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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례의 비극 – 신수현

신수현 작가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온 건 추석 다음 날 밤 10시 무렵이었다. 목디스크에 좋다는 스트레칭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동작을 멈추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다시 두 팔을 W자로 만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끊어질 기미 없이 울려 퍼지는 벨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우자 소파에 앉아 있던 영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화 안 받아?”

“응, 이것만 마저 끝내고.”

아랑곳하지 않고 요가 매트 위에서 천천히 심호흡하며 몸을 움직이는 나를 힐끔 쳐다본 남편은 읽던 책을 덮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전화는 끊어졌다 다시 울리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결국 동작에 집중할 수 없게 된 나는 초록색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를 말리는 엄마 복례의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휴대폰은 어딘가 팽개쳐진 채 두 사람의 실랑이를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생중계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엄마 혼자 벌이는 일방적인 상황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경석이 아버지, 미쳤어?!”소리를 질렀다가 이내 “여보, 왜 그래요?” 하며 황급히 달랬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가 아버지를 “경석이 아버지”라고 부른 건 정말로 다급할 때 튀어나오는 호칭이었다. ‘아,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나도 모르게 미간이 일그러졌다.

한참 뒤에야 응답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선아! 억울해서 억장이 무너진다. 네 아비가 나를 도둑년 취급을 해!” 엄마는 헛웃음을 들이켰다.

“자초지종을 좀 이야기해 보세요.” 영문을 알 수 없는 나는 염려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조끼가 없어졌다고 저 난리지 뭐냐.” 두 시간 동안이나 온 집 안팎을 샅샅이 뒤졌다고 했다. 조끼에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감쪽같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그 조끼가 왜 그리 중요하대요?”

“그야 모르지. 주머니에 뭐가 들었다고만 하더라. 글쎄, 뜬금없이 조끼를 내놓으라는 거야. 내놓지 않으면 농약 먹고 죽어버리겠다고 난리를 치지 뭐니. 진짜 농약병까지 거실로 들고 왔다니까.”

아버지가 그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엄마를 유일한 범인으로 단정 짓고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는 비이성적인 행동은 처음이었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것이기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까지 했던 걸까. 내가 알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 목소리는 격앙된 채 억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겁을 먹은 듯하면서도 분노가 섞여 있었다. 자신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쳐도 아버지가 곧이듣지 않자, 화를 내다 안 되겠다 싶어 술술 구슬려 농약병을 뺏어 몰래 감춘 뒤에야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지금도 심장이 벌렁대. 자기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데, 내가 언제 우습게 봤다고 그러냐.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똑바로 하라고 했다.” 복례는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울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난감한 노릇이었다. 본인만 모를 뿐, 엄마는 자주 아버지를 숙맥이라 깎아내리며 잘난 체를 했다. 난 옆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핀잔이 늘 마뜩잖았다. 특히 돈에 예민한 엄마는 단돈 백 원에도 유난을 떨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엄마 심부름으로 음료수 한 박스를 사 왔을 때였다. 영수증을 받아 든 엄마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오백 원이나 비싸게 구입했다는 이유로 온종일 아버지를 볶아댔다. 고문 같은 타박을 군소리 없이 견디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내가 다 답답했다. 참다못해 그만하라고 소리치자 엄마는 “오백 원이 누구 집 개 이름이니?”라며 눈을 흘겼다.

통화가 삼십 분을 넘어서자 귀 끝이 얼얼하게 아려 왔다. 수화기 저편 목소리는 점차 톤이 낮아지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엄마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지나온 청춘이 억울하다며 고함을 치다가도, 서러운 울음으로 기구한 팔자를 한탄하곤 했다. 전부 흘러가 버린 과거에 덜미를 잡힌 이야기였다. 여든일곱 해 삶에 우여곡절이 어디 복례뿐이었을까. 세상 건너는 사람이라면 가슴속 말 못 할 못 몇 개쯤 박아둔 채 살아가는 법이다. 산다는 건 본래 그런 법이다. 울부짖어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난 엄마의 통곡을 수백 번이고 더 받아낼 용의가 있었다.

