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의 검은 보석, 석탄-강근숙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우리나라 산은 해가 갈수록 민둥산이 되어갔다. 황폐한 산을 복구하려고 온 국민이 힘을 모으던 1960년대 강원도 지역에서 무연탄이 대량 생산되었다. 정부가 연탄을 저렴하게 보급하여 취사와 난방을 해결하면서 벌거벗은 산은 울창한 숲으로 되살아났다. 산에서 땔감을 구해다 방을 덥히던 구들장 구조에서 파이프를 깔아 방 전체를 데우는 온수 보일러로 바뀌었고, 아궁이마다 불을 지펴 밥을 하던 주부들은 연탄불 위에 솥을 올려놓고 손쉽게 끼니를 준비할 수 있었다. 연탄은 농촌의 바쁜 일손을 덜어주고, 산을 푸르게 지켜준 일등 공신이었다.

파주의 문화관광해설사들이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던 태백을 찾았다. <태백석탄박물관>에는 석탄산업 변천사를 한곳에 모아 역사자료를 보관하고, 광부들 삶의 기록과 탄광 개발사를 전시해 놓았다. 지질관에는 지구 탄생부터 시작하여 화산 폭발과 지구를 구성한 물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암석, 광물, 화석의 역사가 시대별로 정리되어, 고생대 만들어진 석탄을 채굴하여 연탄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알기 쉽게 보여준다. 수억 년 동안 고대 숲의 식물이 죽어 산소가 적은 환경에서 열과 압력을 받아 형성된 화석, 이것이 땅속의 검은 보석 석탄이다.

석탄은 처음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인간이 석탄을 이용한 역사는 약 3,000년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사기』에 ‘신라 진평왕 31년(609) 모지악毛只嶽 산지가 불타 연기가 났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현재 포항시 영일만 일대 갈탄 매장지로 추정한다. 갈탄은 지표면에 노출될 경우 자연 발화하는 특성이 있어, 옛사람들은 이를 통해 석탄의 존재를 처음 인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1910년부터 한반도 전역 지질 조사를 통해 영일군에 많은 갈탄이 매장된 것을 알아냈고, 조선의 광업권을 장악했다. 자국의 부족한 산업 연료와 전쟁 에너지로 활용하기 위해 채굴한 갈탄을 일본으로 실어갔으며, 자원수탈은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 8월까지 이어졌다.
강원도 지역의 무연탄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갈탄 채굴은 점차 중단되었다. 석탄은 국민 생활 연료이자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 중요한 화석 에너지였다. 석탄산업이 번성했던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전국적으로 347개의 탄광이 있었고, 이중 대형 광업소는 대부분 강원도 태백과 삼척, 정선, 영월 지역에 몰려 있었다. 특히 태백은 전성기에 45~50개의 탄광이 쉼 없이 돌아가며 도시 전체가 활기로 넘쳤다. 갱도 속에서 목숨 걸고 일한 광부들은 위험수당 덕분에 일반 직장인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기에, 태백은 현금이 돌고 도는 풍족한 도시였다.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해 퇴근길에 대포 한잔을 기울였고, 온종일 탄가루를 마신 컬컬한 목을 씻어내기 위해 기름진 고기와 국물 있는 닭갈비를 즐겨 먹었다. 태백에서의 저녁은 ‘물 닭갈비’였다. 닭갈비에 국물을 자작하게 붇고, 버섯과 채소를 듬뿍 넣어 끓이면 양도 많고 국물맛이 시원했다. 물 닭갈비에 술 한 잔을 곁들이며, 광부들의 애환이 서린 저녁 풍경을 그려보았다.

박물관 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가면 갱도 깊이 700여 미터 체험 공간이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 공간에는 광부들의 채광 모습과 불규칙하고 경사진 탄층에서 석탄을 옮기는 장면이 재현되어 있다. 막장에 안전한 인도를 만들기 위해 세워진 버팀목, 채광하러 가는 길에도 갱목을 등에 지고 운반하는 모습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짐작하게 한다. 갱 안의 간이 사무실은 밥을 먹거나 작업을 관리 하며, 지상과 연락할 수 있는 통신 시설과 가벼운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구급약이 비치되었다. 한번 들어가면 온종일 탄가루를 마시며 목숨 건 극한의 현장에서 석탄을 캐는 과정을 보고서야 광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일한 덕분에 우리가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전국 석탄 생산량의 70%를 점유하고 있는 강원도는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보고였다. 에너지 부족 상태에서 석탄 보급은 산업발전의 불길을 지폈으며, 국민 생활환경을 현대식으로 바꿔놓았다. 광부들은 자녀 학자금이 대학까지 전액 지원되었기에 가족을 위해 기꺼이 젊음을 바쳤다. 그러나 작업 현장에서 갱도가 무너져 목숨을 잃거나, 막장에 갇혀 사투를 벌이는 일도 끊이지 않았다. 1967년 8월, 충남 청양 구봉광산 지하 125미터 지점에서 채굴 작업 중 양창선씨가 매몰되어 온 국민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졸였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장화에 받아 목을 축이고, 주변의 비닐과 가마니로 체온을 유지하며 암흑의 시간을 버텼다. 갱도에 전화선을 찾아 “나 여기 살아있어요” 외치며 지상과 연락을 이어갔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갇힌 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버틴 열닷새, 극적으로 구조된 그의 이야기는 탄광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기억된다.

