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 암각문을 기록하다[3편] – 강근숙
8. 열쇠는 계축모춘癸丑暮春에 있었다
구유암龜遊巖 방서에 ‘계축모춘癸丑暮春’ 영회대永會臺 방서에는 ‘세재계축모춘歲在癸丑暮春’이라 새겼듯이, 계축년 늦은 봄날 백이십여 명의 선비들이 이 계곡에 모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외형을 떠나 정신세계를 가다듬는 선비들의 삶은 담백하고 인품은 고결하다. 시회詩會의 장소이며 청유淸遊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한 것은 자연의 풍취를 즐기기 위함이다. 과연 어느 시대 계축년이었을까. 화사한 봄날 명산으로 꽃구경을 나왔다면 상서롭지 않은 일은 아닐 터, 전국에서 모여든 문사들이 지필묵을 앞에 놓고 시흥詩興에 젖어 곡수유상을 즐긴 백학산 골짜기는 일대의 장관을 이루었으리라.
9. 선비들의 놀이문화 곡수유상曲水流觴
계곡 흐르는 물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워놓고 일필휘지 시를 지어 읊으며 즐기는 곡수유상은 선비들의 대표적인 놀이였다. 왕희지 난정기 고사를 모방하여 동양의 왕궁에서는 오래전부터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의 유배거流杯渠가 만들어졌다. 중국 베이징의 고궁에도, 일본 나라시 헤이조궁 유적에도, 조선의 왕궁 창덕궁 옥류천 소요암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역사 곡수유상은 신라 시대로 동양 삼국에서 가장 오랜 것으로 추정한다. 나라의 무사안일을 기원하며 남산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뒤풀이로 연회를 즐기던 포석정은 현재 별궁 건물은 사라지고 연회를 위해 만든 구불구불한 도랑만 전설처럼 남아있다.

조선 시대 신하들과 풍류를 즐긴 임금은 문예 군주로 불린 정조였다. 즉위 첫해,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설치한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국정이 안정되자 관원들과 1788(정조12)년부터 매년 봄 창덕궁 후원에서 정기적으로 상조회賞釣會를 가졌다. 나랏일을 잠시 잊고 군신 간의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나눈 시문詩文을 모은 두루마리 내원상화갱재축 5점이 전해온다.
『고궁문화』에 실린 꽃구경 시詩 모음을 읽고 그 전경을 그리다가 늦은 봄 창덕궁 후원을 찾았다. 낚시를 하며 시를 짓고 곡수유상을 베풀었던 부용정, 농산정, 옥류천은 왕가의 정원답게 운치가 넘쳤다. 소요암을 깎아 샘물을 끌어들여 맑은 물이 바위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한 옥류천에는 ‘玉流川’이라 쓴 인조의 어필과 일대 경치를 읊은 숙종의 오언절구五言絶句가 새겨있다. 봄날 옥류천 바위틈에는 돌단풍이 하얗게 꽃을 피웠고, 바람에 흩날린 꽃잎이 수놓은 물줄기는 비단결 같았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內苑賞花壬子賡載軸 서문에는 정조는 ‘연상림상화조어운 병서-聯上林賞花釣魚韻 並序’라 적었다. 1792년 3월, 꽃구경하고 낚시의 고사를 따르고자 하여 각신閣臣과 그 자제들을 불렀다. 부용정에서 열린 상조회賞釣會는 훗날 순조가 되는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농산정籠山亭에서 꽃구경을 하고, 수택재水澤齋에서 고기를 낚고, 춘당대春塘臺로 옮겨 과녁에 활을 쏘았다. 주찬酒饌을 내린 후 운자韻字를 나누어 연구시聯句詩를 지었는데, 이때 지은 연구시축이 바로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이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內苑賞花壬子賡載軸은 어떤 뜻일까. 내원內苑은 후원의 다른 이름이고, 상화賞花는 꽃구경을 의미한다. 임자壬子는 1792년, 갱재賡載는 임금이 시문을 지으면 신하들이 이어 짓는 것을 뜻하며, 축軸은 두루마리다. 정조는 어제서御製序에 ‘원자와 어울려 여기에서 즐거이 노닐어 대대로 수많은 자손까지 변함없는 것이 장차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므로 여기에 기록하여 둔다’라고 적었다. 정조는 그들과 자자손손 변치 않을 관계를 맺고자 했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1793년 음력 3월 20일은 때마침 계축년癸丑年 계축일癸丑日이었다. 이날 모임은 난정수계蘭亭修禊가 행해진 지 25 갑甲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규장각 관원들과 함께 옥류천에서 행해졌다. 난정고사에 부합符合하기 위해 현직 관원과 그 자제들과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까지 불러들여 참여한 신하는 40명이
었다. 정조가 먼저 시를 짓고 모인 신하들에게 시를 짓도록 하였는데, 이때 지은 친필 시 42수가 <내원상화계축갱재축>에 고스란히 실려 전한다.
색색의 한지에 쓴 정조와 관원들의 유상시流觴詩를 보고 또 들여다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문학은 형용을 귀히 여기고, 글씨는 고아함을 귀히 여긴다’ 했다. 옛사람들의 멋과 운치, 필체가 하나같이 고아하면서도 점잖다. 그 시대는 글 잘 쓰고 시를 잘 짓는 일은 정치와 사교를 위한 필수적 덕목이었으며, 그 어떤 권세보다 유능한 서예가나 문장가가 존경과 부러움을 동시에 받았다.
10. 백학산 계곡 암각문을 새긴 시대는 언제였을까
왕과 관료들이 즐긴 곡수유상연曲水流觴宴은 이렇듯 자세히 전해오지만, 백학산 암각문 자료는 어느 문헌에서도 찾지를 못했다. 시골 선비들의 이야기는 향교지에 남아있을 텐데, 장단 향교지는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인터넷 검색으로도 확인되지 않는다. 1849년 계춘季春 3月(헌종15) 간행된 『장단군지』를 보면, 고려에서 조선 시대까지 장단군의 지리나 역사, 문화, 인물, 명승고적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장단군지에 ‘백학산은 고을 서북쪽에 위치한 진산으로,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이 쳐들어오자 친히 산세를 살피고 남쪽에 궁궐을 지었다’ 적혀있다. 이런 명산의 큰 행사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 1849년 사이에는 암각문이 새겨지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조선조 계축년癸丑年은 세종15, 성종23, 명종8, 광해5, 현종14, 영조9, 정조17, 철종4년이다. 그렇다면 장단군지가 간행된 이후, 계축년癸丑年(1853) 일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된다.
1853년 계축년癸丑年은 철종 4년이다. 철종은 즉위 3년 이후 친정을 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김씨에 의해 좌우되었다. 안동김씨 세도가 기승을 부리고 탐관오리들이 득실거리는 계축년, 그해 백학산 계곡에 그 많은 선비들이 모였다면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도탄에 빠진 백성을 보다 못해 올곧은 선비들이 모여 울분을 토한 자리가 아니라면, 어지러운 세상 단절하고 자연 속에 유유자적 살아가는 은둔자들이 훌쩍 유산遊山을 떠난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시대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앞서가는 지성들이 몽매한 나라 조선을 두고 볼 수 없어 어둠을 밝히려는 비장한 심정으로 붓을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꼬리를 무는 의문을 접어두고 아양대로 발길을 옮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