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음원지
고려시대 국립숙박시설과 왕이 숙박하는 행궁으로 이용되던 부지로 1998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발견하게 됐다.
개요
1998년 폭우로 광탄면 용미리 우암산 자락에 산사태가 발생했을때 주민이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기와를 발견하면서 9백년만에 혜음원지가 세상에 알려졌다. 혜음원지는 혜음령 고개를 왕래하는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 신자와 왕족이 기증하여 만들고 운영된 숙박시설이다.
2001년부터 2015년까지 10차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실시하고 2017년 발굴지 정비공사를 완료했다. 혜음원지는 2005.6.13일 국가사적 제464호로 지정됐다. — pi 2021/07/14 23:24
창건 배경
혜음원지 주변은 개경에서 남경(서울)을 가는 길목으로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지역이다. 길목에는 혜음령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어 산짐승과 도적이 자주 출몰하여 위험이 많았다. 이 고개를 무사히 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무기를 가지고 함께 출발해야만 했다.
1119년 고려 예종은 신하인 이소천이 건의한 대로 국가재정을 지출하지 않고 백성이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사찰과 민가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소천은 묘향산에 있는 혜관스님을 만나 승려 1백여명과 경비를 마련하여 1120년2월에 착공하여 2년만인 1122년 2월에 혜음원을 완공했다. 그 후 왕의 남경(서울) 순행을 대비하여 왕이 숙박하는 행궁도 설치했다.
혜음원의 쇠락
발굴조사에 따르면 혜음원지 전지역에 20cm 두께의 목탄 섞인 소토층과 다량의 기와가 무더기로 쌓여진 것을 발견했다.
고려 인조가 1136년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1140년 혜음원지를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행궁지를 추가로 건립했다. 그렇지만 13세기 몽골 칩입때 전소되면서 숙박기능을 하던 '원'만 유지된 것으로 보고있다.
고려사 39권 공민왕 10년조에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행 할 때 임진강을 건너 도솔원, 분수원, 사평원 등을 거쳐서 광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다. 공민왕이 혜음원과 4~5km 거리에 있는 '분수원'을 이용한 것은 혜음원이 1359년 이전부터 쇠락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1]
발견 과정
1998.8.5일부터 서울 및 경기지방에 1,100㎜ 이상의 국지성 호우가 발생하면서 우암산에 산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광탄면 용미4리 윤석한 이장은 주민 몇 명과 함께 계곡 하천에서 석축을 복구하고 있었다. 복구 중에 흙더미에서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기와를 발견했다.
윤이장은 동네에서 동국대학교 문화재관련 학과를 다니던 김경섭 대학생에게 보여 주었고 학생은 담당교수에게 전달하면서 조사가 시작됐다.[2]
발굴조사
1998년 '혜음원'이라는 기와편이 발견된 후 여러차례 학술조사가 이루어지고 2001년부터는 혜음원지 북동지역부터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그 후 2015년까지 모두 10차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혜음원지 전체 규모가 알려졌다.
최초 발굴조사는 2001.8.27~2001.12.22일까지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 연구소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혜음원지 북동쪽 1~3단 지역을 발굴하여 '혜음사' 명문 기와, 용두편, 청동향완 등을 출토되어 왕이 머무는 행궁지로 조사됐다.
최초 발굴조사에 이어 2002년, 2003년,2004년까지 발굴하고 국가사적 제464호 지정되었고 2012년까지 10회 걸친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발굴 현황
발굴 결과
혜음원지는 우암산 산줄기에 맞추어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단을 낮추면서 조성됐다. 전체 발굴 면적은 35천여㎡로 축구장 5개 정도 규모로 건물지는 동서방향을 축선으로 양방향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결과로는 11단에 걸쳐 총34동의 건물지가 발견됐고 행궁지와 사찰지, 숙박시설인 원지로 나누어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건물지 외에도 외곽담장지, 배수로, 집수정 , 화단, 연못지 등 다양한 유구가 발견됐다.
왕이 머무는 행궁지는 북동쪽에 1~4단 위치하며 사찰지를 헐고 조성한 흔적이 확인되어 원지보다 나중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가장 위쪽에 정전, 입구쪽에는 연회나 모임을 위한 대형 누각지가 위치하고 있다.
행궁지 가장 위쪽인 1단 건물지 중앙에는 정면9칸 측면 3칸의 대형건물지가 있고 중앙건물지 초석 높이가 좌우측 건물지보다 20~30cm 정도 높다.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는 평면이나 중앙 건물지가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어 이 건물을 정전으로 보고있다.외곽 담장과 별도로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내곽 담장을 설치했다.
사찰지와 원지는 같은 지역에서 발견됐고 앞쪽(5~9단)에는 원지가, 뒤쪽(3~4단)에는 사찰지가 있다. 사찰지에는 금당지, 중정이 있는 건물지 등 축조 방법이나 석재가 원지 건물지와 다르면서 경전을 보관하는 윤장대와 청자 등 생활유물이 집중 출토됐다.