과거라는 굴레에 갇혀 제자리를 맴도는 엄마가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 가슴을 짓누른 건 제 삶의 상처를 남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그녀의 방식이었다. 엄마는 자기 인생에 스스로 진 빚은 단 하나도 없다고 믿는 듯했다. 전화로 받아낸 하소연 중 아홉은 아버지 탓이었다. 모든 비극은 춘길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춘길이야말로 자신을 평생 그늘에 가둬둔 주범이라며 죄목을 읊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먹빛으로 가라앉았다. 책임 전가의 변명을 듣는 것도 힘들었지만 더 큰 이유는 내 안에 불쌍한 아버지를 향한 측은지심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택한 삶이 아니었던가. 등 떠밀지 않은 길이었다면, 어른이란 제 손으로 선택한 삶의 무게를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 엄마가 발작처럼 터뜨리는 서러운 한탄은, 나라는 통로로 온전히 토해내야 비로소 가라앉았다. 흘러간 시간에 매달려 남 원망하는 삶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난 두 눈으로 목격했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엄마의 불행이 내 귀로 묵직하게 스며들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삶을 반면교사 삼아 과거에 갇혀 남 탓하며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된 것만이 엄마와의 통화가 내게 남긴 유일한 교훈이고 위안이었다.

다음 날 아침, 조끼를 찾았으니 걱정 말라는 엄마의 문자가 와 있었다. 막 아침을 차리려는데 곧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조끼는 아버지가 펴둔 이불 밑에서 나왔고, 아버지가 사색이 되어 사과했다며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어제와 딴판으로 의기양양했다. 약점이라도 잡았다는 듯 간간이 웃음까지 흘리는 걸 보니 밤새 입이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싶었다. 복례는 어제의 소동을 처음부터 다시 복기했다. 남편 뒷담화 레퍼토리에 또 하나의 강력한 사건 하나가 추가되고 말았다.

*

춘길은 말이 없는 사람이다. 입에 풀칠이라도 해놓은 듯 침묵을 사랑했다. 엄마는 자주 답답하다고 토로했지만 난 아버지의 고요함이 좋았다. 침묵이야말로 섣부른 말보다 정직하게 마음을 건네는 언어라 생각한다. 수백 마디 소음보다 깊은 정적 하나가 더 진실한 법이다. 그렇기에 세상의 타박을 삼켜내던 아버지의 침묵은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센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아버지의 인내심은 독보적이었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성실했다. 엄마의 입을 통해 날조되던 그 무능한 위인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올해 아흔셋이 된 아버지는 6·25 전쟁통에 북에서 내려왔다. 열일곱 어린 학생 손에는 영문도 모른 채 총 한 자루가 쥐어졌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어린 나이에 죽음의 공포로 떨어야 했다. 남한을 선택한 아버지는 직업군인으로 살았다. 군 생활 칠년 차쯤 상급자 소개로 복례를 만났다. 뽀얀 살결에 복스럽게 생긴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고 복례 역시 배우처럼 잘생긴 춘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단숨에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신혼의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춘길이 복례를 만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부대에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아버지는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은 채 일 년간 영창에 갔다. 당시 군 영창은 멀쩡히 나오지 못한다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하필 그 무렵 복례의 몸에 새 생명이 잉태되고 있었다. 복례는 임신 기간 내내 춘길을 증오했던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춘길이 첫째 아이 경석이를 유독 미워했다고 믿었다. 결국 경석이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죽자 복례는 이 모든 비극이 춘길 때문이라며 그를 거세게 원망했다. 그러고는 수화기 너머 나를 향해 악의 차게 소리쳤다. “경석이도 네 아버지가 죽인 거야!”

*

복례가 가장 사랑하고 의지했던 장남 경석 오빠는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삼 남매 중 성격이 가장 밝고 정이 많아 오지랖도 넓었다. 밤거리를 방황하던 가출 여고생들을 선의로 집에 재워주었다가 억울하게 미성년자 성폭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구치소 면회를 다녀온 엄마는 오빠의 누명을 벗기려 고발자의 주소를 얻기 위해 매일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찾아가 법원 서기에게 애원했다. 복례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인 서기에게 주소를 받아낸 엄마는 고발했던 학생을 찾아갔다.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 돈을 뜯어내려 벌인 일이라는 진술을 받아냈고 마침내 오빠는 무죄로 풀려났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던 엄마의 끈기와 집요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훗날 엄마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이곤 했다. ‘내가 그때 네 오빠를 꺼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부질없는 후회를 얹는 엄마의 목소리가 처량하게 들렸다. 자식을 가슴에 먼저 묻은 어미의 마음에 평생 뽑히지 않을 대못이 깊게 박혀 있었다. 장남과의 영원한 이별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오빠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열일곱에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홀로 남한에 내려왔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가출한 지 삼 개월 만에 경석은 편지를 보내왔다. 숙식을 제공하는 주유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안부를 전했다. 복례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한참을 흐느끼며 눈물을 쏟아냈다. 타지에서 고생할 아들 생각만 했던 엄마는 그제서야 비로소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었다. 가끔 엄마는 늦은 밤 ‘보고싶은 아들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곤 했다.

