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산책]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관아가 자리했던 선유리
오늘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문산동초등학교(선유리 788번지) 터는 사실 파주의 심장이 1,300년 동안 고동치던 유서 깊은 땅이다. 이곳은 단순한 학교 부지를 넘어 고구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파주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진두지휘하던 관아가 머물던 자리다.
파주 문산읍 선유리는 예로부터 배내와 서적개울이 합류하여 문산포구로 흐르는 절경을 자랑했다. 신선과 선녀가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땅은 동시에 배가 깊숙이 들어올 수 있는 물류의 허브이자 배산임수의 요새였다.
지형적으로 보면 문산동초등학교 부지는 뒤로는 산이 있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는 외부 침입을 막기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수로를 통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전략적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강물이 들어오던 하안 단구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관아가 들어설 만큼 지반이 안정적인 구릉지에 위치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곳이 천 년 넘게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가항수로(可航水路)의 이점 덕분이었다. 과거에는 서해바다의 조석 간만의 차가 임진강을 타고 문산천까지 이어졌다. 큰 배가 임진강 본류를 지나 문산포를 거쳐 현재의 학교 인근까지 정박할 수 있었기에, 서해의 소금과 생선 등 해산물은 물론 평안도와 황해도 방면의 물자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가장 깊숙한 포구 중 하나로서 명실상부한 물류의 허브였던 셈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서기 146년 고구려 차대왕이 이곳에 술이홀현을 설치한 것이 1,310년에 걸친 관아 역사의 시작이다. 현재 문산동초등학교가 위치한 서원산 아랫마을을 ‘봉아골(峯衙洞)’ 혹은 ‘봉숭아골’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했다. 이는 서원산의 ‘봉(峯)’ 자와 관아를 뜻하는 ‘아(衙)’ 자를 따서 만든 이름으로, 고구려와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 서원현과 원평현의 치소였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지명이다.
삼국시대의 격전지를 거쳐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이 터는 한결같이 파주의 중심을 지켰다. 1398년(태조 7년) 원평군으로 통합되고 이후 원평도호부로 승격되었을 당시에도 관아는 현재의 문산동초등학교 자리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다. 천 년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오던 이 곳은 1456년 원평도호부가 파주목으로 승격되어 현재의 파주리로 이전하면서 문산동초등학교 터는 천 년 넘게 이어온 치소로서의 역할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의 행정구역은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했다. 본래는 파주군 칠정면(七井面) 지역이었으나,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조정 당시 칠정면의 창내동과 이천리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면서 비로소 정식으로 ‘선유리’라는 명칭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은 근현대사의 파고 또한 온몸으로 맞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동문천 주변에는 ‘캠프 라이스’라 불렸던 유엔군 사령부(UNC) 본부가 들어서 정전협정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고, 이후 미 보병 제2사단 산하 부대들이 주둔하는 ‘캠프 개리오언’으로 쓰이기도 했다. 원래 사과 과수원이었던 평화로운 땅이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군사 기지로 변모했던 것이다.

지금 문산동초등학교 운동장을 뛰노는 아이들이 딛고 선 땅은 고구려의 기상부터 조선의 행정, 그리고 현대사의 굴곡까지 숨 쉬는 1,310년 간의 성지다. ‘역사 산책’의 끝에서 만난 이 학교 터는 파주의 어제와 오늘을 잇는 가장 단단한 고리다.
-출처-
1997년 파주문화원에서 발행한 『파주지명유래 전설지』 내 「파주군 청사 이전 내역표(32쪽)」에는 시대별 관아의 위치가 주소별로 정리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문산동초등학교를 포함한 주변 지역인 문산읍 선유리 788번지에 관아가 1310년 동안 위치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