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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은 꼴 – 신수현

신수현 작가

두 달 전 아버지 생신을 맞아 친정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 에 웃고 떠들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문득 홀로 소파에 앉아 고요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 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늘 한결같은 아버지..

아흔이 훌쩍 넘은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아낸 주름진 얼굴을 마주하니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버지가 널 받았어.”라고 엄마가 말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마주한 존재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기쁨이자 위안이었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꼭 닮은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걸어온 시간이 곧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그 닮은꼴의 기록을 통해 한 남자의 인생이자 나의 뿌리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이 글을 통해 아버지께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내가 세상에서 가 장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이기에…

나는 커다랗고 투박한 손에 의해 엄마 다리 밑에서 들어 올려졌다. 나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안온한 자궁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며 지내다 힘겹게 산도를 빠져나온 나는 갑자기 재난이라도 당한 듯 얼떨떨했다. 기억에는 없지만 세상과 마주한 순간 겁에 질려 눈조차 뜨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필 내가 태어나던 날, 옆 동네에도 산고를 참아내는 여인이 있었다. 산파는 이미 그 집으로 떠난 후였다. 그런 연유로 난 오빠 언니들을 모두 무탈하게 받아낸 능력 있는 산파의 손길을 타지 못했다.

졸지에 ‘일일 산파’가 된 아버지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엄마의 지시에 따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에 물을 끓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흰 무명실을 묶어 나의 탯줄을 자르던 아버지. 그날의 긴장과 축복 덕분인지 나는 유독 아버지에게 깊은 애착을 느낀다. 그가 필요 이상으로 과묵하다는 사실은 애잔함을 증폭시킨다. 북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외로움을 견뎌냈을 수많은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그에게 우리 가족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피붙이인 셈이다.

나와 아버지는 붕어빵이다. 과도한 팔자걸음부터 술 못하는 체질도 닮았다. 사실 아버지는 소주 한 잔에도 응급실에 실려 갈 만큼 술에 취약하셨는데,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귀하게 키운 외동딸에게 술주정 없는 사내를 맺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오직 딸이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체질상 술을 아예 못한다는 말은 외할아버지를 흡족하게 했고 기쁜 나머지 두말없이 결혼을 밀어붙였다. 몸뚱아리 밖에 없던 아버지는 졸지에 ‘백 점짜리 사윗감’이 되었다.

어릴 적 가족 앨범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얼굴만 나온 흑백의 작은 사진이었는데 매우 미남인 남자였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부리부리한 눈빛 속에서도 따스함이 배어 나왔다. 젊은 기개와 온화함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군복을 입고 하사 계급장을 붙인 군모를 쓰고 미소 짓고 있었다. 만약 엄마가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분이 아버지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얼굴도 그랬지만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군인이었을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아버지는 1933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1학년, 열일곱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총 한 자루 메고 남으로 내려왔지만 사람을 향해 차마 총을 쏠 수가 없어 허공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던 여린 청소년이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라는 비극적인 이념의 갈등 속에서 매일 죽음을 목격하면서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부모 형제가 있는 북쪽 대신 ‘자유’가 있는 남쪽을 선택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갈망한다는 그 단순하고도 위대한 진리를 아버지는 온몸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군인을 업으로 삼아 살았다면 그의 삶은 평탄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생은 우리를 자주 고꾸라뜨린다. 아버지는 나름 로맨티스트였다. 당직 중에 몰래 빠져나와 엄마를 만났다. 잠깐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그날 하필 사고가 터졌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책임지고 영창 신세를 져야 했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인근에 있던 육군교도소에 갇혔다. 그 당시 육군교도소는 ‘사람 잡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군복을 벗고 그곳으로 들어가던 아버지 심정은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먹먹하다.

비극은 기습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엄마는 첫아이를 아버지란 존재 없이 출산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 모진 시간과 역경을 이겨내고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본래 강건했다. 삼각형 몸매에 팔뚝이 내 넓적다리만큼이나 굵은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가끔 그가 독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곤 했다. 교통사고로 인해 갈비뼈가 나가고 팔이 빠졌을 때도 마취하면 낫는 데 오래 걸린다며 어깨뼈를 맞추는 고통을 생으로 견뎌냈다. 그 광경을 본 의사들이 질려버릴 정도로 아버지는 ‘강철 사나이’였다.

