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다리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임진각 광장 앞 망배단 뒤편에 놓인 다리로 임진강 철교와 연결되어 있다.
개요
원래 경의선 철교는 상ㆍ하행 2개의 교량이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교각만 남아있던 것을 휴전협상을 진행하면서 서쪽 철교를 복구했고 그 남쪽 끝에 임시 교량을 가설했다.1996년 12월 24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62호로 지정됐다.
교량 구조
교량은 6개의 경간(徑間)으로 이루어진 목조 평교(平橋)형식으로 길이는 83m, 폭은 4.5~7m, 높이는 8m 내외이다. 순수한 목구조는 아니고 인장력을 많이 받는 부분에 철재를 사용하여 만든 혼합 구조이다. 통나무가 4개씩 4열로 세워진 교각 위에 사각 받침목과 I자형 강(鋼)으로 만 든 철제 보를 우물 정(井)자형으로 짰고, 그 위에 장선(長線)을 설치한 후 나무로 만든 상판을 올려서 마감했다. 특히 구조적으로 안정을 주기 위해 수평재와 가새가 많이 사용됐다.
철교와 연결
임진강 철교는 경의선을 잇는 상하행선 교량이었으나 중국군 개입으로 연합군이 다급하게 후퇴하면서 철교를 폭파하여 교각만 남아 있었다[1]. 1952년 유엔군측 정전협상단 개성 래봉장을 가기 위해 2개의 상하행선 교량중 비교적 양호한 서쪽(하행선) 교각 철로를 임시로 복구하여 사용했다.
이때 서쪽 교각의 하행선 철로를 차량용 교량으로 복구하면서 육상도로와 연결하기 위해 동쪽 철로(상행선) 남단에 '자유의 다리'를 신설했다.
도로 이용
1952년에 복구된 상행선 철교는 휴전후에 물자와 인력 수송을 위한 도로로 이용됐다. 철교 도로는 도보는 불가하고 오로지 차량으로만 이동이 가능했으며 자유의 다리 남단에서 검문 절차를 거치고 통과할 수 있다.
1차선으로 복구된 철교 도로는 차량의 교행이 불가하여 북문과 남문 검문소에서 차량이 대기 했다가 교대로 통과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1998년 임진강 상류 1km 지역에 통일대교가 설치되면서 2002년에 남북철도 연결을 위한 철로로 복원됐다.
여론 여담=
자유의 다리 구간에 대한 논란
자유의 다리의 구간에 대한 논란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통일 연못에 있는 83m 길이의 목교만을 '자유의 다리'라고 하는지와 701m의 임진강 철교를 포함하여 전체를 '자유의 다리'라고 보는가 이다.
6.25 당시 파주출신이면서 자유신문 종군기자였던 윤경현 옹은 전화 증언을 통해 판문점에서 교환된 포로는 임진강철교 북단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철교를 건너 왔다고 한다.
자유의 다리의 명칭도 대성동을 자유의 마을로 부른것 처럼 포로교환 이전부터 임진강 철교를 자유의 다리라고 불렀고 유엔사에 파견된 최덕빈 중령[2]이 윤경현 기자가 제안한 명칭을 받아 들였다고 증언했다.
6.25 전쟁 당시의 미군 기록을 보면 임진강 철교를 '자유의 다리'라고 지칭했다. 이때 83m의 목교는 휴전후에도 계속 이용됐기 때문에 자유의 다리에 포함되었다고 볼수 있다.
관련 정보
링크 모음
주변 명소
더보기
자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