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오는 봄 -강근숙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봄일까.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인 2월 4일은 입춘으로, 동양에서는 이날부터 봄이라 하여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서 대문에 붙이고 좋은 일이 많기를 기원한다.
올해 입춘은 음력 섣달 열이레 한겨울이어서, 봄은 마음에만 와 있었다. 달력 한 장을 넘기고서야 오랜지 빛 햇살이 땅을 깨우고, 들녘은 연녹색으로 물들며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돋는다.
봄볕 따스한 들녘을 걷다가 발치에 아주 작은 풀꽃이 보여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본다. 눈을 크게 떠야 보이는 별꽃, 봄맞이, 꽃다지, 제비꽃, 봄까치꽃 등 자잘한 꽃들이 길섶을 수놓는 봄은 놀랍고도 신비롭다.
양지쪽에 냉이, 민들레, 지칭개, 소리쟁이가 수북하다. 어릴 적부터 집 주변에서 나물 캐기를 좋아했던 나는 초록 잎이 올라오면 바구니 옆에 끼고 봄맞이를 나선다. 초봄이라 벌레도 없고 농약을 뿌리지 않은 호젓한 산자락은 나물 캐기에 좋은 장소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온 첫 순은 향이 진하고 약성이 강해 녹색 비타민으로 불린 만큼 영양이 풍부하다. 쓴맛이 강한 지칭개, 고들빼기, 씀바귀는 살짝 데쳐 우린 후, 초고추장에 무치면 특유의 쌉쌀함이 잃었던 입맛을 돌게 한다.

나물을 먹는 민족은 세계적으로 우리 민족이 유일하다. 이웃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인이 들에서 나는 풀과 나무순은 먹지 않는 것은 나물과 독초를 구분하지 못해서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때 몇천만 명이 굶어 죽었어도 나물을 먹을 줄 몰랐고, 일본이 가난으로 기아선상에 이르렀어도 구황식물로 나물을 먹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흉년이 들어 기근과 질병으로 허덕일 때, 나물죽과 반찬으로 허기를 면했고 약초나 나무뿌리를 채취해 약으로 사용했다.
한민족은 호기심이 많고 도전 정신이 강하다. 우리 조상은 5·6천 년 전부터 산과 들에서 나는 풀과 나무의 특성을 알아냈고, 독초와 약초를 분류해 놓아 민간요법과 나물 문화가 발달했다.
내가 아는 들녘의 수십 종의 풀도 대부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며, 조리 방법도 다양하다. 연한 잎은 생으로 먹고, 데쳐서 무쳐 먹고, 말려두었다 묵나물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 봄나물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빛으로 오는 봄, 들판이 연녹색이 번지면 나는 열다섯 아이가 되어 풀밭으로 달려간다. 온갖 꽃들이 눈을 뜨는 4월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며, 또한 바쁜 달이다. 꽃방석을 깔고 앉아 나물을 캐다 보면, 일상에 쫓겨 삭막해진 몸과 마음이 촉촉하게 생기가 돈다. 면역력을 강화하고 만성 염증을 치료한다는 민들레가 지천이다.

나는 봄이면 민들레 김치와 장아찌를 담고, 각가지 차를 만든다. 쑥차나 찔레순 차는 향긋하고 민들레나 쇠뜨기 차는 맛이 구수하다. 차에 대한 전문 지식은 없으나, 내 맘대로 찌고 덖어서 한가로운 날, 느긋하게 나만의 봄 향을 즐긴다.
봄이 무르익으면 들녘 어디에나 쑥이 쑥쑥 올라온다. 몸을 따듯하게 하고 피를 맑게 해주는 쑥은 음식인 동시에 약이 된다. 쑥을 많이 뜯어놓아야 일 년 내내 좋아하는 쑥국, 쑥밥, 쑥개떡을 먹을 수 있기에, 요맘때면 부지런히 쑥을 뜯는다. 나는 쑥개떡을 먹고 자라선지 쑥을 유난히 좋아한다. 쑥국을 벌써 여러 번 끓였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쑥을 으깨서 날콩가루를 묻혀 끓인 부드럽고 향긋한 쑥국은 몸을 편안하게 한다. 봄나물 무치고 쑥국 끓이는 날이면 무슨 보약이나 되는 양, 가족들을 불러서 함께 먹는다.
누가 그린 수채화일까. 파스텔 빛으로 몽글몽글 피어나는 먼 산은 한 덩이 풋풋한 꽃송이다. 화사한 그 빛깔 그대로 오래 머물렀으면 좋으련만, 인생의 봄이 순식간에 지나가듯 봄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꽃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꽃잎이 흩날린다. 이 봄이 가기 전에 화전을 부쳐야 한다. 지난해는 어쩌다 봄이 훌쩍 가버려 화전 부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진달래꽃을 언제 딸까 고심을 하던 중, 야산 들머리에 활짝 핀 진달래를 발견하고 재빠르게 올라가 한 웅큼을 땄다.
찹쌀은 엊그제 미리 빻아놓았다. 꽃은 바로 화전을 부치지 않으면 모양이 흐트러진다. 민들레와 진달래, 명자꽃을 씻어 물기를 말리면서 찹쌀가루로 흰색, 붉은색, 노란색, 쑥색으로 익반죽을 했다. 붉은색은 비트 가루를 넣어 꽃물을 들이고, 노란색은 치자 열매가 없어 울금 가루로 대체했다. 냄새가 배지 않은 새 프라이팬에 기름을 누르고 동글납작한 반죽을 올렸다. 불을 약하게 하고 한쪽이 익으면 뒤집어서 꽃을 얹었다. 노란빛이 곱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울금의 연한 겨자색에 민들레 꽃을 얹으니 오히려 산뜻하다. 비트 반죽에 진달래꽃을 얹고, 꽃술을 빼낸 자리에 벚꽃 몽우리로 수술을 대신하니 더 예쁜 꽃으로 피어난다. 쑥가루가 많이 들어간 쑥전은 검은색에 가까워 쑥잎을 올려도 표가 나질 않는다. 그 위에 진달래꽃을 얹어 모양을 낸다.
집안이 온통 꽃밭이다. 접시마다 진달래꽃, 명자꽃, 민들레꽃이 곱게 피어나고 쑥 향이 진동한다. 화전놀이를 어찌 혼자서 즐기겠는가. 아들 며느리를 부르고 가까운 이웃도 불렀다. 오방색 화전을 가운데 놓고 꽃차를 우렸다. 너무 고와선가 누구 하나 선뜻 손을 대지 않고 바라만 본다. 보기만 해도 행복한 이 순간,마주보는얼굴마다웃음꽃피는봄날이다.

화전놀이는 봄맞이 축제였다. 옛사람들은 삼월 삼짇날 계곡으로 놀러 나가 화전을 부쳐 먹으며 자연과 풍류를 즐겼다. 오늘날 바쁜 현대인은 풍치를 즐길 여유가 없지만, 나는 이 짧은 계절을 놓치지 않고 자연이 주는 호사를 한껏 누린다. 나물을 캐서 밥 비벼 먹고, 꽃을 따 화전을 부치며 소박한 기쁨을 맛보았다. 봄은 눈 깜짝할 사이 스쳐 지나간다. 꽃비 내리는 4월이 가고, 뜨거운 햇살과 짙푸른 옷자락을 펼치고 계절의 여왕 5월이 당도했다. 순백의 이팝나무꽃 흐드러지고 붉은 장미 만발하는 싱그러운 달, 초록 수레를 탄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