복례에게 경석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금쪽같은 존재였다. 남편이 아들을 까닭 없이 학대하고 몰아세울 때마다 가슴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버지는 유독 경석에게만 몽둥이를 들었다. 엄마는 두 사람 사이에 살(煞)이 껴서 그렇다며 살풀이라도 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평화롭던 집안도 두 사람이 마주치면 순식간에 사자와 사슴이 맞선 정글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버지가 오빠를 미워하면 할수록 엄마의 마음은 오빠에게 더욱 쏠렸고, 아들을 향한 지독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집을 나간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오빠는 명절마다 시골집을 찾아왔다. 큼직한 카메라로 가족사진을 찍어주고 직접 찍은 서울 풍경도 보여줬다. 식구들은 제 모습이 담긴 사진에 다들 탄성을 질렀다. 선물해 준 카세트 플레이어로 노래를 들으며 즐거워하는 가족을 보며 오빠가 짓던 흐뭇한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중학생 때 언니와 함께 오빠의 일터인 경양식집에서 맛본 스테이크 맛은 지금도 혀끝에 선명하다. 줄지어 배열된 포크와 나이프에 잔뜩 주눅 들었지만 오빠가 방법을 친절히 알려줬다. 경석은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

아버지의 전화 한 통을 받고 오빠는 서울 생활을 정리한 채 돌아왔다. 타지에서 생활한 지 십삼 년 만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의 운전기사가 그만두어 난감해하던 차에 성실했던 아버지를 신임한 사장이 군 운전병 출신 경석을 채용해 준 덕분이었다. 나는 오빠의 귀환이 더없이 기뻤다. 밥상 찬거리부터 달라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반길 만했다. 집안에는 전에 없던 웃음꽃이 피어났다. 경석은 가끔 아재 개그로 가족을 웃겼다.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의 사자 같던 눈빛은 사라지고 눈동자는 깊고 순해졌다. 마치 아버지와 오빠에게 걸렸던 저주의 마법이 스르르 풀린 것 같았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얄궂은 운명은 집안의 평화를 가만두지 않았다. 회사 경리로 일하던 은정이 오빠에게 끈덕지게 마음을 붙이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거절해도 상대의 그치지 않는 집요한 구애에 불길해진 엄마는 용하다는 점집을 찾았다. 아버지를 통해 몰래 알아낸 생년월일을 내밀고 돌아온 날 엄마는 마당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둘이 얽히면 오빠가 목숨을 잃는 지독한 악연이었다. 엄마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라며 오빠의 바짓가랑이를 잡았고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은정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애원했지만 돌아온 건 그딴 건 다 미신일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타박뿐이었다.

여름휴가가 시작되던 날, 경석은 동네 친구들과 함께 계곡으로 피서를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경석이 위독하다는 황망한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여섯 시간을 달려 울산에 도착했지만 이미 서늘한 시신으로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간 친구들은 오빠가 물놀이를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황급히 둘러댔지만, 아들의 몸에 입혀진 발목까지 오는 긴바지가 엄마 눈에 걸렸다. 복례의 날카로운 직감에 다그쳐 묻자 친구들은 결국 진실을 털어놓았다. 은정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친구들이 오빠에겐 단 한마디 묻지도 않은 채 그녀를 피서길에 동승시켰던 것이다.

계곡에서 은정이 튜브를 놓치고 깊은 물에 빠지자 수영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오빠는 남을 살려야 한다는 본능 하나로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튜브를 던져 그녀는 구해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차가운 물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도 오빠는 망설임 없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바보 같을 만큼 지독했던 그 이타적인 성정 탓에 엄마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악연의 궁합은 피할 수 없는 잔인한 비극으로 적중하고 말았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 오빠의 선함이 역설적이게도 우리 가족의 평화를 송두리째 앗아가는 비수가 되어 돌아온 순간이었다.

