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 |
|||
| 13번째 줄: | 13번째 줄: | ||
꿈에 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자 왕은 바로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왕께 고하기를 “장지산 아래 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바로 장지산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었고, 절이 지어진 후 원신궁주와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전해 온다.<ref>파주시 문화관광 역사유적</ref> | 꿈에 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자 왕은 바로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왕께 고하기를 “장지산 아래 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바로 장지산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었고, 절이 지어진 후 원신궁주와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전해 온다.<ref>파주시 문화관광 역사유적</ref> | ||
| + | ==문헌 기록== | ||
== 계산기정의 혜음석불== | == 계산기정의 혜음석불== | ||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또는 ‘미륵불(彌勒佛)’, ‘혜음석불’, ‘쌍불입상’이라고도 불린다.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다. 장지산 중턱(용암사 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혜음석불은 멀리서도 잘 보여 의주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도 했다. 1803년(순조3) 동지사 서장관의 막료로 연행에 참여했던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혜음석불’의 위용을 묘사하는 시가 있다.<ref>중부일보 2017.4.30. 조선후기(12) 의주대로와 연행노정</ref> |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또는 ‘미륵불(彌勒佛)’, ‘혜음석불’, ‘쌍불입상’이라고도 불린다.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다. 장지산 중턱(용암사 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혜음석불은 멀리서도 잘 보여 의주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도 했다. 1803년(순조3) 동지사 서장관의 막료로 연행에 참여했던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혜음석불’의 위용을 묘사하는 시가 있다.<ref>중부일보 2017.4.30. 조선후기(12) 의주대로와 연행노정</ref> | ||
| 31번째 줄: | 32번째 줄: | ||
</poem> | </poem> | ||
| + | ===혜음석불 아래에서 쓰다=== | ||
| + | <poem> | ||
| + | '''過慧音石佛下記事 姜希益 / 과혜음석불하기사 강희맹''' | ||
| + | |||
| + | 天生山得立道修 천생산굴립도방 | ||
| + | 冥頑卽爲堅且剛 명완비회건자강 | ||
| + | 苦封鮮飯洞不乾 태봉선의음불건 | ||
| + | 萬古峰然臨高岡 만고구연림고강 | ||
| + | |||
| + | 何人斯鎭作雙佛 하인차무작쌍불 | ||
| + | 面目省似覺臺王 면목조사구덕왕 | ||
| + | 經營虛器竟何意 경영허기경하의 | ||
| + | 立馬我欲問其詳 립마아욕문공상 | ||
| + | |||
| + | 馬前走卒行且言 마전주졸행차언 | ||
| + | 此石驚怪識荒唐 차석빙괴성황당 | ||
| + | 錯戌佛驅具福利 착성불구구복리 | ||
| + | 夢感貴戚卿咸陽 몽감귀척경함양 | ||
| + | |||
| + | 施財化緣伏綿綿 시재화연자지도 | ||
| + | 全會四衆佛張皇 분회사중영장황 | ||
| + | 當時所專不可計 당시소비불가계 | ||
| + | 千夫力盡萬牛僵 천부력진만우강 | ||
| + | |||
| + | 功成日夜行前燈 공성일야지건웅 | ||
| + | 佛力闊遠多微浮 불력활원다미망 | ||
| + | 從此前村擧百家 종차전촌수백가 | ||
| + | 半歲聯絡俱流亡 반세조재구유망 | ||
| + | |||
| + | 愚衆始謀今始覺 우맹시미금시각 | ||
| + | 何善地獄與天堂 하자지옥여천당 | ||
| + | 能移此力構逆旅 능이차력구역려 | ||
| + | 可置兩區臨康莊 가치량구림강장 | ||
| + | |||
| + | 焉使行旅免露宿 언사행려면로숙 | ||
| + | 可庶暑雨沾繁霜 가서우우첨번상 | ||
| + | 我聞此語發大笑 아문차어발대소 | ||
| + | 雨蛙至微善思量 이수지미선사량 | ||
| + | |||
| + | 人生禍福僞如此 인생화복진여차 | ||
| + | 有心求利還招殃 유심구리환초앙 | ||
| + | 職本太史當謹書 직첨태사당근서 | ||
| + | 深愧我身非三長 심괴아신비삼장 | ||
| + | |||
| + | '''번역''' | ||
| + | 해음석불 아래에서 쓰다 /강희맹 | ||
| + | |||
| + | 천연으로 바위가 길가에 서있는데 | ||
