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독[2편]-신수현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던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부재중 전화 74통, 읽지 않은 메시지 205개. 액정 위에 떠오른 숫자들은 저마다 수연의 안부를 걱정하는 척 그날의 사건을 잔인하게 캐묻기 위해 굶주린 입을 벌리고 있었다. 수연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점심시간 식당 줄에서, 탕비실의 커피머신 앞에서, 자신은 잘게 씹히고 뜯겨 나가는 공공재가 되어 있을 것이었다.
인간들은 타인의 불행을 마주할 때 겉으로는 탄식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린다. “세상에, 어쩌면 좋아. 수연씨 얼마나 놀랐겠어.” 하지만 그 위선의 탄식 끝은 대개 기묘한 활기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들은 수연의 뺨이 붉게 달아오르던 그 수치스러운 찰나를 머릿속에서 슬로비디오처럼 복기하며, 그 위에 각자가 가진 편견의 물감을 덧칠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오래전부터 둘이 유난히 눈 맞추며 웃을 때가 많았다니까.”
“누가 그러는데 둘이 점심시간에 회사 뒤 모텔로 들어가는 걸 똑똑히 본 사람이 있대. 그냥 소문이 아니야.”
“아니, 장 팀장이 5년 전에 수연 씨 엄마 병원비로 몇백만 원을 내줬다며. 그게 그냥 평범한 직장 상사로서 가능한 일이야?”
소문은 발이 없었으나 잔인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단 이틀 만에 소문은 사무실의 담벼락을 넘어 건물 전체로, 사람들의 비틀린 상상 속에서 가장 자극적인 서사로 완성되어 갔다.
암 투병 중인 도연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혼미한 정신으로 아내에게 ‘이수연’이라는 이름을 뱉었고, 이에 격분한 아내가 회사로 들이닥쳤다는 이야기는 한 편의 완벽한 막장 드라마가 되어 전 직원의 스마트폰 속을 유영했다. 수연이 느꼈을 모멸감과 공포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뱉기 좋은 대로 씨부리는 입들의 잔혹한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것은, 어제까지 다정하게 웃으며 따뜻한 커피를 건네던 동료들이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앞장서서 자신의 삶을 즐겁게 난도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었다. 수연은 이제야 온몸으로 깨달았다. 그날 사무실에서 자신의 뺨을 내리친 것은 나성미의 물리적인 손바닥만이 아니었다. 그 장면을 구경하던 수많은 눈동자와 그날 이후 잠시도 쉬지 않는 사람들의 혀가 수연의 영혼을 사정없이 난타하고 있었다.
그때 손바닥 안에서 진동이 한 번 더 짧고 묵직하게 웅웅거렸다. 수연의 시선이 얼어붙었다. 액정 화면 위 ‘장도연 팀장님’이라는 발신인 이름 위로 서슬 퍼런 문장들이 떠올랐다.
[도연이 당신을 찾아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당신뿐이네요. 당장 호스피스 병동으로 와 주세요.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봐야겠답니다.]
도연의 아내 나성미였다. 도연이 생의 마지막 한 줌 남은 숨결을 ‘이수연’이라는 이름을 통과시키는 데 쓰고 있다는 사실은 수연에게 구원이 아니라 거대한 재앙이자 공포였다.
‘가야 하나. 아니, 내가 왜.’ 수연은 척추를 타고 오르는 한기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그곳에 가면 자신을 불륜녀로 확신하는 아내의 매서운 독설과 더 자극적인 먹잇감을 노리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병적인 의부증에 사로잡힌 나성미는 병실에 들어선 자신을 향해 정말로 살기를 뿜어내며 머리채라도 쥐어뜯을지 몰랐다. 설령 그곳에 가서 진실을 악착같이 소명한들 광기에 찬 나성미가 믿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수연이 끝내 발을 돌린 것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방이 막힌 방 안에서 천천히 깨달아가는 것이 있었다. 그 병실에 자신이 발을 들이는 순간, 자신과 도연이 함께 쌓아올린 것들이 세상의 오독(誤讀) 앞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이었다. 그들이 나누었던 것을 수연은 지키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이 세상 누구도 알아봐 줄 수 없는 형태로라 하더라도.
사방이 막힌 방 안에서 부산의 그 눅눅했던 밤이, 톨스토이를 이야기하며 고독을 고백하던 도연의 옆모습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생의 마지막 문턱에서 그가 간절히 부르고 있는 것은 이 비정한 세상에서 자신의 진실된 영혼을 알아봐 줄 유일한 관객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수연은 천천히 걸어가 거울 앞에 섰다. 며칠 사이 핼쑥해진 얼굴 위로 나성미가 새겨놓은 붉은 낙인이 여전히 유령처럼 남아 있는 듯했다. 오래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 안에는 이미 대답이 있었다.