오빠가 죽던 날 나는 고등학교 마지막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수십 년 만의 무더위라 떠들었고 가족들은 선풍기 앞에서 수박을 먹으며 더위를 몰아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부모님을 택시에 태워 보낸 뒤 난 대문을 잠그고 전화기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배고픔도 잊은 채 잠들었다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어둑했다.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아버지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난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만 주억거리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슬픔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거짓말 같았다. 띠동갑이던 오빠는 아침까지만 해도 나를 꼬마 취급하며 머리를 다정하게 헝클어뜨렸다. 오빠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다. 죽음이란 이토록 허망한 것이었던가. 내 인생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들을 잃은 엄마는 한동안 넋을 놓아버렸다. 누가 보아도 제정신이 아닌 모습이었다.

“네 아버지가 집으로 불러들이지만 않았어도 죽지 않았을 텐데……”

엄마는 온 세상을 향한 원망을 오롯이 아버지 한 사람에게 쏟아내며 매일 그 말을 중얼거렸다. 서울에서 제 몫을 하며 잘 살아가던 아들을 굳이 집으로 불러들여 죽음의 길로 떠밀었다며 모든 비극의 죄를 아버지에게 뒤집어씌운 채 오열했다. 그 섬뜩한 집착과 원망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지독한 슬픔이 분출하는 비명이자 몸부림이었다.

오빠가 세상을 떠난 것이 진정 아버지 탓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 삶에서 확실한 것이라곤 오직 죽음뿐이다. 나머지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매일 그 유일한 확신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공평하게 찾아오는 진리도 없다.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처럼 오빠에게 허락된 삶의 시계가 딱 거기까지였을 뿐이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정해진 죽음이라는 거대한 운명과 맞닥뜨렸을 때 인간의 의지나 원망 따위는 무력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그저 정해진 순번에 따라 삶을 묵묵히 놓아줄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

복례가 유독 나에게 집착하는 것은 삼 남매를 낳았으나 사실상 자식이라곤 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여덟 살 많은 미숙 언니는 친정에 완전히 발길을 끊은 지 이십 년이 넘었다. 경석 오빠는 죽음으로 세상을 등졌고, 미숙 언니는 의절(義絶)로 엄마의 삶에서 떠나갔다. 난 언니와 한동안 이메일로 안부를 나누며 가느다란 끈을 이어갔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 끊어지고 말았다. 엄마와 언니 사이의 균열은 아득한 옛날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언니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몰래 일기장을 펼쳐 본 엄마는 도저히 믿기 힘든 문장 하나와 마주해야 했다. “나의 친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시고 지금 계신 엄마는 가짜다.”

뒷날 그 엉뚱하고도 서늘한 문장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기가 차고 황당하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엄마가 자식들을 살갑고 따스하게 품어주는 성품은 아니었을지언정, 단 한 번도 내 엄마가 아니라고 의심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일기장을 읽는 순간 손이 덜덜 떨리고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던 복례의 고백 뒤에는 자식에게 부정당했다는 억울함과 통제할 수 없이 치밀어 오르는 거대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어긋난 시선은 결국 서로의 가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냈다. 돌이켜보면 언니의 그 굴절된 서러움이 전적으로 혼자만의 오해는 아니었던 것임을 난 직감적으로 알았다. 언젠가 엄마가 나에게 불현듯 툭 던지듯 털어놓은 고백에 진실이 담겨 있었다.

“네 아버지가 공부 잘한다는 이유 하나로 네 언니만 끼고 돌아서… 내가 미숙이를 좀 미워하긴 했었다.” 참으로 얄궂게도 삼남매 중 엄마의 외모와 성격을 쏙 빼닮은 이는 다름 아닌 언니였다. 누가 보더라도 언니는 복례의 완전한 분신이자 거울이었다.

반면 나는 온전히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딸이었다. 엄마는 “넌 욕심 없는 것까지 네 아비를 쏙 빼닮았다”며 혀를 차듯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엄마의 그 서운한 핀잔은 내가 타인에게 너그럽고 부드러운 손길을 내밀 때마다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누군가에게 마음이나 물건을 베풀 때면 엄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허허거리며 살다가는 세상 사람들이 너를 호구로 알고 업신여긴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나는 늘 엄마의 말에 군말 없이 순종하는 착한 딸이었다. 막 사회에 첫발을 디뎠을 때, 엄마는 사람들에게 절대 착하게 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내가 어릴 적, 착하다며 쓰다듬던 그 손길은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어릴 땐 착한 아이가 되라 가르쳐놓고, 이제 와 착함은 곧 무능이자 미련함이라 말하니 머릿속이 아득하도록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결국 나를 향한 지독한 이기심이었다. 엄마 자신에게만 한없이 순종하는 착한 딸이 대되 타인들에게는 차갑고 인정머리 없이 굴라는 모순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수화기 너머로 언니를 향한 억울함과 속상함을 토해냈다.

