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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면 율곡리 일대는 조선 초기에 덕수 이씨 가문의 터전이다. 1932년에 태어난 이명신은 22살인 1414년부터 관직에 올랐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별장을 짓고 임진강이 보이는 곳에 정자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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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이 소재한 파평면 율곡리 일대는 조선 초기에 덕수 이씨 가문의 터전이다. 율곡의 5대 할아버지인 이명신(1368~1435)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1443년에 별장을 짓고 임진강이 보이는 곳에 정자도 지었다.<ref>경기문화유산원, 문화유산</ref>
  
 
===손자 이의석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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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4일 (수) 21:08 기준 최신판

율곡 이이가 관직을 그만 두고 머물렀던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 변의 정자이다.

화석정, 2008.7.10일

개요

화석정(華石亭)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위치한 조선시대 정자이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1536-1584)의 유적지로 1974.9.26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paki 2024년 7월 12일 (금) 13:16 (KST)

위치

화석정은 파평면 화석정로 152-72번지로 국도 37번도로와 임진강이 인접한 해발 31m의 능선에 위치한다.

임진나루와 300여 m의 거리에 있고 하류에는 초평도가 상류에는 율곡습지공원이 위치한 곳으로 임진강과 함께 건너편의 진동면 동파리가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화석정 남쪽은 율곡 이이의 고향 마을이 있으며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과 6km 이상의 거리가 있다.

건립 및 복원

화석정이 위치하고 있는 자리는 원래 고려 말기의 문신 길재(吉再)가 머물렀던 유지(遺址)로 알려져 있다.

건립

화석정이 소재한 파평면 율곡리 일대는 조선 초기에 덕수 이씨 가문의 터전이다. 율곡의 5대 할아버지인 이명신(1368~1435)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1443년에 별장을 짓고 임진강이 보이는 곳에 정자도 지었다.[1]

손자 이의석 중건

이명신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얼마 후에 곧 폐허가 되자 이명신의 손자인 이의석이 조부가 세운 정자를1480년 경 새로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다.[2]

후손 복원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터만 남아있다가 1673년(현종 14년)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와 이후방이 복원했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됐다.

유림 복원

한국전쟁때 소실된 화석정을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했고, 1973년에는 정부가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작업과 함께 주변을 정비했다

명칭 유래

이명신의 손자인 이의석은 조부가 세운 정자를 복원하면서 동생의 친구인 이숙함에게 편지로 정자 이름을 부탁했다..

편지에는 “정자는 장단 쪽을 향했는데, 석벽이 병풍처럼 되었고, 임진강 상류를 임하여 지세가 매우 험하다. 난간에 기대서 바라보면, 한양 삼각산과 개성 오관산이 저 하늘 아득한 중에 머리카락만큼 약간 드러나는 바, 이것이 정자의 경치이다. 그러므로 자네가 정자 이름을 짓고 기문하여 아름답게 하기를 바라네.’라고 썼다.

이숙함은 당나라의 재상 이덕유의 평천별장 기문에 보이는 ‘화석(花石)’이라는 말을 본떠서 정자 이름을 화석정이라고 지었다.

이덕유는 후손들로 하여금 “평천별장을 파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고, 꽃 하나 돌 한 개라도 남에게 주는 자도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라고 했다. 즉,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지은 것은 이덕유의 사례와 같이, 이명신의 자손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정자를 팔지도 훼손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주요 시설

정자

1937년 전경,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 京畿地方の 名勝史蹟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유림들에 의해 복원한 조선시대 양식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初翼工) 겹처마 팔작지붕 구조이다.

1929년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에는 사방의 벽면을 목재로 마감한 것으로 나타난다.

정자 입구에는1973년 유적지 정화사업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현판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고 내부에는 화석정시(팔세부시)를 현판으로 기록해 부착되어있다.

화석정 시비

화석정시 현액

율곡이 8세 때 화석정에 올라 지었다는 花石亭詩(화석정시), 혹은 팔세부시 (八歲賦詩)라고 전해지는 이 작품은 화석정에 큰 표석(標石)으로 세워져 있으며 율곡이이의 천재성을 나타내는 시로 평가되어 왔다.

율곡이 화석정 시를 지었다는 것은 김장생(金長生)의 시문집인 사계전서 [沙溪全書] 제 6권,/ 심전고 [心田稿] 제 1권 / 율곡전서 제 1권/ 송시열의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의 문헌에 나오므로 이를 근거로 삼았다. [3]

  • 화석정 시문

원문

林亭秋已晚(임정추이만)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山吐孤輪月(산토고윤월)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번역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시인의 시상이 끝이 없구나

멀리 보이는 물은 하늘과 잇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볕을 향해 붉구나

산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울고가고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수목

정자 옆에는 1982.1.15일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마을나무로 지정된 18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있다. 파주시 지정보호수 목록

주변 시설

37번 국도 관통

1990년대 말 서울국토관리청은 화석정과 47m 정도 이격된 임진강변을 따라 37번 국도의 우회도로 개설을 추진했다.

