서 300미터쯤 내려가면 돌출된 바위에 영회대永會臺가 보인다. 글씨가 선명하다. 반듯하고 빼어난 글씨를 보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학덕을 두루 갖춘 훌륭한 인물들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계축모춘癸丑暮春하면 중국의 서성書聖 왕희지 고사가 생각난다. 영화永和 9년(서기353년) 난정에서 명사들과 액운을 떨치기 위해 재齋를 올리고 곡수유상曲水流觴을 즐겼다.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자기 앞으로 오는 동안 시를 지어 읊었으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석 잔 마셔야 했다. 왕희지는 42명의 명사들이 유흥을 즐기고 시흥에 젖어 쓴 시를 모아 만든『당모사본唐模賜本』에 스스로 붓을 들어 난정서蘭亭序를 적었다.
난정서蘭亭序 첫 줄은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會영화9년세재계축모춘지초회’로 시작된다. 이곳에 모인 선비들은 영원히 변치 말고 모이자는 뜻으로 이 자리를 영회대永會臺라 했을까. 혹은 난정서의 ‘영화9년세재계축모춘지초회’를 인용해 영회대라 이름 붙였을까. 물음표를 던져놓고 계곡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3. 아양대峨洋臺
서편 가장 끝자락에 아양대가 있다. 가리개를 펼쳐놓은 듯 마주 보는 바위 아양대峨洋臺는 글씨도 아름답거니와 필 획 하나하나가 살아있다. 아양대는 무슨 뜻일까. 아양산성峨洋山城을 이르는 말일까, 글자 그대로 산이 높아 구름 위에 떠 있고, 큰 물결은 가득 차서 바다를 이룬다는 뜻인가. 아니면 거문고의 명인 백아와 종자기 이야기일까.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지음知音, 지음이란 말은 중국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의 소리를 잘 알아들은 사람은 오직 종자기鍾子期뿐이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백아가 마음을 담아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는 그것을 묵묵히 듣고 백아의 마음을 알아맞히곤 하였다.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는데 뜻을 두면 종자기는 ‘아득히 높은 산이 태산과 같다’ 말하였고, 흐르는 강물을 떠올리면 ‘흘러넘치는 것이 마치 양자강과 황하와도 같다’며 백아의 의향을 단번에 알아챘다. 아마도 이 자리에서 마음을 알아주는 지음知音들이 마주 앉아 두보와 이백을 논하며 곡수유상을 즐겼는지 모른다.
군사분계선 인접한 깊은 산중에 이런 암각문巖刻文이 있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명절 때면 장병들이 암벽을 병풍 삼아 고향의 부모님께 절을 올렸다는 백학산 계곡, 자字도 호號도 없이 오로지 이름 석 자만 새긴 암각문이 예사롭지 않다. 한두 군데가 아니고 계곡을 내려오는 암벽에 새겨진 이름은 어림잡아도 백여 명은 족히 넘었다. 선비들은 우리를 몇백 년이나 기다렸을까. 암벽에 새겨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되뇌어본다. 고려적 선비인가. 조선 시대 문필가인가. 그 많은 이름 중 역사책에 등장하는 위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은일거사隱逸居士란 말인가. 어찌하여 산수 좋은 곳에 시 한 수 남기지 않고 이름 석 자만 새겼는지 아쉽기만 하다.
양쪽 석벽을 살펴보고 가장 아래쪽 아양대 돌상石床에 둘러앉았다. 지인들과 옛 선비의 흔적을 찾아보는 순간은 설렘과 기대로 마음이 흔들렸다. 신비로운 비밀을 품고 있는 백학산 계곡, 푹신한 낙엽 방석에 앉아 향기로운 커피를 아껴 마시며 꽃피는 봄날 다시 오자 약속을 했다. 언 땅 풀리고 녹수 흘러가면 숨은 이야기도 수런수런 들려오겠지, 느긋하게 생각하며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산을 빠져나온 류명삼 시인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민통선에 자리한 백학산은 어디에 지뢰가 묻혔는지 알 수 없다’ 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설레어 가슴 뛰는 이야기만 하였으니 참으로 민망스러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