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가 본 임진강 70년-대한민국 유일의 선단제 이야기[1편]
임진강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과 함께 흘러왔다. 강은 마을을 키우고 사람을 먹였으며, 때로는 전쟁과 분단의 격랑을 묵묵히 견뎌낸 증인이기도 하다.
지난 2025년 12월 파주시중앙도서관이 펴낸 『임진강과 함께 살다 — 파주 임진강변 마을 구술채록집』은 적성·파평·문산·탄현 등 임진강변 마을 어르신들의 생애를 채록한 기록이다.
채록에는 대한민국에는 임진강에만 선단제(船團制)가 있고 군사분계선과 민통선이 강을 가로지르는 분단의 강에서, 어부들은 군부대의 통제 아래 짝을 지어 배를 띄우며 70년을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1선단이 둘인 까닭과 발로 차서 버리던 황복이 최고가가 된 사연, 얼음장을 두드려 잉어를 모는 옛 어법의 기억까지 — 이 글은 임진강 어부들이 직접 들려준 임진강의 70년 역사이다.
파주위키는 이 중 임진강 어선단에서 활동한 어부의 이야기와 기타 관련 자료를 활용하여 임진강의 70년 역사를 정리하여 3편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1편, 분단의 강에서 어업은 어떻게 다시 시작되었나
2편, 1선단이 왜 둘일까 — 임진강 어선단의 구조와 운영
3편, 황복부터 참게까지 — 강이 가르쳐준 어부의 기술
1편: 분단의 강에서 어업은 어떻게 다시 시작되었나
1. 임진강의 지역적 특수성
임진강 어선단을 이해하려면 먼저 임진강이라는 강 자체의 특수성을 살펴야 한다.
임진강은 한강의 제1지류이다.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 산맥에서 발원하여 연천에서 한탄강과 합류하고, 고랑포를 지나 문산 일대 저평지를 흐르는 문산천과 합치며, 하구에서 한강과 만나 황해로 흘러든다. 수중보가 없기 때문에 연천 지역까지도 밀물과 썰물이 드나든다. 이 감조(感潮) 특성으로 바닷물을 따라 어종이 풍부하게 회유한다.
임진강은 예로부터 내륙 수로로 이용이 활발하였다. 강변 곳곳에는 배가 기항하여 물자를 싣고 내리는 하항취락(河港聚落)이 발달하였다. 낙하나루, 임진나루, 고랑포나루, 정파나루 등이 임진강의 대표적인 나루터였다. 임진강의 수운은 문산포와 고랑포를 축으로, 도감포와 유진을 경유하여 안협과 토산 등 하구에서 9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감조구간인 하구에서 고랑포까지는 400석 분량의 곡물을 실은 배의 운항이 가능했고, 도감포에서 안협까지는 50석 규모의 범선이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임진강 일부 구간은 군사분계선 이북에 편입되었고, 하류 일부는 임진강 자체가 군사분계선 역할을 한다. 임진강은 남북분단의 상징이며, 그 하류 지역은 민간인 통제선으로 묶여 있어 임진강의 생업 활동을 가로막는 통제선으로도 작용한다. 이로 인해 임진강 어업은 다른 어떤 지역과도 다른 군부대 통제를 받는 형태로 자리잡았다.
임진강은 또한 해수역과 합수역, 강수역이 공존하는 강이다. 산란기에 따라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황복·눈치), 강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물고기(숭어·뱀장어·참게), 그리고 정착성 물고기(잉어·쏘가리)가 모두 존재한다. 이는 임진강 어법의 다양성을 만들어낸 생태적 배경이다.
임진강 어업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단제(船團制)로 운영된다. 파주어촌계는 일반적인 바다 중심의 어촌계와 달리 내수면 어촌계로 전국 최초로 결성된 사례이다.

2. 시대순으로 본 임진강 어업의 흐름
2.1 선사시대~조선시대: 임진강 어로의 시작
임진강변을 따라 널리 분포된 조개무지 등의 선사유적과 유물들을 통해 일찍이 어로 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농경 생활이 정착된 후에도 내륙을 따라 동으로 뻗어 있는 임진강은 내륙에 수자원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임진강 어법을 기록하였다. 수숫대를 이용한 참게잡이 어법을 ‘게밤’이라 하였고, 통나무를 동아줄에 묶어 얼음장을 두드려 잉어를 그물 안으로 몰아넣는 잉어잡이 어법을 ‘현록서포해법(玄鹿西浦海法)’이라 칭하였다.
2.2 일제강점기~해방 직전: 수운과 어업의 번성
일제강점기 임진강은 활발한 수운의 중심지였다. 임진강 수운에는 종선배(從船船)가 드나들었고, 문산포에는 많은 종선배가 정박하였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문산포에는 종선배가 조기잡이에서 돌아오면 ‘조기 천지였다’고 할 만큼 조기를 많이 잡아 유명하였다.