| + | 무지하게 울툭불툭 굳고 또 단단하네 | ||
| + | 이끼가 나고 돋고 축축히 마르지 않아 | ||
| + | 만고에 우뚝 높은 언덕에 임하였네 | ||
| + | |||
| + | 누가 짝고 새겨 쌍부처를 만들었는가 | ||
| + | 면목이 흡사 부처를 닮았구나 | ||
| + | 이 같은 헛된 것을 만든 뜻이 무엇인가 | ||
| + | 말 세우고 내가 자세한 것 물으려 했네 | ||
| + | |||
| + | 마부가 가면서 하는 말이 | ||
| + | 이 돌의 괴상한 짓이 참 황당합니다 | ||
| + | 부처는 새겨 만들어 복리를 구할 제 | ||
| + | 석을의 귀족들이 꿈에 감응했고 | ||
| + | |||
| + | 중들의 화연으로 재물을 시주 받아 | ||
| + | 모여든 사중들이 떠들썩 하였음죠 | ||
| + | 당시의 비용이 얼마인줄 알 수 없고 | ||
| + | 천명 인부 기진맥진 일만 소가 넘어졌죠 | ||
| + | |||
| + | 공사 이루차 밤낮으로 영험을 기다렸으나 | ||
| + | 불력이 넓고 멀어 대개는 일쏭달쏭 | ||
| + | 그때부터 앞 마을 몇 백 집이 | ||
| + | 반년 동안 피폐하여 모두 유리했네 | ||
| + | |||
| + | 우맹들이 처음엔 미혹하였다가 이제야 깨달았으니 | ||
| + | 어는 것이 지옥이며 천당입니까 | ||
| + | 이만한 힘으로 여관을 지었으면 | ||
| + | 큰 길가에 두 채를 넉넉히 지어 | ||
| + | |||
| + | 지나는 행인에게 노숙을 면케 하여 | ||
| + | 더위와 비를 피하고 된 서리도 안 맞을 것을 | ||
| + | 내가 그 말을 듣고 허허 웃으면서 | ||
| + | 내가 비록 미천하나 생각이 가특하다 | ||
| + | |||
| + | 인생의 화복이 원래 그러하니 | ||
| + | 맘먹고 이를 구하면 도리어 재앙을 부르느니라 | ||
| + | 내 직책이 사관으로서 삼가 써 되야 할 터이나 | ||
| + | 내 몸이 삼장 아님을 깊이 부끄러워하네 | ||
| + | </poem> | ||
| + | |||
| + | ==여론 여담== | ||
==칠층석탑과 동자상== | ==칠층석탑과 동자상== | ||
[[File:pk-yongmiri-mirreuk.jpg|400px|섬네일|미륵불 동자상]] | [[File:pk-yongmiri-mirreuk.jpg|400px|섬네일|미륵불 동자상]] | ||
2025년 6월 29일 (일) 13:04 판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93호 파주용미리석불입상(坡州龍尾里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개요
마애이불입상은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長芝山)에 위치한 용암사(龍岩寺) 경내에 위치하여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쌍미륵 석불입상으로 천연바위벽을 이용하여 제작했다. 거대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고 그 위에 목, 얼굴, 갓 등을 따로 만들어 얹어 놓았다.
왼쪽의 둥근갓을 쓴 불상(원립불, 圓笠佛)은 목은 원통형으로 당당한 가슴을 드러냈으며 몸체는 법의(法衣)로 감싸고 있는데 양쪽으로 내려진 옷자락이 섬세 하게 표현했다. 오른쪽의 네모난 갓을 쓴 불상(방립불, 方笠佛)은 합장한 손 모양만 다를 뿐 조각된 수법은 왼쪽의 불상과 비슷하다.
전설에 의하면 원립불은 남상(男像), 방립불은 여상(女像)으로 전해 진다. 고려 시대 선종(宣宗)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왕자를 낳지 못했다. 어느날 밤 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 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기슭에 있 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인데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하고 사라져 버렸다 한다.
꿈에 서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고하자 왕은 바로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장지산에 다녀온 사람이 왕께 고하기를 “장지산 아래 에 큰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하였다. 이 얘기를 들은 왕은 바로 장지산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게 하고 절을 지었고, 절이 지어진 후 원신궁주와 불공을 드리니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고 전해 온다.[2]
문헌 기록
계산기정의 혜음석불
용미리석불입상(龍尾里石佛立像) 또는 ‘미륵불(彌勒佛)’, ‘혜음석불’, ‘쌍불입상’이라고도 불린다. 사행 길의 명소였던 관계로 많은 사신들이 직접 유람하거나 시문을 남겼다. 장지산 중턱(용암사 내)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혜음석불은 멀리서도 잘 보여 의주대로를 오가는 이들의 이정표 역할도 했다. 1803년(순조3) 동지사 서장관의 막료로 연행에 참여했던 이해응(李海應,1775∼1825)의 연행록인 ‘계산기정’에 ‘혜음석불’의 위용을 묘사하는 시가 있다.[3]
曇雲如浪護山頭
물결같은 흐린 구름 산 머리를 지키는데
石佛分身幷兩肩
돌부처 분신하여 두어깨를 나란히하고 있다.