문제는 밥이었다. 그 시대의 절대적인 평안은 바로 먹는 것이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그는 일곱 식구를 먹여 살려야만 하는 가장이었다. 공사판을 전전했다. 겨울에는 꽝꽝 얼어붙은 꽁보리밥을 숟가락으로 파먹던 시절의 이야기는 지금 들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엄마가 생활전선에 뛰어들고 나서야 살림이 폈다. 살아야 한다면 변해야 했다. 그녀는 환경에 의해 억척스러워졌다. 다행히 수완이 좋은 엄마는 군부대 앞에서 작은 구멍가게를 냈고 제법 장사가 잘되어 우린 밥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안 했고 별다른 취미활동도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특히 스포츠 게임을 좋아했다. 농구, 배구, 축구, 심지어 마라톤까지 즐겨봤다. 그 밖에 동물의 왕국이나 가요무대는 빼먹지 않고 시청했다. 그는 제법 노래를 잘했다. 즐겨 부르던 노래는 ‘가고파’였다. 자주 부른 탓에 지금도 난 노래 가사가 입에서 술술 나온다. 가끔은 엄마랑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화음이 잘 맞아 듣기에 좋았다. 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무슨 재미로 사시냐고. 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난 나중에야 알았다. 삶이 재미로만 살아지는 것이 아님을..

1983년도에 한동안 그는 텔레비전에 앞에 박제된 모습이었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에 미쳐있었다. 신청자가 폭주하면서 무려 138일간 이어지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아버지는 여의도로 달려가 그의 엄마, 아버지와 동생들의 이름과 개인정보를 적은 벽보를 붙이고 피켓을 들고 있기도 했다. 당시 여의도 KBS 본관 전체가 가족을 찾는 벽보로 도배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다섯 달 동안 잡고 있던 한 줄기 희망의 빛은 꺼져버렸다. 아버지는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자주 눈이 붉어졌다. 북에 살아있을 가족을 그리워하는 눈빛은 언제나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지금 아버지는 아흔세 살의 귀여운 어르신이 되셨다. 가끔 엄마가 “너희 아버지는 세상 물정 모른다”고 뒷담화를 해도 아버지는 하회탈처럼 허허 웃으실 뿐이다. 요즘은 나보다 더 많이, 더 맛있게 드신다. 아버지가 먹는 모습만 봐도 내 입에 침이 고인다. 마음이 흐뭇하니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마치 잘 먹는 자식을 바라보기만 해도 흡족한 마음이 드는 부모의 마음과 같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먹방 유튜버’ 해도 되겠다고 말했더니 ‘먹방’이 무엇이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먹는 방송’이요 했더니, 요즘은 왜 말을 줄여서 하냐고,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그는 불만을 표출하는데도 얼굴은 미소 짓고 있다. 아흔 넘도록 선하게 산 자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가 처음으로 산문집을 냈을 때, 아버지는 아흔둘의 나이에도 그 두꺼운 책을 일주일 만에 완독하셨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곤 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더라는 엄마의 말에 코끝이 찡했다. “고생했다. 내 딸 장하다.”라는 그 한마디는 나의 모든 수고로움을 눈 녹듯 사라지게 했다. 그 누구의 격려보다 더 값지고 소중했다. 약삭빠르지 못하고 때론 답답할 만큼 묵묵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환생이 있다면 다음 세상에서도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여태껏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내뱉지 못한 말, 이 글을 빌어 용기를 내본다. “아버지 사랑해요!”

One thought on “닮은 꼴 – 신수현

  • 묵묵한 사랑이네요. 그리움을 참아내고, 살아야한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버티던 시간, 지키고자 했던 심지가 묵묵한 사랑을 만드셨네요.
    여린 심정이 난생 처음 두 생명을 책임졌을 때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책임감의 무게는 어찌 감낭하셨을지 존경이라는 단어도 부족하기만 합니다. 아버님이 이 글을 읽고, 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셨겠네요. 내 딸이야 하시며 흐뭇해하시고 있을 것 같습니다. 감히 그의 삶을 읽어보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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