장석진의 할아버지는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1800년대 말 고랑포 주변에서 독립하여 무역선인 황포돛배를 운영하였다. 예성강 포구에서 개성의 특산물인 인삼과 석물 등을 실어 고랑포, 마포나루, 외포리 등지로 옮기고, 다시 외포리에서 새우젓을 싣고 와 북부 내륙인 연천, 포천, 양주에 공급하였다. 일제강점기 고랑포는 화신백화점이 있을 정도로 큰 포구였다.
내수면 어촌계는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반적인 어촌계가 바다를 중심으로 발달한 반면, 내수면 어촌계는 파주어촌계가 전국에서 최초이다. 장석진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 시대까지 어업이나 수상 무역에 종사한 사람들은 갑부였다고 한다. 임진강 어업이 가난한 자의 생업이 아니라 자본을 갖춘 상업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2.3 해방~한국전쟁 직전(1945~1950): 임진어부계의 활동
해방 직후에도 임진강에서는 어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50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에는 임진강 삼봉낚시꾼 53명의 사진과 가족 어업의 수입까지 소개되어 있다. 임진어부계의 계원 53명이 매년 11월부터 익년 3월의 결빙기까지 5개월간 잉어잡이로 200여 명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당시 생산고가 1만 3000원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잉어잡이는 그해 일어난 6·25전쟁으로 중단된 이후 그 명맥이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2.4 한국전쟁과 분단의 충격(1950~1953)
박광식의 가족사는 38선 형성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38선이 형성되기 전 박광식의 큰아버지는 이남인 연천에 나와 있었고, 아버지는 이북에 있었다. 큰아버지가 아버지를 지게에 짊어지고 농사일 가는 것처럼 가장하여 모셔온 직후 38선이 생겼다. 다시 가서 부모님을 모시고 나오려 하였으나 철조망이 쳐져 나머지 가족은 이북에 남겨졌다.
장석진의 할아버지는 1·4 후퇴 때 피난을 가지 못해 중공군에게 잡혀 임진강변에서 돌아가셨다. 가족은 두지리에 정착하였다.
한국전쟁의 종전 이후 임진강은 군사적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임진강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몇몇 허가된 어로 활동 종사자 외에는 출입이 제한되었다.
2.5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 어업 공백기
장석진의 증언에 따르면 임진강에는 1950년대에 어업권이 전혀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공식적인 어업 허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지리에서 처음으로 어업권이 발급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초까지 임진리 일대에는 철조망이 없었다. 어부 최영선의 증언에 따르면 1960년대 임진리에는 철조망이 없었고, 미군부대에서 어업권을 주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강에서 수영도 하고 얼음도 탔다. 일부는 강 건너 미군 막사를 출입하기도 하였다.
2.6 1965년: 임진강 어업의 공식 허가
임진강의 어업이 공식적으로 허가된 것은 1965년부터이다. 어업권은 배 1대, 모터 1대, 출입증 2장으로 구성되며, 매매와 상속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동안 모터배 허가는 내지 않았는데, 이는 월북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파주시는 임진강 전체를 5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2.7 1968년 1·21 김신조 침투 사건: 통제 강화
1968년 1·21 김신조 침투 사건 이후 임진강변에는 철조망과 방어시설이 대대적으로 구축되었다. 임진리 이장 김병수의 증언에 따르면 12·1 침투 라인까지, 즉 장파리까지 철조망이 쳐졌다.
자유교 일대는 간첩이 넘어오던 통로였다. 자유교 선단장 문무곤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교 인근은 통일대교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구간으로, 4선단과 3선단 사이에 강물 병목이 있어 옛날부터 물살이 가장 셌다. 이북에서 넘어오던 간첩들이 이 병목 지점에서 물살에 막혀 위로 잘 오지 못했다고 한다. 강 일부 구간에는 그물을 쳐서 자유 다리에 접근하지 못하게 낚싯줄을 늘어뜨려 두는 이른바 ‘인간 낚시’까지 설치하여 간첩이 걸리도록 하였다. 다리가 있기 때문에 자유교 구역은 전략상으로 매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2.8 1968년: 두지리매운탕의 시작
장석진의 어머니는 1968년 두지리에서 매운탕 식당인 두지리집을 시작하였다. 군부대 주변에 식당이 없던 시절, 어머니가 군인들에게 장어를 구워주고 회를 떠주면서 시작된 식당이 현재까지 형제들이 이어가고 있다. 일본 징용을 갔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요리 솜씨가 어머니를 통해 형제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2.9 1970년대: 1사단 구역 어업권 발급과 선단 체계 확립

1970년대에는 1사단 구역인 임진리에서 내포리까지의 구간에서 어업권 발급이 시작되었다. 장석진의 증언에 따르면 1사단 구역의 선단은 임진리 2선단, 장산리 3선단, 자유교 선단, 사목리 4선단, 내포리 5선단의 순서로 형성되었다.
어업권은 처음에는 땅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에게 먹고 살라는 취지로 발급되었다. 가난한 주민의 생계 대책이 어업권 발급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이다.