“부모 은혜도 모르는 천벌 받을 년!”

통화의 끝은 늘 욕설이었고, 엄마의 세계에서 언니는 이미 배은망덕한 딸로 낙인찍혀 있었다. 삼십 분 넘게 통화하다 보면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 대상이 아버지에서 언니로 바뀌었을 뿐 쏟아지는 감정의 찌꺼기는 그대로였다. 나는 언니를 이해한다. 아무리 혈육이라 한들 마주칠 때마다 베인다면 인연의 끈을 가위질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견딜 수 있는 자는 남고 견디지 못하는 자는 떠나는 법이다.

각자의 영역으로 물러나 서로를 흔들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태도일 터였다. 어쩌면 언니는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기에 자신을 지키고자 떠난 것뿐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평소 자신을 가리켜 뒤끝 없이 단호하고 화끈하다는 이른바 ‘아쌀한 사람’이라 자부하곤 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그 부러질 듯 강한 성정까지 복례와 미숙은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급기야 엄마가 미숙언니마저 친정과 연을 끊은 게 아버지 탓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틀어졌다.

“제발 남 탓 좀 그만하세요! 그게 왜 아버지 탓인데요!”

엄마의 얼굴을 마주한 채 고함을 질러대고 싶었지만, 나는 ‘착한 딸’이라는 굴레에 갇혀 비명을 삼켜내고 말았다. 화를 내기보다 홀로 참아내는 편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바다만큼 깊은 인내심으로 살았던 아버지를 빼닮은 딸이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침묵이라는 오랜 습관 속으로 숨어들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언니에게 ‘이분이 네 친엄마가 맞다’고 보증이라도 서줬어야 했다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너를 낳던 순간을 똑똑히 보았노라고 증언해 주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큰 잘못이라고 말했다. 언니가 일기장에 적은 ‘친엄마’는 생물학적 혈연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마른오징어 다리를 딸에게는 주지 않고 제 입으로만 쏙 집어넣던 무심함. 일상 속 작고 차가운 박정함들이 언니의 가슴에 매번 상처로 남았던 것이다. 언니는 골반과 엉덩이가 넓어진 이유조차 체형을 잡아줄 거들 하나 사주지 않은 엄마 탓이라 여겼다.

딸이 아닌 아들이었다면 진작 그 돈을 얻어냈을 거라는 확신에 억울함과 짜증이 밀려왔다고 했다. 언니는 어릴 적 나를 붙들고 엄마는 아들이 바라는 것만 손에 쥐여준다며 서러운 불만을 토해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어린 동생에게 하소연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장땡”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시절 사회적으로 학습된 부분을 온전히 엄마만의 죄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엄마 역시 여자의 삶이란 그래야 한다고 주입받고 살아온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그늘이었을 테니 말이다.

*

복례는 지독하게 움켜쥐는 사람이었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좀처럼 빠져나오지 않았다. 군부대 앞에서 구멍가게를 꾸려가던 시절, 일을 돕던 나는 군인들이 라면 열 개를 주문하면 아홉 개만 냄비에 넣던 엄마의 손길을 목격했다. 그 야박한 속임수에 어린 나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은행 창구 출신이라 암산만큼은 빨랐던 엄마였기에 처음엔 실수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의도적인 눈속임이 되풀이되는 순간 신뢰는 허물어졌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마’라는 존재와 까마득한 정서적 거리를 느끼며 멀어져 갔다.

