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암각문을 기록하다[4편] – 강근숙
11. 곡수유상을 체험하다
우리는 오늘, 아양대 앞 계곡에서 선비들이 즐겼던 유상流觴놀이를 체험해 보기로 하였다. 직접 담은 오래된 도라지 술 한 병과 가벼운 양은 잔을 배낭에서 꺼냈다. 계속된 가뭄으로 물이 불지는 않았어도 잔을 띄우기는 충분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물에 띄운 술잔이 누군가의 앞에 오도록 시를 짓지 못하면 예법에 따라 벌주를 마셔야 한다.
빙빙 돌던 술잔이 류 원장 앞에 멎는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서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거침없이 ‘백학산 계곡 세 사람이 찾아드니/ 바위마다 이름 즐비하게 새겨있네/ 반가이 맞는 종달새 노래 소리/ 난정 모임 옛 생각 곡수유상 하노라’ 시를 읊고 술잔을 비우는 품이 영락없는 풍류객이다. 글짓기에 고심하는 사이 술잔은 내 앞으로 떠 내려왔다. 아무나 시를 읊던가. 글을 짓지 못한 나는 흔쾌히 벌주 석 잔을 들이켰다. 벌을 받아도 즐거운 것은 선조들의 놀이 속에 삶의 지혜와 철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류명삼 시인은 술잔이 오기도 전에 눈을 감고 분위기를 잡는다. 한두 번 해본 가락이 아니다. ‘강 건너 백학산/ 푸른 향기 보이는 곳까지/ 멀리멀리 푸르구나/ 모춘에 낮달이/ 공연스레 서글픈 것은/ 인적 없는 푸른 계곡/ 옛 시인의 노래가 잠들어서/ 울지 못한 까닭이라네’ 옛 선비들의 잠든 노래를 불러내는 듯한 시를 읊고 술을 음미한 그의 얼굴에 ‘술맛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곡수유상은 선비들의 놀이문화다. 아득한 옛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감흥에 젖는 것은 연거푸 마신 벌주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도 이 순간만은 선비인 양 그윽한 심경으로 시를 읊었다. ‘癸丑暮春 오늘 같은 저문 봄날/ 도포자락 휘날리던 시인 묵객 멋진 풍류/ 詩 지으면 읊조리고 못 지으면 벌주 받던/ 백학산 푸른 향기 몇백 년을 일렁였나/ 후세사람 아양대서 곡수유상하는 것은/ 소리를 알아듣는 知音 그리워서라오’ 속세를 떠난 한나절은 선경을 노니는 신선처럼 맑고 한가로웠다. 산자락에 수 없는 발자국 낙관을 찍어놓고 돌아서는 우리에게, 석벽에 기댄 선비들이 다시오라 손을 흔든다.
백학산 계곡을 다녀온 후 줄곧, 석벽의 이름들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느 시대에 무슨 일로 모였는지 아직 명확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계축모춘癸丑暮春’이란 방서로 보아 계축년 늦은 봄날 백이십여 명의 선비들이 모였으며, 그 언저리에 알기 어려운 도道가 어른거릴 뿐. 비바람 부는 삶의 바다에서 지식인들이 가 닿고 싶었던 곳은 현실을 벗어난 저쪽, 꿈에도 꿈꾸었던 세계 이상향이었다. 심오한 경계를 다 보여줄 수 없기에 염원처럼 이름 석 자를 새긴 선비들, 그들이 남긴 것은 이름이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우리 민족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원형문화 풍류였다.
여러모로 부족한 내가 ‘백학산 암각문’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에 자긍심이 느껴진다. 유적을 발견하고 제보한 류명삼 시인과 류병기 원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산벼랑에 새겨진 암각문은 긴 세월 풍화작용으로 서서히 손상이 진행되고 있다. 소중한 유적을 그대로 버려둘 것인가. 전문가의 정밀조사로 더 이상의 손상을 막아야 한다. 석벽의 이름 113명을 이렇게 낱낱이 기록한 이유는, 그 누구라도 암각문의 근원을 밝혀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해서이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환경은 무분별하게 파괴되었다. 머지않아 민통선 지역도 개발의 이름으로 산과 들이 파헤쳐질지도 모른다. 선비의 정신세계를 상상하며 곡수유상 체험으로 깨달은 것은, 백학산 계곡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암각문 석벽 아래서 한 번쯤 곡수유상을 즐겨보시라 권하고 싶다. 도포 자락 휘날리지 않아도 옛 선비들의 멋과 풍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바탕의 붓 놀이, 필획마다 특유의 힘이 느껴지는 백학산 암각문은 보물급 문화유산이다. 하루빨리 가치를 인정받아 어느 시대 선비들이 남긴 흔적인지 밝혀지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후세사람들이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마지막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