박광식의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박광식은 양주에서 태어나 1954년 적성면 주월리로 이주한 7남매의 장남이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늑막염을 앓는 빈한한 가정에서, 19세 때 송아지를 키워 팔아 배를 사고 출입증이 나오기를 1년 기다려 1972년 20세에 어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에는 경인북부수협이 파주 일원을 업무구역으로 확장하였다.
2.10 1990년대 초: 자유교 선단의 신설
자유교 선단은 본래 군부대가 강력하게 출입을 통제하던 구역이었다. 1990년대 초, 약 30년 전 통제가 완화되면서 빈 공간이 생기자 어부들이 허가를 받아 들어갔다. 자유교 선단장 문무곤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유교 선단이 없었으나 군부대 통제가 완화되면서 빈자리가 생겨 허가를 내고 들어갔다고 한다. 자유교 선단은 자유의 다리 철길 밑으로 900m 구간이며, 배 4척에 어부 8명으로 구성되었다.
2.11 1995년: 동두천 폐수 사건과 환경 위기
1995년 동두천 가축 공장에서 시작된 오폐수로 인해 한탄강을 비롯한 파주·연천 임진강 일대까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임진강을 살리기 위한 치어 방류 사업 등이 파주어촌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활동을 통해 황복 멸종 위기 극복 등 큰 성과를 이루었다.
1996년에는 임진강 어민들이 직접 의정부에서 시위를 벌였다. 김병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의정부에는 가족 공장이 매우 많았으며, 동두천과 의정부 시청까지 임진강 어민들이 가서 시위하였다고 한다.
2.12 1997년 IMF: 전국 최초 수산물 직판장
장석진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전국 최초로 수산물 판매장을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파평의 폭포어장 옆에 임시 매대로 시작했고, 이후 파주어촌계 민물고기 직판장으로 발전하여 적성면 가월리에 자리잡았다. 민물고기 판매를 전문적으로 한 것은 파주시가 최초였다.
2.13 2000년대 초~중반: 자원 회복 노력
박광식은 약 2005년경부터 황복 부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김포 양어장에 두 달간 가서 부화 기술을 배운 뒤 황복 치어를 주월리 아래 임진강으로 방류하는 일을 7~8년간 했다. 박광식의 증언에 따르면 황복 치어를 생산하여 파주시에 납품하느라 정작 본인은 강에 나가 고기잡이를 못 했다고 한다.
2007년 박광식은 주월리에 영어조합법인을 설립하였다. 처음 5명으로 시작한 법인은 19명까지 늘어났으나 갈등으로 인해 2년 만에 그만두었다.
2.14 2010년대: 모터배 본격 도입

모터배 허가가 본격화된 것은 2010년 전후이다. 박광식의 증언에 따르면 모터배가 나온 지 약 15~16년이 넘었다고 한다. 모터배 허가를 위해 어민들은 군부대에 CCTV 설치 비용을 부담하는 등 각종 지원을 하였다.
마력 규정은 파주에서도 양분된다. 장석진의 증언에 따르면 교하강이나 문산천, 장파리까지는 마력 수의 제한이 없는데 이는 군에서 통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임진리부터 내포리까지는 9사단과 1사단에서 30마력 이상을 허용하지 않는다. 박광식은 동력 제한의 근본 이유를 월북 가능성 차단으로 설명하였다. 동력을 달아놓으면 이북으로 건너가는 것이 빨라지기 때문에 사단에서 못 달게 했다는 것이다.
2012년 박광식은 메기 양식장을 운영하였으며 아들이 2년간 운영하다가 군 입대로 중단되었다. 2014년에는 이전 메기 양식장 자리에 민물고기 양식장을 설치하였다. 2015년경 박광식은 결국 고기잡이배를 팔고 농사에 전념하였다.
2.15 2019년: 통일대교 배 유실 사건
2018~2019년 큰 물난리가 났을 때 임진리 어부들은 통일대교에 배를 묶어 놓았다. 그러나 통일대교에 배를 확인하러 갔을 때 군이 출입문을 열어주지 않아 배가 유실되는 일이 있었다. 김병수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연대장 및 대대장과 격하게 항의하였고, 결국 파주시에서 250만 원을 보조받아 인천에 가서 허가 있는 배를 새로 사 왔다. 어선은 1998년에 건조된 배로 700여만 원을 주고 구입하였으며, 등록 비용 50만 원과 중개인 소개비 30만 원이 추가로 들었다.
2.16 2022년 현재: 7개 선단 체제
2022년 현재 임진강에는 7개 선단의 어업 종사자가 군부대 통제 하에 어로 활동을 하고 있다. 임진강의 어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겸하거나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으며,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은 주민은 소수에 불과하다. 어촌계는 북파주 어촌계와 파주시 어촌계로 분리되었다. 북파주 어촌계는 적성·파평의 1선단을, 파주시 어촌계는 2~5선단과 자유교 선단을 관할한다.
[다음 2,3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