엄마가 세상 물정 모르고 눈치도 없다며 아버지를 타박할 때마다 내 마음은 아려 왔다. 말없이 굽은 등을 한 아버지는 바라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 깊고 쓸쓸한 눈망울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깊은 외로움이 전해왔다. 아버지는 보청기를 끼어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염증 때문이라며 자주 빼버렸다. 답답해진 엄마가 나에게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이란 내 불편함을 무릅쓰고라도 상대가 원하는 방식을 지켜봐 주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내가 답답하다고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욕심이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

고구마를 캤으니 가져가라는 연락에 친정 문을 열었다. 소파에 묻혀 앉은 엄마는 백 번도 더 들은 옛이야기를 처음 꺼내는 비밀처럼 풀어놓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영혼 없는 추임새를 얹을 뿐이다. 세월이 흘러 늙어가면 나 역시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쓸쓸한 계절을 맞게 되는 걸까. 이윽고 엄마는 일주일 전 아버지의 ‘조끼 소동’을 다시 들먹였다. 아버지는 바로 옆에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감춘 채 귀를 기울이는 착한 딸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아버지는 나를 불러 조끼 안주머니 깊숙이 간직하던 빛바랜 편지 봉투를 꺼내놓았다. 겉면에 적힌 ‘아버지께’라는 글씨는 틀림없는 경석 오빠의 필체였다.“……오빠가 보낸 편지예요?” 아버지는 1990년 봄날의 기억을 꺼내놓으셨다. 지난날 폭력으로 아들을 짓눌렀던 허물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먼저 보냈고 일주일 뒤 받은 답장이 이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서른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온기를 그 오랜 세월 품속에 간직해 왔던 것이다. 그리움이 밀려드는 날마다 조용히 꺼내 쓸어내리셨다던 고백에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눈빛으로 읽어봐도 되겠느냐 묻자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빠의 편지 >

아버지, 저 경석이에요.

일주일 전, 아버지의 편지를 읽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나직하게 밀려드는 아버지의 진심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일주일 내내 제 머릿속에는 아버지의 문장들이 끊이지 않고 맴돌았습니다. 낱말 하나하나가 마음속을 오롯이 유영하며 나날을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왜 진작 제가 먼저 아버지께 글을 올리지 못했을까요. 오랫동안 마음을 다잡으며 수없이 펜을 들었지만 수십 장의 종이만 버렸습니다. 혹여 제 부주의한 말이 아버지의 마음에 짐이 될까. 선뜻 다가서기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열일곱,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나이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월급은 한 푼도 주지 않겠다던 주유소 사장의 야박한 조건 앞에서도 저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저 밤이면 몸 하나 뉘일 조그만 구석과 끼니를 채울 한 그릇의 밥만 있다면 무엇이든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낯선 타향에서 맨몸으로 부딪히며 혹독하게 고생한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따뜻한 온기를 누렸던 지난날의 제가 얼마나 복에 겨운 아이였는지를 말입니다.

한 달 전 아버지가 제게 전화를 걸어 “아비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오셨을 때 저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기뻤습니다. 홀로 타지에서 자취하며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결코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이제 저도 나이를 먹었으니 다시는 아버지 눈 밖에 날 행동을 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제게 매를 드셨을 때마다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셨던 건 집 뒤편에 숨어 몰래 담배를 피우다 걸렸을 때였지요. 중학교 3학년 때 또래들에게 배운 담배를 끝내 끊지 못하고 피우고 있었는데 그때 어디선가 달려온 엄마가 아버지 허리춤의 가죽 띠를 잡아당기며 말리는 바람에 아버지는 몇 대 때리지도 못하고 작대기를 던져버리셔야 했지요.

그때는 몰랐지만 철이 들고 보니 아버지의 매가 아프지 않았던 건 차마 힘을 실어 때리지 못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을 뛰쳐나간 그날 아침의 서러움도 기억합니다. 게으른 꼴을 못 보시던 아버지는 늦잠 자던 저를 어떻게든 일으키려 하셨는데 그날은 과하셨지요. 잠든 얼굴 위로 찬물이 쏟아졌을 때 제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습니다. 젖어 드는 이불 속에서 저는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더는 견딜 수 없었고 저 하나 사라지는 게 가족 모두의 평화를 위한 길이라 믿었습니다.