원지는 2×1칸이 하나의 방을 이루고 있다. 2칸에 하나씩 한쪽으로 치우쳐 4각형의 화덕과 같은 난방시설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고, 남쪽에 혜음원의 정문으로 볼 수 있는 주출입문이 있다.
발굴지 특징
혜음원지는 산세를 이용하여 수로를 전체 공간을 일주하도록 친수환경으로 조성했다. 이러한 시설은 고려시대에 창건한 다른 사찰에서는 찾기가 힘든 특이한 사례이어서 더욱 의미가 깊다.
11단으로 조성된 혜음원지의 건물 주변마다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우암산(329m) 자락에서 내려오는 물을 저수하는 연못을 여러개 설치했다. 보통은 높은 곳에서 최단 거리의 낮은 곳으로 배수로를 설치하지만 혜음원지는 2단마다 한 번 정도로 좌우로 흘러가게 조성했다.
건물 주변을 흐르던 물은 11단 축대 가장 아래 부분 서남쪽에 있는 연못지로 집수됐다. 이 곳 연못지에는 경복궁 경회루와 같이 수변공간과 주변 산세와 풍광이 어울리는 대형 누각도 발견됐다.
출토 유물
혜음원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매우 다양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惠蔭院(혜음원)' 명문막새와 '惠蔭寺' 등이 새겨진 명문기와는 왕이 머물기 위한 별원과 원을 관리하는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건물의 규모 및 위상을 추정할 수 있는 용두와 잡상 같은 특수 기와가 출토되었고 고려청자가 1천점이나 발견됐다. 주로 고려 왕실에서 사용되는 접시, 대접, 향로 등으로 대부분 전라도 강진과 부안에서 제작됐다.
한편 '惠蔭'이라고 새겨진 칠기굽접시가 전국 최초로 출토되고 신라말 고려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됐다. 이외에도 제의용구, 생활용구, 건축부자재 등 고려시대의 시대상, 생활상, 문화수준 등을 보여주는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알려졌다.
사적지정
2002년 9월 16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64호 파주용미리혜음원지로 승격]되었고, 2011년 7월 28일 '파주 혜음원지'로 변경됐다.
정비 계획
2018.4월 파주시 보고서에 따르면 혜음원지 발굴조사와 유적지 정비 사업에 전체 106억원 정도가 투입되었고 앞으로도 유적지 복원 및 전시관 건립 등에 44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봤다.
1998년 “혜음원” 기와편이 발견되면서 10차에 걸친 발굴조사와 발굴지 정비를 완료 했고 2018년에 진입로 개설을 추진하고 있다. 파주시는 2016년 혜음원지 종합정비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배수체계 정비 및 관람환경 조성, 유구 추정복원 및 방문자센터 건립 활용, 건물복원 연구 등의 사업을 단계별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했다.
방문자센터
혜음원의 가치와 의미를 관람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방문자센터가 2022.11.12일 개관됐다. 방문자 센터는 건축면적 약 800㎡ 지상 2층의 규모로, 전시실, 영상실, 교육실, 사무실, 편의시설 등이 조성됐다.
전시실에는 혜음원의 조성 배경, 발굴과정, 출토 유물 등과 ‘인터렉티브 체험’ 실 등의 시설의 운영된다. 영상실에서는 혜음원의 사계를 디지털 실감 영상으로 담아 아름다운 혜음원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2pi2022.11.28.
문화재 보호구역
국가나 지자체에서 지정된 문화재는 역사문화환경과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일정 구간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건축등 개발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국가가 지정한 국보, 보물 등의 문화재는 반경 5백미터, 시도에서 지정한 문화재는 반경 3백미터로 이내 범위에서 등고선 형태로 3~5개 구역으로 구분한다.
여론 여담
혜음원지 소원돌
용미4리 출신 주민이 혜음원지 윗 부분에 소원돌이 있다며 2018년 촬영된 사진을 보내왔다. 다음날인 2021.11.12일 현지를 확인했다. 바닥돌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상돌은 사라진 상태이다.
제작년도는 알 수 없지만 혜음원지에 인접해 있어 오래전 부터 존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혜음원지 부근은 상서로운 기운이 있는 곳으로 전해져 있고 용미4리 진대굿은 아직도 맥을 이어 오고 있다.
소원돌은 경북 영천, 공주시 안정사 등 국내 여러곳에 존재하고 있다. 사각형의 받침돌과 원형의 상돌로 구성되고 상돌은 자연석 또는 공모양의 돌로 되어있다. 소원석 앞에서 자신의 소원을 빌고 상돌이 손으로 들어지지 않으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유래가 있다.— pi 2021/11/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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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출처
- ↑ 까마구둥지 인용,http://luckcrow.egloos.com/v/2425012
- ↑ 2021.7.12일 윤석한 용미4리 전 이장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