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산성(烏頭山城)은 탄현면 자유로변에 있는 오두산 정상의 백제 성이다. 1991년 8월 2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51호로 지정됐다.
개요
오두산 정상부에 쌓은 퇴메식의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곳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정상부에서 남서쪽으로는 김포 일대, 서북쪽으로는 북한의 개풍군 일대가 한강 하구와 함께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오두산은 삼면이 가파르고 강물과 바닷물이 휘돌아 흐르는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주요 방어시설인 관미성의 입지와 유사하다고 하여 조선시대부터 관미성으로 주목받아 왔다.
지금까지 발견되는 유물로 볼 때 오두산성은 대략 삼국시대 ~ 통일신라 시기에 처음 쌓아졌으며 고려 ~ 조선 시대까지 여러 차례 새로 쌓아지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성을 백제의 관미성이나 고구려성으로 추정하는 것은 지정학적인 가능성 외에는 관련 유물이 확인되지 않아 확증하기 어려우며, 앞으로 정밀조사가 이루어져야 밝혀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산성의 특징
산성은 현재 정상에 통일전망대(統一展望臺)가 들어서 있어 규모와 원형을 확인할 수 없다. 한강과 인접해 있는 가파른 북쪽절벽위에 약 10여m의 성벽이 잔존하고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대략 1.2km 정도로 삼국 시대의 성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한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리고 토사에 덮여 성벽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곳은 6곳 정도이다. 성벽은 해발 80∼100m 선을 따라 가며 축조되어 전체적인 형태는 북 쪽을 윗쪽으로 하여 ᄀ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부근에는 여기저기에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오두산성은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실되고 파손되었으나 1990년 9월부터 1991년 11월 사이의 발굴조사 결과 일 부 보존이 잘되 남아있는 구간에서 어느 정도의 규모가 확인되었다.
확인되어지는 유 물은 삼국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土器), 백자(白磁), 기와(器瓦), 철촉(鐵 鏃) 등으로 발굴되어진 성과를 토대로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일부구간을 보존 · 정비 하여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성벽 쌓기 수법을 보면 밖으로는 위로 올라가면서 돌을 안으로 들여 쌓고, 성벽 내부 는 돌로 채웠다. 이러한 성곽의 형태는 백제 성곽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관미성이 이 바로 오두산성이라는 주장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이곳을 관미성이라고 기록해 더욱주목 받고 있다.[1]
내성벽 발견
2022.5.4일 파주시는 (재)가디언문화연구원이 2021.9월부터 2022.4월까지 실시한 학술발굴조사에서 오두산성 내성벽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내성벽은 통일신라시대 성벽의 축조기법으로 북동쪽 능선 조사 구간에서 확인됐다.
내성벽에는 석축기단 내에 일정 간격(기둥 사이의 거리 2m~3.5m)으로 나무기둥〔영정주, 永定柱〕을 세우기 위해 놓은 초석이 설치됐다. 영정주 초석을 놓은 성곽은 고려시대의 강화 중성과 청주 우암산성 등에서 조사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 성벽으로는 오두산성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어 국내 최초의 사례로 주목된다. [2]
문화재 보호구역
국가나 지자체에서 지정된 문화재는 역사문화환경과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일정 구간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건축등 개발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국가가 지정한 국보, 보물 등의 문화재는 반경 5백미터, 시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는 반경 3백미터로 이내 범위에서 등고선 형태로 3~5개 구역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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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