*
수연과 도연이 ‘독서 클럽’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시작한 모임은 도연의 어릴 적 꿈을 알게 된 뒤부터였다. 도연이 중학교 1학년 시절 자신이 쓴 글을 보며 소질이 남다르다며 아이들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던 국어 선생님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고 했다.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등 떠밀려 경영학과로 진학해야 했던 청년 도연의 꺾여버린 좌절이, 핸들을 잡은 그의 마르고 앙상한 손마디에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도연은 유년 시절부터 책 읽기에 유달리 목을 맸다. 틈만 나면 활자 속에 파묻히는 아들을 그의 아버지는 멸시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사내놈이 되어서 소설책이나 들여다보는 약해 빠진 존재라며 혀를 차던 아버지의 그림자는 도연에게 거대한 낙인이었다. 그 폭력성을 고스란히 체득하며 자란 도연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지우고 싶은 얼룩이었다.
그런 도연은 항상 가죽 표지로 감싼 낡은 수첩 하나를 분신처럼 가지고 다녔다. 오랜 손때가 묻어 본연의 색보다 옅어진 갈색 수첩. 그는 그 비밀스러운 공간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것을 탐닉했다. 말로는 차마 뱉어낼 수 없는 날 것의 감정들을 문장으로 받아 적는 행위, 그것이 도연에게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팀장님, 지금이라도 조금씩 써보시는 건 어떠세요?”
수연의 조심스러운 부추김에 도연은 그저 먼 창밖을 보며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모임이 시작되었다. 한 달에 한 번 같은 고전을 재독하고 토론하는 시간. 도스토옙스키의 죄의식을 논하고 톨스토이의 인본주의를 처절하게 톺아볼 때면, 찌든 사무실의 스트레스는 증발하고 열병 같던 청춘의 순수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도연이 수연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그 뜨거운 공명 안에서 나이 차이 같은 현실의 숫자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대화 속에서 완벽한 주파수의 일치를 경험하며 그들에게 그 점심시간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축제보다도 완벽하고 유일한 구원이었다.

세상의 눈을 피해 그들이 선택한 서글픈 아지트는 점심시간의 낡은 모텔 방이었다. 아내의 결벽증적인 감시 탓에 퇴근 후의 시간은 도연에게 원천 봉쇄되어 있었고, 회사 근처의 식당이나 카페는 동료들의 날 선 시선이 도사리고 있었다. 오해나 소문의 제물이 되어 평온한 일상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에게, 그 은밀하고 퇴폐적인 공간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도서관이 되어주었다.
허름한 응접 테이블에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나누어 먹으며 문학을 논할 때, 두 사람은 비로소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가끔 도연은 자신이 몰래 끄적인 글을 소년처럼 수줍게 내보이며 수연에게 세상에서 유일한 독자가 되어주길 청하기도 했다.
나성미의 지독한 의부증을 알게 된 것은 8년 전 부산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팀원인 은비가 수연의 자리로 슬그머니 다가와 목소리를 죽였을 때, 등줄기를 스치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선배님, 장 팀장님이랑 부산 출장 갔던 날 있잖아요. 그 와이프라는 여자한테 회사로 전화가 왔었어요. 진짜 출장 간 게 맞냐고 유도신문하듯 악착같이 따져 묻는데, 소름 돋아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수연은 심장이 발끝으로 툭 떨어지는 서늘함을 느끼며 은비를 응시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사실대로 말했죠. 일본 바이어 미팅 때문에 긴급으로 간 거라고. 그랬더니 이번엔 누구랑 갔냐며 취조하듯 꼬치꼬치 캐묻더라고요. 기분 진짜 별로였어요. 선배님, 장 팀장님 아내분 의부증 사내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대요. 지난번 김 과장님 장례식장까지 한밤중에 쫓아와서 남편이 진짜 거기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난리를 피웠대요.”
은비는 정말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수연의 팔뚝을 꼭 쥐었다.
“그러니까 선배님도 조심하세요. 괜히 엮여서 험한 꼴 당하지 마시고요.”