“용서해다오.”편지 말미에 꾹꾹 눌러쓴 그 문장을 마주한 순간 저는 결국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용서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끝났습니다. 아버지는 그저 못난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당신이 아는 가장 서툴고 투박한 길을 선택하셨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아버지는 삶이 얼마나 혹독하고 무서운 것인지 몸소 살아내며 뼈저리게 아셨던 거지요. 나약한 아들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지 내내 안절부절못하셨던 겁니다. 당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으르렁거리며 매를 들 수밖에 없었던 그 외롭고 애타는 마음을 철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칠게 표현되었지만, 그것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나름의 서툰 방식이었습니다.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지만 아버지는 그 방법 말고는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모르는 분이셨겠지요. 매를 때려서라도 자식을 바르게 키우고 싶었던 진심을 제가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제 서른입니다. 저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따뜻하고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엄마가 해주시는 구수한 된장찌개 하나로도 온 마음이 그득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덕분입니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를 원망하던 열일곱의 경석이는 없습니다. 아버지께 감사하는 서른의 경석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지나간 과거는 흘러간 바람일 뿐입니다. 이제 그 서러운 기억은 다 놓아주세요. 지나간 시간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숨 쉬는 바로 지금이니까요. 아버지와 저,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습니까. 아버지 바람처럼 저 역시 한 일터에서 땀 흘릴 수 있어 매일이 감사합니다. 회사가 문 닫는 날까지 오래도록 함께 일해요. 그 옛날 저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차가운 눈빛 대신 요즘 저를 바라보아 주시는 그윽하고 따뜻한 눈길이 저를 살아가게 합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많이 사랑합니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난 편지를 읽는 내내 목이 메어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평생 표현에 서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먼저 고개를 숙여 용서를 구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무뚝뚝하지만 속 깊던 두 남자는 편지라는 문을 통해 이미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이 편지 이야기…… 엄마한테는 왜 안 하셨어요?”내가 잠긴 소리로 묻자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네 엄마한테 보여주면 또 글귀 하나하나를 들먹이며 탓할 땔감으로 삼을 게 뻔하다. 이건 나와 경석이, 두 사람만의 비밀이다. 내가 눈을 감을 때까지 절대로 비밀이다.”

아버지는 무한 반복되는 아내의 푸념을 듣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며 나지막이 고백했다.

“이건 네 엄마한테 진짜 비밀인데…… 내가 요즘 보청기를 빼놓고 사는 이유가 다 그것 때문이다. 안 들리면 속이 편하니까.”

작전에 멋지게 성공한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무구하게 웃어 보이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도 이제는 좀 평화롭게 살고 싶다. 네 엄마 잔소리, 아주 지긋지긋하다.”

나는 소리를 차단한 채 고요 속으로 숨어든 아버지가 지혜롭게 느껴졌다. 오랫동안 복례의 원망과 쏘아붙이는 듯한 말을 받아내며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버텨오셨던 걸까. 나 같았으면 진작에 정신을 놓아버렸거나 먼 곳으로 도망쳤을 것이 분명했다.

엄마를 사랑하노라 나지막이 고백하는 아버지는 언제나 아내와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서러운 한탄을 견뎌내며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깊은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비로소 얻어낸 참으로 소박하고 고요한 평화였다. 보청기를 빼놓으며 어린아이처럼 웃어 보이던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아버지는 그 긴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엄마를 향한 사랑을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모질고 강력한 풍랑이라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이라는 뿌리가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을 테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빗나간 집착과 무한히 반복되는 옛이야기 앞에서 참아낼 수 있는 까닭은 그 왜곡된 굴레 밑바닥에 깔린 엄마 나름의 서툰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가슴으로 짊어지고 견뎌내야 할 몫이 있음을 아버지와 나는 잘 알고 있다. 더 이상의 ‘복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나 또한 아버지처럼 마음의 보청기를 가만히 빼버린 채 엄마의 억울함과 원망을 가만히 보듬어 안을 것이다. 듣고 싶은 온기만 가슴에 담고 듣기 싫은 이야기는 침묵 속으로 흘려보내면서 말이다. 아흔이 넘은 부모님이 건강하게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자식이다.

엄마가 내 양손에 쥐여준 비닐봉지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그 안에는 고구마와 들기름 두 병, 껍질을 깐 후 데쳐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고구마 줄기까지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딸, 어서 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복례는 평생 자신을 괴롭혀온 억척스러운 여자다. 순수하고 착하기만 한 아버지와 살면서 그 강인함마저 없었다면 진작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 났을지 모른다. 방금 전 아버지를 향해지었던 나의 환한 웃음은 이제 엄마라는 서글픈 존재를 향해 조용히 옮겨가고 있었다. 자글자글 주름진 얼굴 위에 새겨진 세월을 보며, 비로소 버텨낸 삶의 무게를 읽는다. 불현듯 엄마에게 깊은 연민이 밀려왔다. 오후의 서늘한 가을바람 속에서 나의 미소는 씁쓸하면서도 아늑하게 번져가며 좁아진 엄마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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