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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에는 아이들도 술 한잔 – 김태회

우리나라에는 예부터 계절의 변화와 명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절기에 어울리는 술을 빚어 즐겼다. 이를 세시주歲時酒 또는 절기주節氣酒라 한다. 정월 초하루 설날에 마시는 도소주屠蘇酒, 정월 대보름에 마시는 귀밝이술, 청명일에 마시는 청명주淸明酒, 유두일에 마시는 유두주流頭酒, 가을의 국화주菊花酒가 있다. 그 외에도 많다. 그중 도소주는 설날 아침에 마시는 조선시대의 특별한 풍습이다. 우선 도소屠蘇란 산초, 방풍, 도라지, 백출, 오두, 대황, 밀감 피, 육계 피 따위를 섞어서 술에 넣어 연초에 마시는 약이다. 약이며 술이다.

그러면 왜 죽일 도屠와 소생할 소蘇라는 극단적인 반의의 글자를 썼을까. 질병을 일으키는 나쁜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물리쳐 없앤 후, 사람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생명을 다시 살려낸다는 뜻이다. 도소주에 들어가는 재료가 실제로 항균과 소화 촉진에 좋은 약재들이다. 겨울철 추위로 저하된 면역력을 높이고 한기를 쫓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조상들은 이를 단순히 술이 아닌 새해에 보충해야 할 강장제로 여겼다. 효심과 배려가 섞인 아름다운 풍습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린아이에게도 마시게 했다. 알코올 도수는 13도∼15도 내외의 약용 청주로, 맑은 기운을 받는다는 뜻에서 찬 상태에서 마시며, 대부분 살짝 맛보는 수준으로 보면 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설날에 도소주를 마시곤 했다.

도소주를 마시는 일정한 방법이 있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한 방에 모여 어린 순서대로 도소주를 마시고 방에서 나간다. 젊은 사람들은 한 해를 얻기 때문에 먼저 마시고, 늙은 사람은 한해를 잃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도소주를 마시면서 사람이 하나둘씩 줄다 보면 결국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만 남게 된다. 어린 시절에는 재밌게 마시겠지만, 점차 세월이 흐르며 차례가 늦어질수록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조선조의 그 유명한 어른인 이수광과 정약용도 도소주를 마시며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서러워하는 시를 짓곤 했다.

이수광의 찬도소讚屠蘇

屠蘇先到少年頭 도소주는 먼저 소년의 머리(순서)로 가는데,
鏡裏衰容我自羞 거울 속 쇠약한 내 얼굴은 나 스스로도 부끄럽구나.
莫怪穉兒呼不應 아이가 불러도 대답 없음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
一分春意一分愁 봄의 뜻이 한 푼 더할수록, 시름도 한 푼 더해가는구나.

정약용의 원일元日

屠蘇次第到殘年 도소주 술잔이 차례대로 흘러 늙은 내게 오니,
强欲稱觴意惝然 억지로 잔을 들어 축하하려 해도 마음은 오히려 서글프구나.
白髮從今增一歲 백발은 이제부터 또 한 살이 더해지는데,
靑春何處覓初筵 청춘 시절 첫 잔을 받던 그 자리는 어디서 찾을꼬.

그나저나, 최근 이런저런 이유로 술을 안 하니까, 술잔 기울일 기회가 더 잦아지고, 화면을 보거나 지면을 들춰봐도 술에 대한 이야기가 유별나게 눈에 띈다. 아무튼 술 대신 책을 기울인다. 돌아오는 설에 도소주 따∼악 한잔하는 건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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