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공 유적을 찾아가다 – 강근숙
파평윤씨는 파주를 본관으로 하는 대표적인 성씨이다. 시조 윤신달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공신이 되었고, 그 후 고려에서 조선 시대까지 천여 년 동안 왕실과 혼인을 맺는 한편, 꾸준한 과거 급제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가문이 번창했다. 조선 시대에만 5명의 왕비를 배출한 파평윤씨 문중에 영웅호걸을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파주坡州라는 지명 역시 세조비 정희왕후의 본향이라는 점에서 유래했을 만큼, 파주 곳곳에는 파평윤씨의 유적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은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 장군의 10대손으로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璠과는 사촌지간이다.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와동리에 있는 정정공파 묘역은 역사 해설과 관련해 자주 찾았으나, 별다른 역사적 사건이 떠오르지 않는 윤곤의 묘역은 선뜻 발길이 닿지 않았다. 지난 을사년乙巳年에 정정공파의 권력다툼인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관한 글을 쓰면서, 소정공 윤곤의 생애도 궁금해졌다. 윤곤의 손자인 윤호의 딸이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윤관장군 묘역에 들른 김에, 내친걸음으로 윤곤 묘역이 있는 파주읍 연풍리로 향했다.

마을 한가운데는 소정공 윤곤의 신도비가 서 있다. 글자가 마멸되어 잘 보이지 않아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소정공 후손이라는 분이 다가와 집안 내력을 설명해 준다. 적손嫡孫으로 이어오던 가계가 8대에 단절되었는데, 문중의 관례를 따라 둘째 자손인 승지 윤비경으로 하여 종사宗嗣를 이었다 한다. 소정공 신도비 곁에 선 파원군坡原君 윤비경尹飛卿의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유척기俞拓基가 전액을 올렸으며, 권상하權尙夏가 글씨를 썼다. 바로 옆에는 윤비경의 처 한산이씨 정려각旌閭閣과 효행비가 서 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예이자 좌랑佐郞 이구연李九淵의 딸인 그녀에 대한 효행비에는 ‘어질고 자상했다’며 내조의 공을 적었다. 파원군이 상복을 입고 여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던 중 불이 났는데, 한산이씨는 지아비가 화를 당한 줄 알고 불속으로 뛰어들어 순절했기에 임금이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정려각 맞은편 낮은 산자락에는 소정공별묘昭靖公別廟가 자리한다. 소정공의 후손 윤방현 씨가 나와 반갑게 맞으며 용지재실龍池齋室로 안내한다. 명학당鳴鶴堂을 지나 오른쪽 문을 들어가면 소정공 위패를 모신 사당이 나온다. 윤방현 씨는 흔쾌히 사당문을 열어 주었다. 청색 위패 왼편에 두 기의 붉은 위패가 놓여있어 부인이 두 분임을 알 수 있다. 소정공 윤곤의 첫 부인은 순정택주順貞宅主 고흥류씨高興柳氏 탁濯의 딸이고, 재취 부인은 근순택주謹順宅主 청주한씨淸州韓氏 상질尙質의 딸이다. 윤곤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희이希夷, 희제希齊는 고흥류씨 소생이고, 셋째 삼산三山은 청주한씨의 소생이다. 세 아들은 자손이 번성하여 벼슬이 끊이지 않았으며, 소정공의 손자 윤호의 딸이 성종의 계비(정현왕후)가 되었고, 그의 소생의 아들이 조선 제11대 임금(중종)이 되었다.
윤곤의 두 번째 부인 청주한씨는 한상질韓尙質의 딸이다. 한상질이라면 이성계의 명을 받아 명나라에 가서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받아온 한명회韓明澮의 할아버지가 아닌가. 세조 대부터 중종 대에 이르기까지는 청주한씨와 파평윤씨 가문에서 왕비가 집중적으로 배출되었다. 세조비 정희왕후는 파평윤씨였고,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와 계비 안순왕후,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는 청주한씨였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는 성종의 계비가 되었으나 후궁들과의 투기 문제로 폐위되어 사약을 받았고, 그 뒤를 이은 성종의 제2계비는 정현왕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와 제2계비 문정왕후 모두 파평윤씨였다. 청주한씨와 파평윤씨 두 집안은 왕실과 겹사돈 혼인을 통해, 백여 년간 조선 최고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상질의 딸이 파평윤씨 집안으로 시집와, 그의 증손녀가 한명회 넷째 딸인 공혜왕후의 뒤를 이어 성종의 왕비(정현왕후)가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당에서 나와 명학산 묘역으로 향했다. 재실에서 묘역까지 약 800미터 가량 되는데 가는 길목에는 안내석을 세워 놓았다. 묘역이 높이 자리하고 있어 산 들머리에서도 둥그런 봉분과 우뚝한 비석이 보인다. 묘역에 올라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길이가 3미터에 달하는 묘비를 올려다본다. 옛 비석이 마멸되어 1929년 11월에 다시 세운 비는 글자가 선명하다. ‘추충익재좌명공신 숭정대부행이조판서파평군 증 시소정공윤곤지묘-推忠翊載佐命功臣 崇政大夫行吏曹判書坡平君 贈 諡昭靖公尹坤之墓’ 비문은 윤상익尹相翊이 짓고, 전액은 윤용식尹容植이 올렸으며, 글씨는 윤조영尹祖榮이 썼으니 모두 후손들이 짓고 쓴 것이다. 둥그런 봉분은 호석을 둘렀고, 거기에 사군자를 새겨 넣었다. 묘 앞에 세운 묘비와 아래 단 양옆에 서 있는 우람한 문인석은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하다. 새로 세운 사각 장명등은 오른편으로 비켜섰다. 황희 묘역은 좌청룡 기가 강하여 장명등을 왼쪽에 세웠다던데, 이곳은 우백호 기가 센 모양이다. 산신석 위쪽으로 올라가 맞은편 산세를 바라보니, 안산의 기운이 흩어지지 않도록 감싸안고,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듯 아늑하다.

