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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미리 석불 뒷담화 – 이기상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용암사 경내에 두 기의 거대한 석불이 서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라 부른다. 보물로 지정된 이 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쌍미륵 석불입상이다.

그런데 이 석불에는 화려한 전설 뒤에 감춰진 이야기가 있다.


왕실의 간절한 소원에서 시작된 일

고려 선종(宣宗)은 후사가 없었다. 후궁까지 들였으나 왕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 후궁이 원신궁주(元信宮主) 이씨다.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이자 선종의 사촌으로 들어온 여인이었다.

어느 날 밤,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났다. 그들은 장지산(長芝山) 남쪽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라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하고 사라졌다. 궁주가 왕에게 고하자 선종은 즉시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사신이 돌아와 고했다. “장지산 아래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왕은 그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렇게 완성된 두 불상에 왕과 궁주가 불공을 드리자,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侯)가 태어났다. 왕실은 소원을 이루었다.

왼쪽 불상은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로 남상(男像)이라 전한다. 오른쪽은 네모난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로 여상(女像)이라 한다. 두 불상 모두 천연 바위를 그대로 몸체로 삼고, 목과 얼굴과 갓은 따로 만들어 얹었다. 거대하면서도 섬세하다.

왕실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기적의 이야기다. 그러나 바위 아래 마을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강희맹이 들은 이야기

세월이 흘러 조선시대가 되었다. 고려의 불상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424년에 태어난 문신이자 화가·저술가인 강희맹(姜希益)이 어느 날 이 석불 앞을 지나갔다. 석불이 서 있는 곳은 당시 혜음령(惠陰嶺) 고개 아래 지역이었다. 혜음령은 고양시와 파주 광탄면 사이의 낮은 고개다. 해발 164미터에 불과하지만, 양쪽이 낮은 평지여서 고갯마루가 의외로 높아 보인다. 고개 위에 그늘이 져 쉬기에 좋다 하여 “그늘의 은혜를 입는다”는 뜻의 혜음(惠陰)이라 불렸다. 중국 사신들도 한양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며 잠시 숨을 돌렸다. 사람들은 이 고개를 ‘쉬엄령’이라고도 불렀다.

강희맹은 말을 멈추고 석불을 바라보다가 말 앞의 하졸에게 물었다. 어떤 연유로 이 불상이 세워졌느냐고. 하졸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예상 밖이었다.

왕실의 궁주가 꿈에 감응을 받아 이곳에 불사(佛事)를 벌였다고 했다. 재물을 시주하고 사중(四衆)이 모두 모여 불상을 세웠다고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하졸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천 명의 인부가 힘을 다하고 만 마리의 소가 쓰러졌습니다. 공이 이루어지니 밤낮으로 등불을 밝히고 불력이 넓고 멀다 하였지만, 이로부터 앞 마을 수백 호 집이 반년도 못 되어 모두 뿔뿔이 유망(流亡)하고 말았습니다.”

불사는 끝났다. 그러나 마을은 텅 비어버렸다.

강희맹은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시 한 편을 남겼다. 제목은 「과혜음석불하기사(過慧音石佛下記事)」, 곧 ‘혜음 석불 아래를 지나며 기록한 일’이다. 시에서 그는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썼다.

이 힘을 돌려 역려(逆旅, 여관)를 지었더라면, 두 곳에 세워 큰길에 임할 수 있었으리니, 행인들이 노숙을 면하고, 더위와 비와 잦은 서리도 피할 수 있었으리라.

왕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동원된 백성들이 집을 버리고 마을을 떠났다. 강희맹은 그 현장을 지나치며 “이익을 구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재앙을 불러들인다”고 기록했다. 태사(太史)의 직분으로 삼가 적어야 할 일이라 했지만, 정작 제대로 기록할 재주가 없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시를 맺었다.


‘혜음 석불’에서 ‘용미리 석불’이 된 사연

이 석불이 처음 만들어질 때, 용미리(龍尾里)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일대는 혜음령 고개 아래, 국립 여관인 혜음원(惠陰院)이 있던 근처였다. 그래서 석불의 이름도 혜음 석불로 불렸고, 강희맹의 시 제목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용미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처음 생겼다. 이 일대 마을인 ‘구룡(九龍)’과 ‘호미(虎尾)’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들었다. ‘구룡’은 낮은 구릉 지대의 마을 이름이 변한 것이고, ‘호미’는 ‘외딴 산’을 뜻하는 ‘홋미’를 한자로 옮긴 것이라 한다. 이렇게 행정 편의로 붙은 이름이지만, ‘용의 꼬리’라는 뜻이 되어 풍수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혜음 석불은 그렇게 용미리 석불이 되었다.


돌은 남고, 사람은 사라졌다

두 불상은 지금도 장지산 아래 용암사 경내에 서 있다. 왕실의 염원도, 불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통도, 강희맹이 하졸에게 들은 이야기도, 모두 이 돌 앞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석불은 고려 왕실의 기적을 증언한다. 동시에 그 기적을 위해 마을을 떠나야 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의 시간을 품고 있다. 강희맹이 말 위에서 들었던 그 이야기는, 역사책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뒷담화다.

용미리 석불 앞에 서면, 거대한 바위의 무게만큼 그 이야기들이 함께 눌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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