“응, 고마워, 은비야. 걱정 마……”
그날 이후 수연은 도연과의 사이에 칼로 자른 듯 팽팽한 선을 그으려 기를 썼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나약한 의지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다. 출장길 차 안이나 생경한 도시의 커피숍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평소라면 결코 꺼내지 않았을 사유와 감정의 깊은 층위로 조심스럽게 내려가곤 했다.
수연은 평생을 외로움이라는 척박한 외딴섬에서 보냈다.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황망히 세상을 떠난 뒤 엄마와 단둘이 남겨진 세계는 늘 살얼음판처럼 서늘했다. 어린 수연을 간신히 견디게 한 것은 오직 책뿐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찰나, 앙상하던 외로움은 비로소 고결한 고독으로 탈바꿈했다.
6년 전, 마지막 버팀목이었던 엄마마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수연은 줄곧 완전한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그런 그녀의 메마른 세계에 도연이 찾아왔고, 함께 문학을 나누기 시작한 뒤로 수연은 더 이상 자신이 버려진 존재라고 느끼지 않았다. 어딘가에 자신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고 온 세상이 등을 돌려도 내 편이 되어줄 단 한 사람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도연라는 존재가 주는 그 단단한 확신 하나만으로도 수연에게는 더 이상의 무엇도 필요치 않았다.
*
며칠 뒤 수연은 사무실에서 도연의 부고장을 받았다.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덤덤했다. 마침내 잔인했던 모든 챕터가 끝났다는 무거운 마침표 하나가 마음속에 툭 찍혔을 뿐이다. 눈물은커녕 메마른 슬픔조차 차오르지 않았다. 수연은 끝내 도연을 찾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은 강물처럼 고요히 흐르고 또 흐를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세상이 나를 비난하든 말든,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도연의 부고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공증인 사무실입니다.”
수화기 너머 건조한 남자의 목소리는 도연이 수연에게 남긴 유언장이 있음을 알렸다. 서류를 보낼 주소를 묻는 말에 수연은 잠시 망설이다 사무실 주소를 찍어 보냈다. 정확히 한 시간 후, 짙은 양복을 입은 공증인 사무실 직원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는 말없이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 입구는 붉은 인장과 함께 빈틈없이 봉인되어 있었다. 마치 타인은 절대로 들여다보아서는 안 될 도연의 닫힌 심장 같았다.
수연은 책상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커터칼을 댔다. 날카로운 칼이 서류 봉투의 윗등을 스치듯 가르자, 벌어진 틈 사이로 도연의 마지막 흔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장의 고액 수표였다. 수연이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꺼내 들었을 때, 그녀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수연이 평생 먹고 입지 않고 벌어도 결코 모을 수 없는 액수였다. 도연이 남몰래 주식으로 일궈냈다는 그 거대한 자산은, 단 한 장의 얇은 종이에 불과했음에도 수연의 손목을 짓누르는 듯 묵직했다.
하지만 수연의 시선을 끝내 붙잡은 것은 돈이 아니었다. 수표 뒷면에 얌전하게 포개져 있던, 도연의 단정한 필체로 적힌 편지 한 통이었다. 편지 봉투를 열자마자 배어 나오는 익숙한 만년필 잉크 냄새가 마치 도연이 바로 곁에서 숨을 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수연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손으로 도연의 마지막 고백을 펼쳐 들었다.
-나의 특별한 독자였던 수연에게.-
내 생의 마지막 문장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람들은 내가 당신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온갖 추측의 서사들을 만들어내겠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누군가의 영혼을 깊이 읽어본 적이 없는 눈먼 사람들이니까요.
내 나이 쉰셋에 이승을 떠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여든 살까지는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하늘이 부르면 가는 게 맞겠지요. 어차피 삶은 순식간에 지나가기 마련이니까요.
난 하늘나라에 가서도 당신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신과 문학에 대해 소통할 때면 존재의 충만함을 느꼈습니다. 당신과 함께했던 5년은 나의 나머지 생 전체보다 더 값지고 소중했던 내 유일한 진짜 삶이었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세상은 나를 ‘팀장’이라는 도구의 직함으로만 읽었습니다. 아무도 내 진짜 속내에는 관심이 없었지요. 아내는 나를 평생 가장의 의무로만 읽었지만, 그것 역시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두 사람이었을 뿐이지요. 그 어긋남이 그녀의 불행이었고, 내 불행이기도 했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이수연이라는 사람만이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장도연라는 한 인간으로 대해주었습니다.
