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원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현재의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지역에 존재했던 원院 시설이다. 의주대로 상의 중요한 교통 거점 역할을 했으며,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행차할 때 머물던 주정소로 사용됐다.

1770년경 팔도지도

개요

1361년 겨울,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하면서 분수원이라는 곳에 머물렀다.

이것이 분수원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당시 분수원은 일반 백성이나 관리들이 경유하는 원으로 대부분 사찰에서 운영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분수원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교통 시설로 바뀌면서 의주로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원의 역할을하면 숙박을 제공 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임금이 능행차를 할 때 잠시 머물던 특별한 장소가 되었고 영조와 고종이 인조의 장릉을 참배하러 갈 때도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명칭 변화

분수원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焚修院분수원'이라고 불렸다. 이 이름의 '분수'는 향을 피우고 도를 닦는다는 뜻으로, 당시 이곳이 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스님들이 머물며 수행하고, 의주로를 오가는 통행객에에게 숙박를 제공했다.

조선 중기인 1656년, 『동국여지지』에서는 '分水院분수원'으로 표기됐다.. 이전의 '焚修院분수원'이라는 이름도 함께 사용되었지만, 새로운 명칭이 나타났다. 이는 단순한 명칭 변경보다는 유교국가인 조선이 불교적 색채를 지우는 과정으로 추정된다.

이후 '汾水院분수원'이라는 표기도 나타났는데, 이는 분수원과 같은 의미로 물의 흐름을 형상화한 한자였다. 焚修院분수원에서 分水院분수원, '汾水院분수원으로 이어지는 명칭 변화는 600년 역사의 변천사를 담고 있다.

위치

1980년대 이전의 분수재, 국가유산청

1763년 청송심씨 심정최가 경기감사에게 올린 글에 "분수원 옛터에서 뒤쪽으로 백보 가면 심지원의 묘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심지원의 묘는 2007년 이장하기 전까지 윤관장군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분수원(焚修院)이 현재 윤관장군 묘역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1895년 일본이 측량하여 1899년에 제판한 지도에는 분수원이라는 명칭과 함께 건물이 표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의 분수원(分水院,汾水院)은 현재 여충사와 충효관 뒤편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여충사 뒤편 숲속에서 조선시대 건물의 초석과 장대석이 발견되고 2021년에는 윤관장군 묘역에서 조선후기에 제작된 기와 파편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기능과 역할

분수원은 시대에 따라기능과 역할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전형적으로 사찰에서 운영되는 원으로 통행객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발굴된 용미리 혜음원의 역할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분수원은 승유억불 정책에 따라 분수원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면서 관료를 위한 공식적인 숙박 시설로 전환 된 것이다. 특히, 영조가 장릉에 참배하러 갈 때, 고종이 능행차를 할 때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는 기록을 보면 역할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분수원의 역할이 달라지자 일반 백성들은 근처의 세류점이라는 민간 시설을 이용했고 당시 이 곳을 주막, 여막, 야점, 여점이라고 불렀다.

폐지 시점

1895년 일본이 조선을 측량하여 만든 지도에는 분수원과 건물이 표시되어 당시까지는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함께 1899년에 편찬된 『파주군읍지』와 1900년 고종이 능행차를 할 때의 기록에서 분수원이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그렇지만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지도에는 분수원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1895년과 1916년 사이 어느 시점에 분수원이 폐지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관련 정보

링크 모음

가볼만한곳



더보기



자료 출처


  • 김진곤, 의주대로 분수원 구간에 대한 재검토 / 파주연구 제15호 2021년, 파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