도로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보호법 제20조에 따라 문화재 보호구역 내 형상 변경 허가가 필요했다. 경기도 지방문화재 심의위원회는 화석정 주변에 대한 보존을 결정하고 노선을 변경할 것을 권고했다.

서울 국토관리청은 도로법상 도로의 곡선반경 문제로 노선 변경을 거부하며 예산을 다른 곳으로 전용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파주시는 지역 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우려해 경기도지사에게 재심의를 요청했고, 현장 확인 후 경기도 문화재 심의위원회는 터널을 뚫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터널 건설이 가능한지와 군사시설보호구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파주시는 논쟁 끝에 화석정의 절개지를 보완하는 조건으로 당초 계획대로 공사를 추진했고 2000.11.21일 37번 국도의 노선 중 문산읍 당동리-파평면 율곡리 6.1km 구간을 확장 개통하고 기존 4.7km 구간을 폐지했다. [4]

여론 여담

임진왜란 화석정 소각설

임진나루 주변 위치도

임진왜란 당시 피난길에 나선 선조가 임진강에 도착했지만 일몰이 시작되고 비가 내려 임진강을 건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율곡 선생이 생전에 제자들에게 시켜 정자 기둥에 들기름을 매일 발랐던 화석정을 블태워 그 불 빛으로 임진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선조를 최측근에서 모셨던 영의정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에 의하면 화석정이 아니라 왜군이 뗏목을 만들어 추격하는 것을 막기위해 임진나루의 승청을 불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나루에 도착했을 때에도 비가 내려 길을 찾기가 어려웠지만 남쪽 승청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무사히 동파역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석정을 소각했다는 일화는 율곡선생의 10만 양병설 예견이 임진왜란으로 현실화되자 율곡의 혜안을 존경하고 안타까워한 나머지 이와같은 일화가 구전된 것으로 본다. [5] .

화석정시 작가 진위 논란

노산 이은상( 1903~1982) 선생은 1934년 임진강 적벽을 유람한 뒤 쓴 ‘적벽유’에서 “‘팔세부시’는 율곡 이이 선생 작품이 아니라, 창녕지역이나 성씨와 관련된 문인인 ‘창녕후인 매연거사’라는 익명의 시인이 지었다”고 기록했다.

노산 이은상은 화석정에 걸린 현판에 ‘창녕후인 매련거사(昌寧後人 梅蓮居士)의 작품’이라고 기록된 점에 의문을 표하면서부터 ‘팔세부시’가 율곡 이이 선생의 글이 아니라는 진위 논란을 만들었다.

최근 화석정시에 대한 작가의 진위 여부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통해 율곡 이이 선생이 지은 작품으로 알려 지고 있다.

파평 율곡리의 거주하는 김현국 향토연구가는 조선후기 문신 홍경모가 쓴 "관암전서" 16권에 율곡이이가 팔세에 지은 시를 우계 성혼의 손자인 성직이 90세에 현판에 써서 걸었다는 기록이 있어 화석정시는 율곡의 작품이라고 발표했다. [6]

이와함께 차문성 파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은 조선 영조때 발간한 ‘여지도서’ 상권에는 율곡 이이 선생이 지은 ‘팔세부시’를 우계 성혼 선생의 손자인 성직이 화석정이 복원된 후 벽에 부착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노산 이은상이 250여년이 넘은 화석정 편액 각인된 성직의 호인 ‘매변(梅邊)’을 ‘매련(梅蓮)’으로 잘못 읽어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7]

관련 정보

링크 모음

가볼만한곳


더보기



자료 출처


  1. 경기문화유산원, 문화유산
  2. 차문성. 울곡, 화석정에서 만나다. 2024.8.24 인문학강좌
  3. 블로그 국스, https://blog.naver.com/pctoolsay/20190299299
  4. 송달용 전 파주시장 회고록 -나는 파주인-,http://www.pajuiyagi.com/2016/10/03/문화재화석정옆을-지나가는-37번-국도-제25화/
  5. 우리문화신문 2013.9.12. 권효숙기자 , 율곡이이의 임진강 화석정
  6. 블로그 외계무생물 김현국, 2019.9.6. https://m.blog.naver.com/pctoolsay/221641092560
  7. 경기일보 2020.12.3. https://www.kyeonggi.com/article/2020120311478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