광부의 가족들은 늘 불안 속에 살았다. 사고가 잦은 탄광에서 가장의 안전을 기원하며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도시락을 쌀 때도 절대 네 주걱은 푸지 않았고, 신발은 바깥쪽을 향해 놓지 않았다. 여자는 탄광 근처에 가지 않았으며, 출근길을 앞지르는 것도 금기였다. 꿈자리가 사나우면 그날은 무조건 쉬었고, 갱도에 들어갈 때 뒤를 돌아보는 것은 죽음을 암시한다고 믿었기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광부들에게 쥐는 공동체였다. 예민한 쥐는 감각으로 붕괴나 가스 유출을 먼저 알아채고 도망갔기 때문에, 쥐가 보이지 않거나 갑자기 사라지면 광부들도 즉시 작업을 멈추고 대피했다.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막장에서 벗어나 환한 하늘을 볼 때, 그제야 ‘이제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캐내다 목숨을 잃은 광부들, 산업전사 위령탑에는 1940년부터 1999년까지 강원도의 여러 광산에서 희생된 광부 이름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석탄을 캐다 목숨을 잃은 광부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일제는 1928년 태백지역에 양질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고, 석탄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앞세워 개발을 시작했다. 기계와 동력이 부족했던 시절, 정釘과 망치로 암반을 깨고 석탄을 일일이 등짐으로 날랐다. 공식적으로는 기록된 희생자는 4,500여 명이라 하는데, 강제 노동과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기록되지 않은 희생자와 진폐증으로 숨진 이들까지 합하면 1만여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석탄은 국가를 살린 에너지였지만, 그 빛은 수많은 광부의 목숨 위에 세워진 것이다. 위령탑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겨울은 따뜻했고, 산업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연탄 대신 석유와 가스(LNG)가 보급되었다. 강원도를 포함한 전국 탄광은 서서히 문을 닫았고, 값싼 수입 유연탄이 들어오면서 국내 광산은 경제성을 잃었다. 우리나라 탄광은 지하 수백 미터를 내려가야 하는 위험이 뒤따라 인건비가 높았지만, 수입 유연탄은 대규모 노천 광산에서 채굴되므로 생산 단가가 낮았다. 1988년까지 전성기였던 탄광은 그 이후 10여 군데밖에 남지 않았고, 2023년에 전남 화순광업소, 2024년에는 태백의 장성광업소가 폐광되었다. 강원 삼척의 도계광업소가 2025년 마지막으로 문을 닫으면서 1936년 석탄 채굴 후, 국영·공영 탄광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강원 삼척의 민영 탄광 경동상덕광업소 역시 정부와의 조기폐광 합의에 따라 가동 종료를 앞두고 있다.
태백 석탄전시관에는 파독 광부, 파독 간호사 자료도 전시되었다. 서독은 2차 대전 이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노동력이 부족했고, 반면 대한민국은 실업률 문제를 겪고 있었다. 1963년 ‘한독근로자 채용협정’을 체결하여 광부의 모집이 시작되었다. 국내 직장인 월급에 8배의 높은 임금과 좋은 환경을 내세우며 정부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1차 파독 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천여 명이 몰려들어 1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고학력자로, 한국의 젊은이들은 독일인들이 꺼리는 광부와 간호사가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치렀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7명의 광부와 11,057명의 간호사가 파견되었고, 그들의 헌신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한국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60년대 한국 서민들의 삶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를 밑도는 세계 최고 가난한 나라였다. 쌀이 부족해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감자 옥수수로 끼니를 때우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 시대 사람들은 세상 탓,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다. ‘오늘은 가난해도 내일은 잘 살거다’는 희망 하나를 움켜쥐고 치열하게 살았다. 우리에겐 됫박 쌀에 새끼줄에 꿰인 낱장 연탄을 사서 하루를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쩌다 쌀 한 말, 연탄 백 장 들여놓으면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푸근했다. 지금도 6만여 가정에선 연탄으로 겨울을 나지만, 몸을 태워 온기를 전하는 뜨거운 심장이 있는 한 찬바람 부는 골목에도 봄날이 머지않았다. 연탄 한 장은 단순 시린 몸을 녹여주는 난방 연료가 아니라, 가난을 이겨내는 희망의 불씨였다.
우리나라는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발전했다. 세계경제력 10위권을 오르내리며, 군사력과 기술 혁신 분야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다. 1970년대 산업의 기초인 철강, 조선업 등 중화학공업으로 기틀을 다졌고, 오늘날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스마트폰 등 최첨단 산업은 현재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이 눈부신 발전 뒤에는 1960년 이후 나라 안팎에서 목숨 걸고 피땀 흘린 산업전사들이 있었다. 광부들이 캐낸 석탄은 국민 생활의 연료이자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고, 가족을 떠나 지하 1,000미터 어두운 막장에서 탄가루를 마시며 흘린 눈물은 경제 개발의 초석이 되었다. 풍요한 삶을 누리는 오늘, 우리는 그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개인사가 곧 대한민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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