萬劫風磨猶卓立
만겁을 바람에 갈리면서도 그대로 우뚝서서
懸應太始上干天
멀리 태초와 호응하여 위로 하늘을 지른다.
혜음석불 아래에서 쓰다
過慧音石佛下記事 姜希益 / 과혜음석불하기사 강희맹
天生山得立道修 천생산굴립도방
冥頑卽爲堅且剛 명완비회건자강
苦封鮮飯洞不乾 태봉선의음불건
萬古峰然臨高岡 만고구연림고강
何人斯鎭作雙佛 하인차무작쌍불
面目省似覺臺王 면목조사구덕왕
經營虛器竟何意 경영허기경하의
立馬我欲問其詳 립마아욕문공상
馬前走卒行且言 마전주졸행차언
此石驚怪識荒唐 차석빙괴성황당
錯戌佛驅具福利 착성불구구복리
夢感貴戚卿咸陽 몽감귀척경함양
施財化緣伏綿綿 시재화연자지도
全會四衆佛張皇 분회사중영장황
當時所專不可計 당시소비불가계
千夫力盡萬牛僵 천부력진만우강
功成日夜行前燈 공성일야지건웅
佛力闊遠多微浮 불력활원다미망
從此前村擧百家 종차전촌수백가
半歲聯絡俱流亡 반세조재구유망
愚衆始謀今始覺 우맹시미금시각
何善地獄與天堂 하자지옥여천당
能移此力構逆旅 능이차력구역려
可置兩區臨康莊 가치량구림강장
焉使行旅免露宿 언사행려면로숙
可庶暑雨沾繁霜 가서우우첨번상
我聞此語發大笑 아문차어발대소
雨蛙至微善思量 이수지미선사량
人生禍福僞如此 인생화복진여차
有心求利還招殃 유심구리환초앙
職本太史當謹書 직첨태사당근서
深愧我身非三長 심괴아신비삼장
번역
해음석불 아래에서 쓰다 /강희맹
천연으로 바위가 길가에 서있는데
무지하게 울툭불툭 굳고 또 단단하네
이끼가 나고 돋고 축축히 마르지 않아
만고에 우뚝 높은 언덕에 임하였네
누가 짝고 새겨 쌍부처를 만들었는가
면목이 흡사 부처를 닮았구나
이 같은 헛된 것을 만든 뜻이 무엇인가
말 세우고 내가 자세한 것 물으려 했네
마부가 가면서 하는 말이
이 돌의 괴상한 짓이 참 황당합니다
부처는 새겨 만들어 복리를 구할 제
석을의 귀족들이 꿈에 감응했고
중들의 화연으로 재물을 시주 받아
모여든 사중들이 떠들썩 하였음죠
당시의 비용이 얼마인줄 알 수 없고
천명 인부 기진맥진 일만 소가 넘어졌죠
공사 이루차 밤낮으로 영험을 기다렸으나
불력이 넓고 멀어 대개는 일쏭달쏭
그때부터 앞 마을 몇 백 집이
반년 동안 피폐하여 모두 유리했네
우맹들이 처음엔 미혹하였다가 이제야 깨달았으니
어는 것이 지옥이며 천당입니까
이만한 힘으로 여관을 지었으면
큰 길가에 두 채를 넉넉히 지어
지나는 행인에게 노숙을 면케 하여
더위와 비를 피하고 된 서리도 안 맞을 것을
내가 그 말을 듣고 허허 웃으면서
내가 비록 미천하나 생각이 가특하다
인생의 화복이 원래 그러하니
맘먹고 이를 구하면 도리어 재앙을 부르느니라
내 직책이 사관으로서 삼가 써 되야 할 터이나
내 몸이 삼장 아님을 깊이 부끄러워하네
여론 여담
칠층석탑과 동자상
구전에 의하면 故 이승만 前 대통령 모친께서 용암사 마애석불 앞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하여 이승만 前 대통령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1954년 이승만 前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시 용암사를 방문하고 참배하며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7층석탑을 세웠다. 동자상은 마애불, 왼쪽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7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다.
이승만 前 대통령이 4.19로 하야하면서 재야관련 단체들이 문화재를 훼손했다고 비판하자 1987년 철거하여 종무소 우측으로 옮겼다고 한다. 2009년에 현 주지 태공 스님이 일반인들의 관람을 위해 삼성각 옆으로 다시 옮겨 놓았다.[4]
미디어 자료
관련 정보
VR 사진
주변 명소
더보기
자료 출처
- ↑ 위키백과사전
- ↑ 파주시 문화관광 역사유적
- ↑ 중부일보 2017.4.30. 조선후기(12) 의주대로와 연행노정
- ↑ 현대불교신문, http://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