문중 이야기를 들려준 후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초등학교 친구 윤영렬을 만났다. 뜻밖의 만남에 “여긴 어쩐 일이냐”고 서로 반갑게 물었다. “소정공에 대해 알고 싶어 묘역을 다녀오는 길”이라는 내 말에 친구는 “그런 건 나한테 물어봐야지” 하고 웃는다. 알고 보니 효자로 소문난 그 친구는 소정공파 22세손으로, 이 마을의 토박이로 살며 문중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친구에게 가끔 문중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여기에 살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동네 한가운데 소정공 신도비 바로 앞이 친구네 집이고, 대문 앞 비닐하우스에는 원목 탁자가 놓여있었다. 정수기와 차가 준비된 것으로 보아, 여기는 동네 사람들이 오가며 차 마시고 쉬어가는 쉼터인 듯했다. 동창회에서 가끔 만나 안면이 있던 친구 부인은 귀한 손님 대하듯 반기며 다과상을 차려낸다. 친구는 참 복 많은 사람 아닌가. 훌륭한 선조를 모시며 후덕한 아내와 유유자적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흙내 나는 농기구로 실내장식을 한 비닐하우스에서 달달한 삼박자 커피를 마시며, 소정공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았다.
한 가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족보를 보아야 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의 정보는 인터넷 검색으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무턱대고 믿고 글을 썼다가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필요한 내용을 메모하고 가계도家系圖와 묘산도墓山圖를 사진에 담았다. 이것저것 묻는 내 말에 대답해 해주던 친구는 안채로 들어가 아예 족보를 들고나왔다. 글을 쓰려면 족보에서 참고할 내용이 많다는 것을 잘 아는 친구는 『파평윤씨통례공(사하)파보-坡平尹氏通禮公(師夏)派譜』를 건네며 천천히 보고 가져오라고 한다. 족보를 펼쳐보니 윤곤의 생애와 가계가 눈앞에 훤히 들여다보였다.

윤곤의 본관은 파평으로 고려의 태사太師 윤신달의 14세손이다. 고조부 윤보尹珤는 수첨의정승 영평군鈴平君으로 시호는 문현文顯이고, 증조부 윤안숙尹安淑은 도첨의찬성사요,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할아버지 윤척尹陟 또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으며, 아버지 윤승순尹承順은 개성부사요,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어머니는 단양이씨丹陽李氏로 판도판서 이거경李居敬의 딸이다. 윤곤은 고려말 과거에 급제하여 아우인 윤향尹向과 함께 문학으로 선발되어 임용되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을 때, 이방원을 도와 그 공으로 공신록에 오르고 파평군에 봉해졌다. 태종은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작성했다.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공신들을 거느리고 피를 나누며 천지신명 앞에 언약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제공신회맹명단록-諸功臣會盟名單錄에 이름을 기록한 공신은 모두 65명에 이른다. 그 안에는 물론 ‘추충익재좌명공신 가선대부파평군신윤곤推忠翊戴佐命功臣 嘉善大夫坡平君臣尹坤’ 이라 적은 소정공 이름이 올라있었다.
태종 사후, 세종 역시 학덕 높은 윤곤을 깊이 총애하였다. 평안도 관찰사로 기용되었는데, 그가 떠나기 전에 두 내전께서 불러들여 잔치를 베풀고 격려하며 전송했다. 부임지에 이르러보니 주위에 벼슬아치들이 주색에 빠져 있었다. 명색이 동방예의지국인 나라의 관원들이 할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윤곤은 임기 동안 이러한 문란한 풍습을 바로잡고 학문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그해 가을 의정부참찬으로 조정에 복귀하였고, 이듬해에는 품계가 올라 종1품 이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윤곤은 1422년 3월 11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들은 세종은 조회를 거두고 슬퍼하며 예관을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교서에 이르기를 ‘그릇과 도량이 넓고 크나 자르듯 분명하고, 회포가 분명하고 슬기로우나 까다롭지 않았다. 승정원에서 임금을 도우며 주목州牧의 장이 자주 되었고, 관서 땅을 순문巡問하여 올바르게 잡았다. 옛날 역신이 국가를 어지럽힐 때 오직 경卿이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었다’는 제문과 파주군 동쪽 용지동에 산山을 사패지로 내려 을좌乙坐 언덕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나라에 공훈이 있는 신하는 죽은 뒤에 임금이 그 공덕을 칭송하여 시호諡號를 내렸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윤곤의 시호 논의할 때, ‘모습이 공손하고 아름다움이 소昭이고, 마음이 너그럽고 온화하게 마친 것을 정靖이라 하여 소정昭靖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소정공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국가의 기틀을 바로잡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고,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도 학문을 장려하고 선정을 베푼 인물이다. 사람이 하루하루를 바르게 채워나간다 해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참으로 잘 살았다‘는 평가를 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평생 요직을 두루 거친 권력자가 세상을 떠난 뒤까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파평윤씨 정정공파가 권력을 다투는 과정에서 대윤大尹·소윤小尹으로 갈라져 피비린내 나는 시끄러운 역사를 남기기도 했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곧은 인품과 정성으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소정공 윤곤에게 세상 사람들은 ’복 많은 어른‘이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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