내가 사무실 구석에서 남몰래 적어 내려가던 서툰 문장들을 당신이 처음으로 발견해주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모두가 숫자의 성과만을 쫓아 미쳐갈 때, 당신은 내 문장 속의 고독을 가장 먼저 알아봐 주었지요. 나를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 귀하게 여겨주어서, 내 영혼의 숨구멍이 되어주어서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나의 주식 계좌에 쌓인 그 막대한 숫자는 사실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글자들의 나열일 뿐이었습니다. 아내에게 그 비밀을 끝내 털어놓지 못한 것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돈의 존재가 밝혀지는 순간, 내가 간신히 지켜온 나의 문학적 세계가 돈벌이의 수단으로 난도질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함께 야근하며 나누었던 그 따뜻한 커피, 그리고 당신이 내가 쓴 문장 옆에 남겨주었던 “이 문장 무척 감동이에요.”라는 짧은 한 마디. 내게는 그 소박한 친절이 이 계좌에 찍힌 억 단위의 숫자보다 훨씬 더 구원 같았습니다.
수연 씨, 나는 이제 내가 사랑했던 글들처럼 가볍게 먼지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 재산은 당신에게 주는 세속적인 선물이 아닙니다. 나의 가장 진실한 내면을 끝까지 지켜봐 준 유일한 관객에게 지불하는 내 생의 가장 정중한 관람료입니다.
사람들이 이 증여를 두고 어떤 저급한 이름을 붙이더라도 절대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당신과 내가 공유했던 그 고요하고도 뜨거웠던 문장의 시간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이 돈으로 당신이 꿈꾸던 그 아름다운 글들을 세상에 마음껏 써 내려가길 바랍니다. 당신의 문장 속에서 내가 다시 숨 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유일한 글벗이었던 도연으로부터.-
편지가 끝나는 문장 위로 수연의 뜨거운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번졌다. 도연의 부고를 들었을 때도 메말라 있던 눈물이, 오직 자신만을 남겨두고 떠난 한 남자의 뒤늦은 진심 앞에서 마침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린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억지로 격리할 필요는 없었다. 공증된 편지는 한 남자의 마지막 구원이자, 세상이 수연에게 채운 보이지 않는 족쇄를 완전히 풀어주는 해제 통보서였다.
수연은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도연이 생전에 건넸던 낡은 문고판 소설책 한 권을 꺼내 박스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부산의 그 눅눅했던 밤, 톨스토이를 이야기하며 그가 수연에게 빌려주었던 책이었다. 누렇게 바랜 책장 사이에는 도연이 만년필로 꾹꾹 눌러 적은 구절이 여전히 선명했다.
‘진정한 예술은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영혼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남긴 억 단위의 숫자를 ‘유산’이라 부르며 부러워하겠지만, 수연에게 진정한 유산은 손때 묻은 이 책 한 권과 그 속에 박제된 메모들이었다. 통장의 숫자가 수연의 물리적 자립을 도왔다면, 이 문장들은 그녀의 영혼을 격리 상태에서 영원히 해방시키고 있었다. 수연은 책상 위 소박한 짐들을 박스에 차분히 담았다. 등 뒤로는 여전히 사나운 수군거림이 밀려들었다.
“결국 돈이었네. 끝까지 고고한 척 순수한 척하더니…”
시기심과 비아냥이 뒤섞인 목소리들이 사무실의 탁한 공기를 타고 수연의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그 칼날 같은 말들이 수연의 피부를 단 1밀리미터도 찌르지 못했다. 가방 안에는 도연이 남긴 가장 정중한 관람료가 담긴 통장과 공증된 편지 한 통이 묵직하고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구태여 구차하게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세상에는 인간의 말 따위로 증명할 수 없는 고결한 진실도 있는 법이니까. 오해하고 싶은 이들은 평생을 오해 속에 살 것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이들에게 타인의 진심은 늘 과분한 사치일 뿐이니까. 도연을 평생 가장이라는 무게로만 읽으며 돈만 좇았던 그 아내 역시, 어쩌면 도연이 세상에 남긴 가장 슬픈 오독(誤讀)의 결과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수연은 그 여자에 대한 서글픈 미움마저 박스 안에 함께 담아 테이프로 단단히 봉했다.
수연은 사무실 문고리를 잡기 전 잠시 멈춰 서서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나성미에게 뺨을 맞았던 그날의 통증과 수치심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단단하게 차오른 자존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타인이 악의로 써 내려가는 막장 드라마의 나약한 조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을 오롯이 독립적으로 기술해 나가는 작가였다.
수연은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 문을 밀어젖혔다.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 속으로, 그녀의 구두 굽 소리가 경쾌하고도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오독 1편 보기]




